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커튼 콜
이른 아침 여인숙 입구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어제 주인이 이야기했던 사진 모임 사람들인지, 여인숙 간판을 배경으로 줄지어 늘어서는 그들의 어깨에는 카메라가 하나씩 걸려 있었다. 다행히 그들의 얼굴에는 관광을 온 사람들의 찌든 피곤함이나, 밤을 새운 퀭한 눈빛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물끄러미 그들의 정렬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편에게서 짙은 술 냄새가 풍겼다. 나와 리브가 밖에 나온 사이 혼자서 술을 마셨던 건지, 오늘 아침 부스스 깨어난 그의 발밑에는 소주 병 두 개가 음란한 모습으로 나란히 뒹굴었다.
- 어머, 사진 찍는 사람들이네? 나,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데. 호홋.
아침에 공들여 한 화장을 확인하던 리브는 카메라를 맨 남자들을 보자 당장 달려들 기세였다. 용문터미널에서 그랬던 것처럼 괜히 봉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데, 그는 이미 그들에게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 어머, 사진 찍는 분들인가 봐요? 호호호. 그럼 저희도 한 장 찍어주면 안돼요? 나중에 사진 값은 드릴게. 호호호.
몸을 베베 꼬며 다가가는 그의 목소리는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의 눈빛은 일그러지거나 비틀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되었던, 얼굴을 가린 수군거림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 어, 빌링햄 하틀리, 그쵸?
사람들의 줄을 세우던 남자가, 다가섰던 리브 대신 입구에 서 있는 남편의 가방을 가리켰다. 그러나 남편은 슬그머니 가방을 등 뒤로 감추었다. 빈 가방이 부끄러웠던 건지, 어쩌면 그건 처음부터 가짜였던 건지.
- 사진 찍는 분이신가보네요? 저, 저희들 단체 사진 찍으려고 하는데, 저희들도 좀 찍어주시겠어요? 그럼 나중에 저희도 찍어 드릴게요. 이게 수동 카메라라 좀 작동하기가 어렵기는 한데…….
모임의 회장이나 운영자쯤으로 보이는, 머리 숯이 적은 남자는 사람 좋은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남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내밀었다. 당연히 한번쯤은 사양하거나 손사래를 칠만도 한데, 남편은 선뜻 카메라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아리아, 그죠? 콘탁스 아리아.
그러나 그의 말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마술을 부르는 주문 같기도 했고, 지난 밤 리브가 불렀던 노래를 가리키는 말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내가 알지 못하는 자신들만의 아리아를 가지고 있었던 건지.
- 어, 아시네요?
남자의 얼굴은 환해졌다. 뒤에 늘어섰던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반가운 눈빛으로 탄성을 질렀다. 놀라웠던 것은 카메라를 들고 겸연쩍게 웃는 남편의 얼굴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활처럼 휘어지는 그의 눈웃음은 참으로 예뻤다.
- 그럼, 뭐 안 가르쳐 드려도 아시겠네, 그쵸? 저희 카메라 모임에서 이런 엠티는 처음 온 거라서. 형님, 멋지게 잘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자연스럽게 남편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남편은 손에 든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는 눈치였다. ‘형님’이라는 말 때문인지, 그들만 알고 있는 ‘아리아’ 때문인지, 남편은 또 다시 마술처럼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 그의 미소는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이전보다 더욱 컸다. 그리고 그들이 늘어섰던 햇볕이 잘 드는 벽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손에 든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느라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신기하게도 흔들리지 않고 반듯했다.
사람들은 햇살아래 나란히 섰다. 여자들은 섰고, 남자들은 앉았다. 그런데 서 있는 여자들 중에 남자도 눈에 들어왔다. 키가 작은 사람은 섰고, 큰 사람은 앉았던 건가? 그러고 보니, 가장 키가 작아 보이는 사람이 키 큰 사람 옆에 앉아 있고.
모르겠다, 어떻게 앉고 어떻게 섰던 건지. 어쨌든 그들은 환하게 웃으며 햇살 아래 함께 섰다. 모두들 똑같이 남편의 손에 든 ‘아리아’를 바라보면서. 가장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아리아’를 바라보면서.
- 잠깐만요.
남편은 익숙하게 카메라의 렌즈 부분을 돌려 조작했다.
- 됐어요, 자, 찍습니다.
뭐가 됐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그들에게 신호했고, 그들은 남편이 하는 신호를 잘 이해했다.
- 하나 둘 셋!
찰칵, 남편은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카메라 뒤에서 그의 미소는 이제 아예 폭소처럼 커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크기의 미소는 단번에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너무 반가운 것이어서 그건 오히려 낯설었다.
인상이 좋은 남자는 카메라를 받아들며, 나와 남편과 리브에게도 벽에 나란히 서라고 말했다. 당장에 집어치우라고 소리라도 지를 것 같은데, 다행히 남편은 내 곁에 바짝 다가서는 리브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자, 됐어요, 찍습니다!
이번에는 그 남자가 남편의 말을 중얼거렸다. 이전에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사이였는데, 남편의 언어를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이 나는 신기했다.
