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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면호상/[ 빠쓰정류장 ] 장편 연재 소설

長篇小說 '빠쓰 정류장' - <제16화> 아리아

 

 

 

 

 

 

 

 

 

 

 

15.

아리아

 

 

 

 

태백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남편의 어깨에 기대 쏟아지는 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땀 냄새가 나는 그의 어깨는 버스가 출렁일 때마다 흔들렸지만, 새물내가 나는 폭신한 이불 위에라도 누운 것처럼 나는 곤히 잤다. 여전히 속이 매스꺼운지 휴지를 한 움큼 붙들고 있던 리브가 바다다!’ 외쳤을 때, 부스스 눈을 뜨기는 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어느새 내게 어깨를 빌려주었던 남편이 곤한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백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버스에 내려섰을 때, 주변의 산들은 꿈속처럼 훨씬 높아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의 깊게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검게 그을린 자국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초록 잎이 나지 않은 산등성이가 여윈 가지들로 듬성듬성 했지만, 검은 산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틀린 글자들을 이고 돌아가는 입간판도 없었고.

남색 점퍼를 입은 사람들 몇이, 겨우 내 대합실을 달구었을 연탄난로를 떼고 있었다. 연통을 내었던 구멍을 널빤지로 가리고, 대합실 바닥에 엉겨 있던 열기의 때를 지워내느라 열심히 비질을 했다. 어떻게든 흔적을 지우려는 그들의 손짓이 어쩐지 야박하게 느껴졌다.

- 아유, 정말 내 이 촌구석 버스 냄새 때문에 못 살겠다니깐. 아유, 아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리브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오늘따라 아침부터 내내 그의 멀미는 심해지는 모양이었다.

- 진즉에 자동차를 하나 렌트해서 다니는 건데 그랬어, 그치? 언니도 그렇고, 형부도 그렇고 버스 타고 이렇게 다니는 일 불편하잖아? 아니, 버스 정류장을 찾는다고 버스만 타고 다니라는 법이 어딨어? 그치, 언니?

그의 얼굴은 용두시외버스터미널의 한밭슈퍼 앞에서 소리를 질렀던 때와 꼭 닮았다.

- 지금이라도 우리 자동차 한 대 렌트할까? 그럼 형부도 편안하잖아? 언니도 힘들고, 형부도 움직이기 쉽지 않고. 형부 운전면허 있지?

화장이 뭉개진 리브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 없어?

그는 남편이 다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듯 했다.

- 그러는 너는 없니?

- ? 난 딸려고 했는데, 못 땄잖아? 내가 운전을 못해서 못 딴 거면 말을 안 해.

리브는 손거울을 들여다보다가 팔짱을 꼈다.

- , 글쎄 운전면허 접수하는데, 사진을 다시 찍어오라는 거야? 왜 주민등록증에 사진 이상하게 나오면, 지갑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볼 때마다 스트레스 받지, 그치? 언니도 그렇지? 그래서 내가 샵에 가서 머리도 하고, 정성들여 메이크업 하는 선생님한테 웃돈도 주고 메이크업도 받았다고. 맨 처음에 찍은 사진이 마음에 안 들어서 웃돈까지 더 주고 몇 번씩이나 사진을 다시 찍었던 말이야. 나중에 주민등록증도 다시 만들고, 여권도 다시 만들고 그럴 때 쓰려고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 찍었는데. 그래서 겨우 마음에 드는 사진 만들어가지고 갔는데, 글쎄 화장을 싹 지우고 다시 오라는 거야? 호적 못 바꾼 것도 서러운데, 아니, 내가 운전시험 보러 왔지, 무슨 얼굴 시험 보러 왔냐고? 화장을 하든 말든 자기들이 무슨 상관이야? 자기들은 운전하는 거나 칠십 점, 팔십 점 따지면 됐지, 왜 남의 얼굴을 가지고 칠십 점 팔십 점 따져서 되느니, 안되느니, 주접을 떠느냔 말이야, 글쎄?

내쳐지던 그 때가 떠오르는지, 이제는 아예 싸움이라도 하려는 듯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였다.

- 아니, 정말 운전을 손으로 하지, 얼굴로 해? 내 치사하고 더러워서, . 형부, 형부, 그죠? 정말 웃기죠? 아니, 화장을 하든 말든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화장을 지우고 찍었다가 나중에 운전면허증이 나와 얼굴 다르다고 그거 내밀 때마다 봉변당할 건 생각 안 해? 아니, 왜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냔 말이야?

리브는 남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남편을 쫓으며 투덜거렸지만, 남편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리브처럼 멀미가 나는 건지, 그의 안색도 창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서두르자. 일단 먼저 바닷가 따라서 죽 올라가며 조금 큰 터미널들을 한꺼번에 훑어보기로 하고. 강원도에 있는 터미널들은 많지 않으니까 일주일이면 될 거야, 괜찮겠어?

