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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면호상/[ 빠쓰정류장 ] 장편 연재 소설

長篇小說 '빠쓰 정류장' - <제19화> 꽃의 이름을 불러 주었고

 

 

 

                                                       

 

 

 

 

 

18.

꽃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간성에서 하룻밤을 묵고 우리들은 내륙 쪽의 터미널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바닷가를 따라 길게 늘어선 7번 국도의 터미널들과 달리 산속에 촘촘히 박혀 있는 터미널들은 찾기도, 찾아가기도 쉽지 않았다. 어느새 남편이 지도 위에 꼼꼼하게 터미널들을 표시해 놓고 있었는데도, 제각각 다른 모양의 터미널들은 구경꾼처럼 아무데서나 불쑥불쑥 나타났다. 피로에 지친 우리들을 놀리듯 서로 다른 방향의 갈림길 위에서 나타난 터미널 간판도 여럿이었다.

그 때마다 번번이 남편은 모든 것이 제 잘못인 듯 곤혹스러워했고, 리브는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투정을 부렸다. 당장이라도 남편이 그를 향해 무언가를 집어 던질 것 같아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시간의 가르침을 알고 있는지, 인간의 언어를 지웠는지, 끝내 입을 벌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터미널들을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우리는 익숙한 터미널 대합실에 들어와 있었다.

- , 여기는 와 봤던 덴데? 그치 언니, 여기 기억하지?

당연했다. 거기는 여드름이 많은 군인을 따라 버스를 탔던 홍천시외버스터미널이었다. 또 다시 우리는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아무리 먼데를 보면서 걷고 또 걸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마는 시간. 그러나 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삶이고, 시간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 그 봐, 그 봐! 내가 아까 거기서 춘천 쪽으로 가야한다고 그랬더니, 형부가 우기고 우겨서 여기로 온 거잖아? 근데 이게 뭐야? 여기는 와 본데잖아? 춘천 가서 닭갈비 한 냄비 먹고 나면 지금쯤 기운이 펄펄 나서 열심히 돌아다닐 수 있을 텐데, 이렇게 헛고생 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하여간, 하여간! 머리가 나쁘면 팔 다리가 고생한다는 옛날 말 하나도 틀린 게 없어, 정말, 어유!

생각 없는 리브의 말은 아무데서나 불쑥불쑥 튀어 나왔다. 혹시 남편이 그 이야기를 듣게 될까 괜히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남편은 운행표와 지도를 살피며 매표창구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 형부, 이게 뭐에요! 여기는 우리 와봤던 데란 말이에요!

혹시라도 머리가 나쁘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를 꺼낼까,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 언니도 기억나지? 그 여드름쟁이 군인 아저씨. 왜 그 이봉조처럼 엄청 빨리 달려서 도망가던 그 키 작고, 귀엽고, 여드름 많고. 기억 안 나?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는데, 그의 입이 먼저 벌어졌다.

- 하여간 머리 나쁜 건 나라도 구제 못한다고 했는데, 언니는 어쩜 정말, 커플로 정말? 어휴, 못 살아, 내가!

중얼거림 같은 그의 마지막 말은 다행히 남편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남편은 오늘은 여기서 쉬어 가야할 것 같다, 말했다. 터미널 바깥으로 우리들을 이끄는 그의 안색은 까칠했다. 리브나 나도 며칠을 제대로 쉬지 못한 강행군에 지쳐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관에 들어서면서도 리브는 또 다시 닭갈비!’를 외쳤지만, 남편은 들은 척도 않고 여관집 주인에게 야식 몇 가지를 시켰다. 허름하게 배달된 몇 가지 음식 앞에서 리브는 생각 없이 웩웩 거렸고, 남편은 기어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리브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아무것도 집어 들지 않았다. 지난 번 생각의 갈림길에서 배운 것들을 아직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갈림길은 그렇게 우리들을 깨우치게 마련인지.

