출퇴근길 창밖으로 보이는 수많은 건물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건물을 위해 간판이 존재하는가? 간판을 위해 건물이 존재하는가?” 번화한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이런 의문은 더 강하게 든다.
두꺼운 간판 옷을 걸치고 있는 건물들을 보고 있으면 쟤들은 과연 숨이나 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답답해 보인다. 또 어찌나 자극적이고 산만한지 쳐다보고 있으면 멀미가 날 지경.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판의 역할은 “특정 대상을 알리는 시각 표지물” 쯤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대다수의 간판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특정 대상을 알리기는커녕 보는이로 하여금 불쾌감만 주고 있으니 말이다.
사진 출처 : http://ggholic.tistory.com/1724
도시 속 거리가 주는 인상은 자리 잡은 건축물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하지만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했던가. 건축물에 빼곡히 들어찬 천편일률적 간판들은 모든 거리를 뻔하게 만들어 버린다. 특정 장소를 찾기 위해 간판을 보다 보면 “이 간판이 이 간판이냐... 저 간판이 저 간판이냐...” 무슨 금도끼 은도끼냐고... 내가 지금 도끼 찾으러 갔냐고...
아무튼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에 봉착하게 되곤 한다. 어쩜 이렇게 특징 없이 비슷하기만 한건지... 한마디로 굉장히 아이돌스럽다. 물론 상징적으로 통용되는 업종별, 업태별 이미지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대부분의 간판 유형은 뻔하디 뻔한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jjoqwert/82
그나마 주간은 참아줄만하다. 하지만 꼴에 간판이랍시고 너도 나도 빛을 뿜어대는 밤거리의 간판은 더 끔찍하다. 누군가는 이런 싸구려 불빛을 “도시의 야경”이라 하겠지만 필자는 굳이 번잡하고 자극스럽기만한 것들에게서 내 소중한 낭만을 찾고 싶지는 않다.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ngwh2&logNo=140118051601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거슬리는 곳이 있다. 바로 휴대폰 매장들이다. 이쯤에서 몇 년전 유행했던 휴대폰 매장의 간판 카피가 떠오른다. “폭탄 세일, 우리 사장님이 미쳤어요...” 물론 처음에는 재밌고 신선했다. 조금 더 넓은 아량을 베풀어 보자면 “미쳤어요” 응용시리즈까지는 그래도 봐줄 만했다. 그런데 우리 사장님들께서 말장난에 재미를 붙이셨는지 서로 “미쳤다고” 난리다. 정말 휴대폰 매장 사장님들은 모두 미쳤거나, 미치고 싶은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렇게 “미쳤어요”형 간판은 주변 건물과 매장들을 우후죽순처럼 뒤덮기 시작했다.
대학가나 쇼핑가처럼 번화한 곳을 지나칠 때면 휴대폰 매장들이 밀집된 지역을 쉽게 볼 수 있다. 그곳에 줄지어 있는 간판들은 더 이상 재미있거나 독특하지 않다. 각기 다른 매장들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개성은 눈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도 없다. 그들은 주로 크고 자극적이며 화려한 간판을 선호한다. 정작 보는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나보다.
휴대폰 매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례들은 우리에게 좋지 못한 예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좋은 간판을 만들기 위한 방법은 뭘까. 대다수의 디자이너가 하나 같이 입을 모으는 10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너무 크게 만들지 말 것.
2. 간판의 빈 공간을 많이 확보할 것.
3. 부수적인 것들을 너무 많이 달지 말 것.
4. 원색은 되도록 쓰지 말 것.
5. 텍스트는 간판의 절반 크기 정도로 할 것.
6. 텍스트의 크기를 대조시킬 것.
7. 상호는 재치있게 만들 것.
8. 알맞은 시각 이미지를 곁들일 것.
9. 화려함 보다는 친근하게 만들 것.
10. 보는 즐거움을 극대화 시킬 것.
위에 언급한 방법들은 간판 제작시 “디자인”이나 “디자이너”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방법에 가깝다. 비록 간판 제작의 전문가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런 개념을 알고 만드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전문 업체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몇 안 되는 원칙조차 지키지 않는 곳들이 많다. 대다수의 업체들은 간판 제작시 “디자인”에 할애하는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다. 그리고 업체마다 가지고 있는 디자인 시안들은 다양성의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고 그들이 말하는 “디자인”이란 기존의 한정적인 소스를 가지고 재조합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참신한 디자인이 나오기란 어려울 수밖에.
혹시라도 간판 설치가 필요한 건물주 혹은 매장주가 있다면 위와 같은 원칙들을 한번쯤은 숙지하길 바란다. 업체만 너무 믿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니 부담스럽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사진 출처 : http://www.kokorostudio.net/tt/393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하나의 상가건물에 크고 작은 매장들이 다양하게 입점해있고 각층마다 각기 다른 매장과 간판들이 개별적으로 설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건물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로 일관성을 보이기는 힘들다. 이런 점을 극복하고자 몇몇 곳에서 “간판개선 시범사업”이 시행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사실상 역부족이다. 우선은 개개인이 인식하고 있는 간판에 대한 사유 개념을 공적 영역으로 더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개인의 사유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미관과 직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제작과 시공에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옥외광고물에 대한 법적 영역 이외에 간판에 대한 건물주나 매장주의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실질적 개선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2012 서울시 선정 좋은간판 수상작_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haechiseoul?Redirect=Log&logNo=110151471835
간판은 매장의 브랜드 이미지를 좌우하는 중요한 “얼굴”이기도 하다. 최근에 들어서야 대형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사업자들에게도 통합적 브랜드 이미지가 중요시되고 있는 추세지만 비용상의 이유로 규모가 작은 브랜드의 매장에서는 일관성 있는 관리와 운영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사실 개인사업자가 BI부터 매장의 외관, 인테리어까지 모든 것을 관리, 운영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대충 만들어 달아 놓고 “물건만 좋으면 되지!”라는 식으로 일관할텐가.
큰 돈 들여서 만들라는 거 아니다. 간판 하나만 잘 만들어도 투자대비 큰 홍보 효과를 볼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곳이 너무나 많다. 매장 성격과 매장주의 사업철학에 알맞은 특징을 잘 찾아내고 또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해낸다면 적은 돈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간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간혹 블로그나 SNS에 소개되는 꽤 괜찮은 개인 매장들의 사례들을 보면 간판에 대한 매장주의 관심도가 대부분 높다는 걸 알 수 있고 유사 사례들의 간판들은 대부분 화려한 것보다는 수수한 디자인을 지향하고 있다.
자! 건물주, 매장주들이여. 간판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보도록 하자. “나는 디자인을 잘 몰라서...”라는 핑계도 이제는 그만 하자. 보는 눈들은 다 있지 않은가. 또 본인의 매장과 브랜드에 대해서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방법부터 찾자. 그 다음이 제작이며 시공이다. 그리고 사람은 남의 떡이 더 커보이기 마련이라지만 적어도 간판은 이와 별개로 생각하자. 내게 맞는 옷을 찾아 입듯이 매장과 건물에게도 알맞은 옷을 입혀주자.
결국 좋은 간판이란 매장주의 관심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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