남자는 그렇게 나와 남편을 찍었고, 리브와 나를 찍었고, 리브를 찍었고, 남편을 찍었고, 그리고 다시 나를 찍었다. 필름이 한 컷 남았다고 남자가 리브와 남편을 나란히 세웠을 때, 나는 외줄을 타고 있는 듯 아슬아슬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남편은 소리를 지르거나 그의 팔을 뿌리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모르겠다. 두 사람 모두 어떻게 그렇게 웃었고, 어떻게 나란히 설 수 있었는지. 그들이 보여준 아리아가 무엇이었기에, 절대 나란히 설 수 없을 듯 했던 두 사람을 저렇게 나란히 세웠는지.
어쨌든 그 곳에 있던,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하는 우리들 모두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제일 예뻐졌다. 남편의 말대로, 작은 사진 한 장 속에서 우리들 모두는 자신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예뻐졌다.
간밤에 마신 술 때문에 피곤했던지 남편은 버스에 오르자 그대로 잠에 빠져 들었다. 전날의 일들 때문에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미안함인지, 그는 내 곁도 마다하고 앞자리에 혼자 앉았다. 리브는 그들에게서 선물 받은 카메라를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과자 한 봉지처럼 생긴 그것을 들여다보며 그의 얼굴 위에 미소는 지워질 줄 몰랐다. 평일의 장거리 버스 안은 도서관같이 고요했다. 책상 위에 엎어진 수험생들처럼 승객들 모두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아이가 나타난 것은 그렇게 고요한 순간이었다.
- 짠! 살았다!
아이는 의자 밑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 놀랐죠? 그쵸? 히힛.
놀랐던 건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흔적이 지워진 공간이 두려웠다.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그건 어떤 경계 위의 공간 같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어떤 시간을 기다리는 그들을 위한.
- 아니, 안 놀랐는데?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하지만, 일그러졌을 것이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란 감추기 쉽지 않은 법. 어떤 표정도 그 위에서 볼썽사납게 찌그러졌을 것이다.
- 에이, 거짓말. 아줌마 놀랬잖아요? 난 보인다고요. 아줌마 심장이 막 쿵쾅쿵쾅 뛰고 있는 걸요? 난 다 보여요.
아이가 눈을 부릅뜨고 내 가슴께를 가리켰다. 다 보고 있는 그 속은 어떤 엉망진창일까, 괜히 나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 아냐, 두렵지 않아. 난, 다 알고 있었는 걸? 네가 어디서든 나타날 걸 예상하고 있었는 걸 뭐.
- 피, 거짓말.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실은 모르고 있는 거잖아요. 알고 있다고 하면서 모르고, 모르고 있다고 말하면서 실은 다 아는 척, 그게 인간들이잖아요? 바보 인간.
아이의 눈빛이 서늘했다. 분명 예닐곱 살 된 아이의 모습인데, 말투며 눈빛이며 정말 모든 걸 꿰뚫고 있는 듯 했다.
- 아니야! 아냐, 정말이야. 난, 난 준비 됐어. 이렇게 고마운 남편의 마음도 알게 되었고, 이제 산다는 게, 살아가는 지금 순간이 고맙고 소중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내가 얼마나 어리석게 살았는지, 살아있는 동안 내 삶이 얼마나, 얼마나…….
숨이 턱턱 막혔다. 분명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버스는 동해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고 있었다. 조용히 문이 열렸고 운전사가 일어섰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드리운 듯 그는 내 쪽을 흘끗 보고는 버스 밖으로 내려섰다. 승객은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버스에 들어선 승객도 없었다. 침묵보다 무서운 기다림이 이어졌다. 아이도 어쩐지 입을 다물고 조용했다. 분명히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자꾸 목이 탔다.
- 그래, 두려워. 아니, 무서워. 정말, 정말 매 순간순간마다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끔찍하고, 그래.
버스가 터미널을 나와 벼랑 위를 달릴 때였다. 끝도 없이 펼쳐진 시퍼런 바닷물. 좁은 도로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바다로 뛰어드는 것 같은,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착시(錯視). 게다가 가파른 절벽에 부딪힌 바닷바람은 커다란 버스를 흔들흔들 떠밀고 있었다.
- 그래, 무서워. 왜, 무서우면 안 되는 거니? 두려우면 안 되는 거야? 이제 내가 세상에 없는데. 내 말이, 내 목소리가 세상에 없는데, 이제 어느 어둠 속을 걷게 될지도 모르는데. 살아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이거나,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없는 곤한 잠 같은, 그런 영원한 시간 속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는데……. 두렵지 않은 게 정상이겠니? 두렵고 끔찍하고 무서운 게 정상이지, 두렵지 않은 게 정상이겠니?