되도록 힘겨워 보이지 않도록 커다란 웃음을 얼굴 위에 그렸다. 표를 끊으러 창구로 향하는 남편의 뒤를 리브는 졸졸 따라갔다. 연통을 들고 나서던 사람들이 수다스럽게 떠드는 리브를 흘끔거렸다. 저 정도면 남편의 호통이 이어질 법도 한데 그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창구 안으로 돈을 들이밀었다. 물론 리브의 투덜거림은 그 때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계획은 보기 좋게 틀어졌다. 고성까지 올라가는 버스를 타고 삼척, 동해, 강릉, 양양까지 모든 터미널들을 한꺼번에 돌아보자 하는 남편의 생각은 멀미를 견디지 못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리브 때문에 빗나가 버렸다. 태백에서 버스를 탄지 겨우 삼십분도 지나지 않아 리브는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7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는 긴 여정의 첫 번째 터미널인 도계에서 내려서고 말았다. 남편은 한숨을 푹푹 쉬며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았지만, 이대로 여행을 하기는 무리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경기도에서 전라도로, 그리고 경상도로, 다시 강원도로 올라가며 거의 전국을 한 바퀴 돌고 있는 셈이었다.

결국 우리는 도계에서 하루 머물다가 가기로 했다. 남편의 눈빛에는 나를 향한 원망이 가득했지만, 방법은 없었다. 터미널을 나오며 휘청거리던 리브는 간신히 내 어깨에 기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기대고, 나는 남편에게 기대며 터미널에서 도계읍 내로 들어가는 길을 우리는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 언니, 언니, 쟤네들 좀 봐! 너무 웃기지 않아?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휘청거리며 간신히 들어선 여인숙에 남은 방이 겨우 하나뿐이었다. 도계의 영화촬영지와 신리에 너와마을을 보러 온 사진 모임 사람들이 한꺼번에 방을 잡는 바람에, 더 이상 방이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마을을 조금 더 들어가면 다른 숙박시설이 있기는 하겠지만, 대부분 달셋방을 쓰는 광부들의 차지라고 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 명 이상, 남자와 여자가 혼숙을 하는 일은 큰일 나는 일이지만, 몸이 불편하신 양반도 있으니 눈 감아 주겠다, 알량한 인심을 쓰는 주인을 남편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 호호, 저 남자 키 작은 거 봐, 남자가 어떻게 저렇게 키가 작아? 자기 딴에는 콤플렉스 좀 극복해 보겠다고 몸이라도 열심히 만든 모양인데, 저렇게 작은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냐고?

리브는 하이힐을 벗고 작은 방 구석에 엉덩이를 깔고 앉자마자, 금새 기운을 되찾았다. 여느 멀미가 그러하듯 한 삼십 여 분 뜨거운 방구들을 깔고 앉아 TV를 보더니 그는 이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간밤에 잠을 설친 나는 자꾸 졸음이 쏟아지는데, 리브는 계속 낄낄거리며 내 옆구리를 찔렀다.

- 언니, 언니, 저 남자 봐봐, 저 남자! 몸만 좋으면 뭐하냐고, 저게? 내 앉은 키보다 더 작을 것 같네. 애자도 아니고, 저게 뭐야? 앉은뱅이, 앉은뱅이. 호홋! 돈이나 엄청 벌어놨다면 모를까, 저 남자 장가가기는 힘들겠네, 호홋!

깔깔거리는 리브의 웃음소리는 작은 방 안을 꽝꽝 울렸다. 방 한 가운데 펼쳐진 이부자리에 벌러덩 누워 TV에 시선을 둔 채였다. 생각 없는 그의 앉은뱅이 이야기에 나는 잠이 싹 달아날 지경인데도, 그는 이제 아예 다리를 꼬고 앉아 두 팔에 의지해 겨우 몸을 움직이는 흉내까지 내고 있었다.

- 이렇게, 이렇게. 똑같지? 똑같지, 그치? 앉은뱅이, 앉은뱅이, 그치, 그치?

하필이면 그건 의족을 차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남편의 몸짓과 꼭 닮아있었다.

- 언니, 언니, 우리 와인 한 잔 할까? 이렇게 셋이 앉아 있으니까 무슨 엠티 온 거 같다, 그치? 그러니까 우리 우아하게 와인 한 잔, 어때?

리브는 내 가방에서 아무렇게나 지갑을 꺼내 뒤적였다.

- 형부, 어때요? 괜찮죠? 이 동네도 와인은 있겠지? 없으면 그냥 소주 마셔? , 난 소주는 독해서 잘 못 먹는데. 양주라면 모를까. 난 이상하게 소주보다 양주가 더 부드럽게 넘어가더라. 난 역시 양주 체질…….

