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일년의 반이나 지났다. 이맘때쯤이면 책상 위는 연초에 힘찬 다짐을 세우며 사놓은 문구류들이나 주위에서 선물로 받은 것들로 가득하다. 책상을 정리하다보면 다이어리나 스케쥴러가 툭툭 튀어나온다. 신년 계획을 세운답시고 지난 연말에 산 것도 있고 비슷한 시기에 여기저기서 홍보용으로 뿌리는 다이어리, 스케쥴러들이 알게 모르게 내 책상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도 않고 필기를 하기에도 애매하지만,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구석에 박아둔 것들도 있다. 그래도 아직까지 왜 버리지 않고 쳐박아 두었을까 싶어서 살펴보니... 줄지어 놓으니 이건 무슨 이미지들이 유럽배낭여행코스다. 내 연초 계획이 유럽여행이었던 것도 아닌데 왜 이렇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팬시점에 가면 죄다 이런 것들 뿐이었던 것 같다. 선택의 폭이 없었던 것이다! 안되겠다. 다이어리에 뭘 쓸까 고민하기 전에 마음에 들지 않는 다이어리 디자인에 대한 얘기부터 좀 써야겠다
표지나 속지의 면면을 채우고 있는 문구나 그림들을 보고 있다면 왜 이래 유치한 걸 갖고 있었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게 무슨 말이야~ 하며 얼굴을 찡그리기도 한다. 진작에 고민을 좀 하고 살 것을! 팬시점에 갔던 그 날을 돌아보자. Simple, Vintage, Traveler. 많이 볼 수 있는 단어들이다. Sieze the day... Carpe diem... 오글거리고 이젠 지겹기까지 하다. 저 멀리 유럽의 명소로 장식된 다이어리, 스케쥴러들도 유독 눈에 많이 띈다. Euro journal De voyage... 꼭 이걸 사서 유럽 배낭여행을 준비해야 될 것 같은 무언의 압박이 느껴진다. 요즘 세상에는 파리 여행이 기본인가?
다이어리 표지의 에펠탑을 보며, 내 비록 지금은 방학마다 알바뛰느라 바쁘지만 졸업전에 꼭 떠나리 하는 각오를 새기는 것까지는 좋단 말이지. 하지만 갈 곳이 거기 밖에 없나. 가까이에는 우리나라의 다보탑, 첨성대도 있고 꼭 해외로 나가야겠다면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 인도의 타지마할 등 다른 곳도 많다. 사실 에펠탑이건 무엇이건 천편일률적으로 표지를 가득 메운 이 전경들은 거북스럽다. 나는 ‘일기’를 사러 온거다. 관광기념품을 사러 온 게 아니라고.
청춘들의 마음을 울리는 명소들로 도배된 표지는 어쨌거나 뽀대나서 좋은 셈 치더라도, 속지는 답답하다. 친절하게 유럽의 곳곳을 소개하는 이미지들로 가득차 메모할 자리까지도 위협하고 있다. 이런 관광일기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러스트로 장식된 다이어리들에서도 불편한 점을 느낄 수 있다. 대체 여기에 몇자를 적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좁게 자리를 넘어 온 소녀가 있다. 꽃보다 더 이쁜 그녀는 마주선 꽃미남에게 꽃을 건네주려는 듯 한데 이 아름다운 장면이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때에는 그런 그림들이 염장을 지르는 것 같다. 아! 엊그제 다른 남자와 같이 있는 것을 본 짝사랑을 생각하며 분노의 저주글을 쓴다면 재밌겠다.
나름 정성들여 채운 이미지들이 항상 환영받을 순 없을 성 싶다. 차라리 텅 빈 민짜를 내놓으면 그 쪽으로 눈이 가겠다. 이 다이어리는 내게 있어서 어떤 의미와 목적이 될 것인지, 스스로 하나씩 채워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비어있는 것이 오히려 잘 채워진 것일 수도 있다. 일본의 무인양품無印良品 ‘MUJI‘는 장식을 달지 않고서도 상품의 본질에 충실하면 좋은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가장 좋다‘ 또는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가 아닌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기능성의 실현과 품질의 추구를 브랜드 가치로 삼고 있다. 온갖 장식으로 채워진 것들보다 비어 보이는 제품이 더 높은 가격에 잘 팔리는 게 말이 되는가? 조금이라도 더 손이 갔을 것 같고 신경썼을 것 같은 것이 무엇인지 헷갈린다. 무엇을 남기고 정리할까 고민하는 것이 무엇으로 채워 넣으려 하는 고민보다 더 가치있다는 것일까?
어디서 보지 못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거나 채워넣는 것이 디자이너의 기술이요, 능력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채울까만 생각할 게 아니고 어떻게 덜어낼까도 생각해야 한다. 수많은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고 더 혼란스럽다. 팬시점에 가보면 우리의 지갑을 노리고 손을 뻗쳐오는 수많은 제품들이 온갖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무채색의 배경에 포인트 있는 색깔로 깔끔하게 적혀 있는 제품이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비단 나 뿐일까? 그런 제품이 더 자신감있고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복잡한 장식으로 이쁘게만 잘 나온다면 나쁘게 볼 것은 아니지만, 이 놈도 이쁘다고 외치고 저 놈도 이쁘다고 외치면 대체 누가 이쁜 것인지, 그럼 얘네들 중에서도 또 이쁘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헷갈리게 된다. 앞에 놓인 다이어리들을 살펴보자. 단연 눈에 띄는 에펠탑? 샹젤리제 거리에서 세느강을 끼고 바라보는 그 자태는 누가 봐도 멋지다! 하지만 그 에펠탑이 다이어리에 들어가서 될 일이 아닌 듯 한데~
어쩌면 여기서 이런 딴지를 늘어놓는 것은 내가 솔로라서 사랑이 가득한 다이어리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훨훨 하는 저 꾀꼬리들, 암 수 서로 정다운 이들은 내 생각에 절대 공감못할테지. 어쨌거나 다이어리가 이런 저런 사람들을 고려해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무엇이 이쁘고 어떻게 해야 이쁜지, 무엇이 이뻐보이고 무엇이 이쁠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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