어느새 내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 그래, 나, 몰라. 내가 뭘 알 수 있겠니? 나도 인간이야, 나도 사람이야. 니가 말 한 것처럼 나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근데, 근데 내가 뭘 알 수 있겠어? 준비? 허, 이게 준비로 되는 일이니? 준비한다는 건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대비해서 조심하고 막는다는 이야기인데, 이게 준비한다고 막아지는 일이니? 준비하면 그 시간이 오지 않는 거야? 뭘 준비하면 막을 수 있니? 뭘 어떻게 준비하면 이 끔찍한 두려움을 털어버릴 수 있는 거냐고!
어느새 나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이는 아이답지 않은 눈빛으로 물끄러미 나를 봤다. 다 알고 있듯이, 모든 걸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 맞지? 너… 너 날 데리러 온 거지? 내가 죽는다는 걸, 죽게 된다는 걸 알려주려고 온 거지? 그렇지?
내가 그린 눈썹이 씰룩이며 움직였다. 모르겠다는 듯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말해봐, 말해보라고! 맞지, 그렇지!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 곳에는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방이 물속처럼 고요했다.
- 미안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아이의 목덜미를 잡고 마구 흔들고 있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울부짖고 있었는데, 소리가 지워진 공간 속에서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숨이 넘어가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거기에 없었다.
- 난 그냥, 나도 모르게……. 좀 억울했어. 내가 왜,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있어야하는지. 다른 사람들 많잖아? 짧았더라도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들 많잖니? 사랑받는 아이로 태어나서 따스한 부모 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갖가지 추억이며 좋은 기억이며 다 만들고, 그래서 그렇게 가볍게 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 많잖니? 그도 아니면, 하다못해 예쁘고 멋지게 태어나서 내내 주변 사람들한테 사랑받으며 부러워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다가, 정말 목숨이 끊어져도 괜찮을 그런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사랑 받던 사람들도 많잖니? 근데, 왜 나여야 하는 거니? 내가,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거니? 정말 보잘 것 없는 나 같은 사람한테,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니?
내 빈 손은 허공을 쥐어뜯고 있었다.
- 아닐 거야. 뭔가 잘 못 됐어. 너, 네가 한번 이야기해 봐. 저 위에, 저 위에 너를 보낸 사람이 있다면 네가 한 번 가서 말해 줄래? 그 여자, 데리러 갔더니 정말 사십 년도 안 되는 시간을 형편없이 살았더라, 최소한 죽어서 기억하고 추억할만한 순간을 남길 시간은 주어야하지 않겠느냐, 그게 신의 섭리고 신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그렇게… 그렇게 내 대신 좀 따져주면 안 되겠니?
아이를 향해 잔뜩 허리를 구부렸다. 팔뚝 같은 아이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 제발, 제발 살게 해줘. 그러면 무슨 일이든, 무슨 일이든 다 할게. 나보다 더 힘들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돕고, 후회하고 한탄하며 소중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즐기며 웃으면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지만, 감사하게 여기고 즐기면서 그렇게 살게. 제발, 제발 십 년만. 아니, 오 년만. 흑흑, 제발, 제발! 흑흑흑.
자꾸 눈물이 흘렀다. 마구 울부짖었다. 그러나 여기는 소리가 지워진 공간.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버스는 커다란 아치 밑을 지나 천천히 주문진시외버스터미널로 들어서고 있었다.
- 언니, 뭐해?
장난감 같은 카메라를 들고 리브가 다가왔다.
- 꿈꿨어?
- 응?
온 얼굴에 범벅인 눈물을 닦아내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또 다시 아이는 죽고 없었다.
- 근데 무슨 잠꼬대를 그렇게 해? 혼자서 막 뭐라고, 뭐라고 그러던데? 막 화도 내고 누구한테 빌기도 하고. 여자가 무슨 잠꼬대가 그렇게 심하니? 그나마 사람들이 없어서 다행이지, 아유, 나까지 쪽팔릴 뻔 했다니깐? 호홋.
화끈거리는 얼굴 표정을 하고 그는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 혼자서? 잠꼬대?
- 사진 찍어 줄까? 언니 지금 꼴이 가관이 아닌데. 나중에 사진 찍어보면 너무 재미나겠다, 히힛.
고개를 끄덕일 새도 없이 리브는 나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찰칵, 장난감이 부서지는 것 같은 셔터 소리가 들렸고, 나는 셔터가 끊어지고 나서야 배시시 웃고 있었다. 다행이다. 이제 나는 또 다시 그만큼 예뻐질 것이다. 누구든 사진 속에서 예뻐진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18화에서 계속>
'+이정도면호상 > [ 빠쓰정류장 ] 장편 연재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長篇小說 '빠쓰 정류장' - <제19화> 꽃의 이름을 불러 주었고 (0) | 2012.12.15 |
---|---|
長篇小說 '빠쓰 정류장' - <제18화> 소멸의 시간 (1) | 2012.11.16 |
長篇小說 '빠쓰 정류장' - <제16화> 아리아 (0) | 2012.10.16 |
長篇小說 '빠쓰 정류장' - <제15화> 마음을 움직이는 말들 (0) | 2012.10.06 |
長篇小說 '빠쓰 정류장' - <제14화> 빨간 웃음 (0) | 2012.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