이른 아침 우리들은 홍천터미널을 나와 횡성으로, 다시 장평과 평창의 터미널로 몸을 움직였다. 터미널들은 하나 같이 내 기억이나 생각과 비껴갔고, 나는 조금씩 내 희망을 회의(懷疑)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런 곳이 있는 걸까. ‘빠쓰 정류장이라는 간판을 가지고 있는 터미널. 나는 혹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아 이렇게 떠돌고 있는 건 아닌지. 없는 것을 찾아 안타까운 시간을 허비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게 내 안에서 희망은 너덜거리며 조금씩 떨어져나가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서 노란 모자를 쓴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모여섰다. 아이들을 인솔하는 교사는 아이들 중에 하나가 차도로 발을 빠뜨리지나 않을까 경계하는 눈빛으로 아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양쪽을 살피던 다른 교사 하나가 자동차 운전자들에게 수인사로 양해를 구하더니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오른 손을 들고 일렬로 늘어서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짹짹거리는 참새소리도 들리는 듯 했고, 삐약삐약 병아리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터미널 앞 기다란 나무 의자에 앉아 뒤뚱뒤뚱 도로를 건너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데, 손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아이 중에 하나가 불쑥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이마에 눈썹은 더욱 짙고 더욱 커져서 도드라졌다. 물론 변한 것은 눈썹이 아니라 작아진 아이이겠지만.

아이는 다른 아이들처럼 오른 손을 든 채로, 입 모양만으로 내게 말했다. ‘살았다!’ 그리고 아이는 다시 앞에 선 아이에게 뒤쳐질까, 종종거리며 따라갔다. 흘끗 뒤를 돌아보는 아이의 얼굴에 호홋.’ 웃는 웃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했다. 아이의 모습이 너무도 반가워 저절로 웃음이 났다. 그리고 천천히 아이를 향해 나도 손을 들었다. 마치 나도 어딘가를 건너가고 있는 것처럼. ‘살았다!’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 뭐가 그렇게 재밌어?

남편이 지도를 살펴보며 다가왔다.

- 저기 애들.

그는 줄지어 멀어지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목을 죽 뺐다.

- 저게 왜?

- 오빠도 오른 손 좀 들어봐.

- ?

갑작스런 내 이야기에 남편은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 아이, 그냥 들어봐. 이렇게, 이렇게.

아이들을 가르치듯 나는 남편에게 오른팔을 번쩍 든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예 남편의 팔을 잡아 밀어 올렸다. 그는 미심쩍은 눈으로 구부정하게 오른팔을 올렸다.

- 살았다! 후후.

그리고 그렇게 아이의 말을 흉내 냈다. 영문을 모르겠는 그의 눈빛은 근심으로 흔들렸다.

- 왜 그래?

- 오빠, 우리 그만 돌아가자.

돌아가자는 말이 별 것도 아닌데, 괜히 목이 맸다. 헤어지자는 말이거나, 누군가 죽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도 아닌데, 눈가가 뜨거워졌다.

- 순옥아.

- 그냥, 그냥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가서 가게 집기들이랑 다 정리도 해야 하고, 박 사장님한테 보증금도 받아서 시영이네 돈도 갚고. 나 찾아 나올 때 시영이 아빠한테 돈 빌렸다면서? 그거 갚고 남은 돈으로 작은 월세 방도 하나 알아보고. 고맙네, 시영이네. 그치? 생각해보면 시영이네나 창주 네나 우리들한테는 가족인 것 같애. 언제나 힘들 때면 곁에 있어주고, 부족한 게 있으면 채워주고, 넘치는 게 있으면 나눠주고. 그치, 맞지? 가족이지?

그러나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 그리고 당신, 옛날에 같이 일했던 사람들한테 좀 알아보면 안 되나? 오빠 일할 데, 복지공단 같은 데 알아보면 무슨 해택 같은 게 있다던데, 그치?

- 됐어!

남편은 팩 돌아앉았다.

- 오빠, 그만 가자. 이거, 쓸모없는 일인 것 같아. 이건 나나 오빠한테…….

- 왜 쓸모가 없어!

버적버적 말라있던 그의 입술이 아무렇게나 흔들렸다.

- 오빠.

- 왜 쓸모가 없냐고! 너 이렇게 나왔을 때에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찾고 싶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나한테 이야기도 안 하고 이렇게 나와서 돌아다니는 거 아니냐고? 끝까지 해보지도 않고 뭐가 쓸데없어?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지,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으면 끝까지 찾아내서 만나야지, 이게 왜 쓸데없는 짓이야!

그의 손에 너덜거리는 쪽지 위에는 새빨간 줄들이 그어져 있었다. 바삐 자신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던 행인들이 그를 흘끔거렸다.

- 넌 매번 그런 식이지? 해보지도 않고, 쓸데없는 짓이네, 뭐네. 그럴 거면 아예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지. 내가 병원에서 치료 받자고 했을 때, 돈이야 어찌 되었든 그냥 치료 받으며 버티고 있었어야지! 그럴 거면 아예 처음부터 아프질 말았어야지!

비명을 질러놓고 그는 돌아섰다. 자신의 얼굴을 쓸어 내렸다. 그도 자신이 뱉은 마지막 말 한 마디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 안 돼, 난 끝까지 찾아내고 말 거야! 그게 어디에 붙어있든, 이 근처 일 거 아니야? 게다가 우린 이름을 알아. 안미옥이라는 이름만 알고 있으면, 찾을 수 있을 거야.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거야. 난 너처럼 그렇게 어영부영 그만두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견뎌. 살려면, 살려면 그래야하는 거야. 사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그렇게 대충해서 인생이 살아지는 건 줄 알아? 난 포기 안 해! 끝까지 찾아내서……. 거기, 끝까지 찾아내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내서, 찾아내서…….

그러나 그의 말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여행의 마지막. 이를 앙 물고 견뎌 끝내 마주하게 될 삶이라는 시간의 빤마지막.

- 언니!

길 건너편 횡단보도 앞에서 사진관을 찾으러 갔던 리브는 나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오른 손을 번쩍 든 채로 그는 횡단보도를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흘끔거렸지만, 그는 길을 다 건널 때까지 손을 내리지 않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에게도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었을까. 어렵고 힘들게 겨우겨우 꿈의 근처에 도착했는데 그만두고 싶을 때. 발버둥 치며 걸어온 길에서 스스로 벗어나며 주저앉아버리고 싶을 때. 그는 나를 보자 들고 있던 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아이에게 그랬듯 나도 그에게 손을 들었다. ‘호홋.’웃던 아이의 웃음을 떠올리며, ‘살았다!’라고 말하듯이 그렇게.

 

그러나 리브의 손에 들린 사진들은 하나 같이 쓸모없는 것이었다. 남편의 사진들 속에서도 쓸모없는 것들은 예뻐지기 위해 담겼지만, 리브의 사진들은 쓸모없는 것도, 쓸모 있는 것도 아닌 그냥 사진 속이었다. 쓸모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그 안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 , 이상하다? 그 카메라 사진이 이상하게 찍히네? 분명히 잘 보고 찍었단 말이야. 그 언니들 뭐야, 고장 난 거라고 나한테 준거야, 뭐야? 어유, 사람이라는 게 그렇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거지. !

그는 팔짱을 껴며 손에 들었던 사진들을 집어 던졌다. 하나같이 초점이 어긋난 뿌연 것들이 바닥에 던져졌다. 예뻐지기에 그건 너무 모호했다.

저녁식사 같은 점심을 먹고, 남편은 다시 우리들이 가야할 방향을 살폈다. 제천, 영월을 거쳐 홍천으로 다시 올라가는 여정과, 나전, 임계, 고단을 거쳐 강릉까지 가는 여정의 또 다른 갈림길에 섰다. 돌아가자는 내 이야기 같은 건 까맣게 지운 듯 했다. 지도 속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어쩐지 기괴했다. 생각이나 여유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오던 내 삶도 그랬을까. 괜히 부끄럽고, 미안하고 그랬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어둑발이 드리우고 있었지만, 남편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조금 더 움직이자고 말했다. 고단쯤에서 또 하루 쉬어가자고 말하는 그는 나와 리브의 대답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매표창구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고단으로 가는 막차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리브는 멀미, 멀미!’하고 외쳐대며 화장실로 뛰어 갔고, 표를 든 채 나와 남편은 리브를 기다렸다.

언제나 그렇지만 기다림은 길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남편이 화장실로 다가가는 순간, 눈이 부신 연보라 빛 원피스로 갈아입은 리브가 나타났다. 하얗게 질려 창백해진 얼굴로 나타날 줄 알았는데, 그의 얼굴은 화장을 새로 한 건지, 발그레 붉어져 있었다.

- ! 어때? 밤에 어울리는 드레스지?

그러나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던 남편은 손에 들었던 표를 꽉 움켜쥐며 리브에게 다가갔다. 심상치 않은 남편의 눈빛을 눈치 챘는지, 리브는 버스가 막 출발하는 승강장으로 뛰었다.

- 고단, 고단가는 버스! 버스 출발한다, 빨리, 빨리!

그는 그렇게 외쳐놓고 도망치듯 먼저 승강장으로 달려가 버스에 올랐다. 나는 애써 남편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버스 쪽으로 이끌었다. 조금 위태로워 보이기는 했지만 남편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괜찮아 보였고, 나도 조금 피곤했지만 견딜 만 했다. 우리들은 매달리듯 막 터미널을 나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짐짓 미안했는지, 리브는 버스 안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배시시 웃었다.

 

산속의 밤은 쉽게 왔다. 버스가 좁은 산길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잠에 빠졌다.

- 고한 내리세요!

운전사의 고함소리를 듣고 부스스 눈을 떴다. 번쩍 눈을 뜬 남편은 들고 있던 표를 살폈다. 그리고 터미널에 들어선 버스 창밖을 둘러보았다. 황급히 운전사에게 뛰어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남편은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그러나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코를 곯며 자고 있는 리브의 의자를 냅다 걷어찼다.

- 음음, ? 내려, 내려? 지금 내리까? 아함!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으며 리브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지만, 남편은 분을 삭이느라 여러 번 숨을 들이쉬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고단이 아니라 고한이었다. 우리는 가야할 곳의 반대편 버스를 잘못 탄 셈이었다. 이미 밤은 깊었고, 정선까지 다시 나가는 버스도 끊긴 채였다.

리브는 쫓기듯 버스 밖으로 밀려나와 앞 유리에 달린 표지판을 자꾸 들여다봤다. 눈을 씻고 또 씻고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고단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해놓고, 운전사에게 어깃장을 놓기 시작했다. 언제 표지판을 바꾸어놓았느냐 씩씩거렸을 때, 나는 리브의 팔꿈치를 끌었다. ‘그럼 택시라도 타고 돌아가자!’ 라고 그는 호기롭게 소리쳤지만, 그건 남편의 화를 돋우는 일일 뿐이었다. 정선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고단가는 막차는 이미 끊겼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꼼짝없이 고한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모텔 주인을 만나고 오겠다고 나갔던 남편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곳 같으면 그냥 좀 헤매고 있겠거니 하겠지만, 터미널에서 만난 기괴한 사람들 때문에 좀 걱정이 되었다.

고한, 사북이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진 터미널 대합실에 들어섰을 때 기분이 좀 묘했다. 어디선가 한꺼번에 몰려나온 것 같은, 비슷한 또래의 중년 남자들은 일행도 없이 모두 혼자였다. 가면을 쓴 것처럼 모두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서성거리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등골이 오싹했다.

리브는 샤워를 하고 나오더니, 이미 잠이 쏟아지는 모양이었다. 가면 같은 팩을 얼굴에 붙여놓고 벽에 기대 꾸벅꾸벅 졸았다. 혼자서 밖에 나가는 일은 탐탁지 않았지만, 저런 꼴을 하고 있는 리브와 같이 나가는 것은 더욱 난감한 일이었다. 결국 나는 혼자서 조심스레 모텔 방문을 밀고 나섰다. 복도 끝에서 또 다시 웅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슬리퍼를 끌고 직직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자꾸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모텔의 허름한 주차장 입구에 내려왔을 때, 벽에 기대 주저앉은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반갑기도 하고, 안심이 되어 황급히 다가갔다.

- 오빠? 오빠야?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니 그 옆에 놓인 소주병 두어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는 찌르는 듯한 알코올 냄새와 엉겨 나를 덮쳤다.

- 도아…… .

꺾인 그의 목덜미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 아시 차어 여이 어.

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말은 토사물처럼 길게 늘어졌다. 나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괜히 곤란한 일에 빠져들지도 모를 일이다.

- 니기, 히히히! 할 쑤 이아, 할 쑤 이아! 히히히, 씨바, 이생 하버. 한버 히히히! 조시나구애! 히히히.

남자는 손에 들었던 종이 잔을 들이켰다. 그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내가 모르는 언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건 어쩐지 리브가 나에게 들려준 그 노래와 닮았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던 그 노래, 그래서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 노래.

- 뭐 해?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남편의 그림자는 거대하게 나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의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겨우 술에 취한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넋두리를 들은 것뿐인데, 온몸이 무섭도록 떨렸다. 어쩌면 그저 모르는 노래 한 곡을 들었던 것뿐인데, 무언가에 떠밀리기라도 한 것처럼 내 몸은 잔뜩 쪼그라들었다.

 

- 어머, 나도 포커 좋아하는데? 훌라도 좋고, 원 카드도 재밌지만, 뭐니 뭐니 해도 포커가 최고지! 스트레이트 플러쉬! 만 원짜리도 한 두 장 오고가야 이게이게 또 그 재미지, 이게! 호호홋!

남편이 이곳에 대해 말했을 때, 리브는 화투를 두드리듯 패를 땅에 두드리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것처럼 자신의 지갑을 뒤적거렸다.

- 언니, 언니, 우리도 나가서 한바탕 해볼까? 누가 아니? 죽기 전에 대박이라도 터뜨려줄지? 그러니까 우리 한번만 땡겨 보자. 나도 그거 정식으로 해보지는 않았거든. 그러니까 그냥 관광 삼아, ? 돈은 내가 빌려줄까? 대신 도박판 이자는 사채 이자라는 거 알고 있지? 갈까?

지갑을 든 리브의 눈은 연신 반짝거렸다. 죽는 다는, 생각 없는 그의 이야기에 소리를 지를 만도 한데, 남편은 그저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기괴한 분위기의 이곳 때문인지, 주차장의 그 남자에게 풍겨오는 냄새 때문인지, 내 몸은 자꾸 떨렸다. 알아들을 수 없었던 그의 언어가 자꾸 떠올랐다. 의미 없는 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자꾸 생각나 마음을 할퀴었다. 나는 남편의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남편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편에게서 자꾸 알코올 냄새가 났다. 그건 아까 그에게 나던 냄새와 똑 닮았다. 무언가 썩어 들어가는 듯 시큼하고 기괴한 그 냄새.

 

- 눈이다!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부스스 눈을 떴다. 그러나 나는 방금 내가 들은 이야기를 믿지 못했다. 잠을 잤는지, 앓았는지, 지난밤의 시간들은 그저 길기만 했는데 갑자기 들려온 리브의 말은 백일몽의 끄트머리 같았다. 벌써 다음 주면 오월인데, 눈이라니.

- 언니, 빨리, 빨리 일어나 봐! 눈이야, !

리브는 무작정 나를 일으켰다.

- 형부, 눈이에요, !

리브는 형부라는 말에 불같이 화를 냈던 그를 잊고 있는지, 남편을 마구 흔들어 깨웠다. 물론 그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돌아누웠다. 그런데도 리브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휘청거리는 나를 창문턱에 세웠다. 갑자기 환해진 바깥 풍경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씩 선명해지는 내 눈 앞에 새하얀 풍경이 펼쳐졌다.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었던 높은 산들과, 유령 같은 사람들이 거닐던 거리와, 엉뚱한 곳에 우리를 내려주던 터미널의 버스들이 새하얀 눈에 뒤덮여 있었다. 다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리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기 이 시간을 믿어?’라고 말하는 그를 기다렸는데, 그는 창턱에 내려앉은 눈송이들을 내 얼굴에 뿌렸다. 시리도록 차가운 것이 얼굴에 닿았다가 녹아 내렸다. 손 위에 투명하게 녹은 물을 받혀 보았다. 눈이었다. 분명 그건 차갑고 시린 눈. 나는 그제야 다시 눈을 똑바로 뜨고 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새하얗게 뒤덮인 그곳은 천국처럼 아름다웠다.

 

리브는 거리에 나와서도 연신 폴짝거리며 도로를 뛰었다. 어제 입었던 연보라 빛 원피스는 성급하게 피어난 눈 속의 꽃 한 송이 같았다. 다 드러난 발목까지 푹푹 눈이 빠지는데도 그는 눈을 뭉치며, 뭉친 눈을 던지며 신이 났다.

다행히 대합실에는 어제의 기괴한 사람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골의 터미널답지 않게 신기하도록 깨끗한 터미널은 햇살을 받아 눈과 함께 반짝였다. 아직 버스가 오가지 않은 넓은 승강장은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리브는 그 위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남편은 그러거나 말거나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오늘 가야할 터미널들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리브는 눈 범벅이 되어 대합실로 뛰어 들었다.

- 눈싸움, 눈싸움!

리브는 헉헉거리며 소리쳤다.

- 됐어.

- 아이, 언니. 그럼 눈사람, 눈사람!

됐다고 손사래를 치는데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밖으로 끌려나와 흰 눈 위에 섰다. 봄의 한 가운데서 밟아보는 느낌이라 그럴까, 그건 차갑다는 느낌보다 오히려 보드라웠다. 넓은 공터를 뛰어다니는 리브를 바라보다가 나는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내 발 밑에 깔린 눈을 살며시 모아보았다. 소르르 손 위에 올라오는 눈송이들. 뽀득뽀득 엉기는 차가운 느낌.

- !

나도 모르게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내 인생에 한 번도 내리지 않은 눈을 보듯 눈가가 뜨거워졌다. 앞으로는 보기 힘든 눈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눈()의 인사.

순간 퍽, 눈송이가 어깨를 쳤다.

- 메롱!

그는 저만치서 혀를 날름 내밀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손에 들었던 눈을 뭉쳤다. 리브를 따라가며 던지기 시작했다.

- , 직구! 속사포를 받아랏! ! 히히히!

리브도 내게 눈을 마구 던졌다. 나도 지지 않고 피하며 던지며 눈 위를 마구 뛰었다. 가슴이 터질 듯 했다. 가슴 속 어딘가 고였던 것들이 마구 쏟아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눈앞이 자꾸 흐려졌다. 미친 듯 내 안에서 무언가 요동쳤다. 그런데도 나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앉았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손 안에는 눈을 뭉쳤다. 뭉쳐서 던졌다. 리브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뭉친 눈들은 허공 위에서 흩어지기도 했고, 내 머리 위에 다시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런 기분이라면 지금 당장에 숨이 끊어지더라도 괜찮을 듯 했다. 이런 즐거움이라면, 한 번도 깨닫지 못한 이런 경쾌함이라면.

 

!

 

또 다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던진 눈덩이에 맞았나? 내 몸은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내 몸 어디에도 들러붙은 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내 눈덩이는 내 손에 들린 채였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져 내린 건지.

하늘을 올려 보았다. 하얀 눈송이들이 나풀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흰 눈 위에, 커다란 꽃송이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핑크와 보라가 엉켜 눈 속에 핀 봄꽃의 무더기. 눈 위에 커다랗게 너부러진 그것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물론 꽃이라면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고귀한 모양새로 움직이지 않는 일은 당연하겠지만, 처음부터 그는 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저 꽃이 되고 싶어 했을 뿐.

- 리브야?

나는 그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꽃의 이름을 불러 주었고, 이른 봄 날, 그는 나에게로 와, 한 무더기 꽃이 되었다.

<20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