깜빡 눈을 감은 사이, 남편은 어느새 리브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더욱 심하게 기울어진 그의 어깨는 흉기처럼 리브의 뒷모습을 뒤덮었다. 그의 손에는 리브가 뒤적였던 내 지갑이 들려 있었다.

- , 뭐야?

그의 목소리는 무언가에 잔뜩 짓눌려 있었다.

- 어머, 형부, 왜요? 난 그냥 오랜만에 술 한 잔 하자고. 형부랑 언니랑 다 같이 이렇게 같이 한 방에서 밤을 보내는 게 처음이니까, 그러니까…….

- 누가 너하고 같이 이러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지갑을 든 남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 어머, 우리 형부 무섭다. 그러지 마요, 형부. 형부가 그러니까…….

- , !

말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남편은 또박또박 그렇게 두 자를 끊어 말했다.

-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 오빠, 하지 마.

더 이상 내버려두었다가는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설 것이 빤했다.

- 너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그건 여자가, , , ! 자기 언니와 결혼을 한 사람에게 하는 말이야, 알아?

여자라고 말하는 남편의 목소리는 다시 도드라졌다.

- 오빠, 그만, 그만해.

있는 힘을 다해 리브의 등 뒤에서 그를 뜯어냈다. 그러나 쏟아진 그의 말은 벽 앞에 서서도 계속 되었다.

- 여자 옷 입었다고 다 여자냐?

- 오빠!

있는 힘을 다 해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 세상이 좋아진 덕분에 몸뚱이를 그 따위로 만들어놓으면 다 여자냐고!

- 그만, 안 돼! 오빠, 안 돼!

필사적으로 그를 벽 쪽으로 돌려 세웠다. 그러나 처음부터 말을 막을 수 있는 벽은 없었다.

- 그럼 나도 돈 들여 가슴 만들고 수술하면 여자 되는 거냐? 니기미, 좋겠다! 너희들은 그 따위 짓거리 할 돈이 있어서. 에이, 씨발!

그건 남편에게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거친 일들을 하다 보니 그의 동료들에게서 종종 듣기는 했지만, 남편의 언어는 분명 그들과 다른 것이었다. 그건 남편에게는 없는 말이라고 믿었다.

- 앉은뱅이? 어후, 이 씨발! 앉은뱅이라고, 이 씨발 새꺄!

남편은 손에 들고 있던 지갑을 리브의 등에 팽개쳤다.

- 오빠, 안 돼! 이러지 마, 이러면 안 돼!

- , 이 씨발!

남편의 얼굴은 이미 뜨거운 눈물범벅이었다. 그를 밀어낼 때마다 남편의 몸은 심하게 기울어졌다. 리브는 등을 돌린 채, 물끄러미 TV 화면을 응시했다. 내게 이끌려 문 밖으로 밀려 나가면서도 남편은 계속해서 다른 세상의 언어를 중얼거렸다. 뜨거운 숨을 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리브는 슬그머니 팔을 들어 TV의 볼륨을 높였다.

 

흥전초등학교라고 쓰인 교문 앞에는 낯선 작은 간판이 서 있었다. 영화 꽃 피는 봄이 오면의 영화 촬영지, 라고 적혀 있는 글씨는 어둠 때문에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목만으로는 무슨 영화 였는지, 등장한 배우가 누구였는지 알 수 없었던 나는 조금 더 가까이 간판 앞에 붙어 섰다. 조명이 비춘 듯 갑자기 어둠이 환해진 건 그 순간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구름에 가렸던 달이 탱탱한 얼굴로 밤하늘 위에 둥실 떴다. 어둠 속 달이 그렇게 밝은지, 태양 아래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던 것이었다.

- 오빠는…….

어떤 것이 위로일까. 아니다, 당신은 여자가 분명하다, 라는 거짓말이 위로일까. 괜찮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당신 모습이 매력적이다, 하는 구경꾼 같은 말이 위로일까.

- 오빠는 시인이 되고 싶어 했어.

결국 위로가 아닌 다른 말을 택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위로든, 아니든, 지금 이 순간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 , 좋아하니?

딱딱한 시멘트 의자에 앉아 그렇게 물었다. 물론 리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듣고 있지 않은 듯 그는 어둠 속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침묵하는 그를 오랜만에 보았다. 사실은 그도 침묵의 말을 할 줄 알았던 건지.

- 하필 왜 그런 게 되고 싶어 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옛날 보육원에서 같이 있을 때부터 오빠는 다른 언니들이나 오빠들과는 좀 달랐지. 그래서 다른 오빠들한테 괜히 두드려 맞기도 했고. 그 오빠들 취미는 오빠의 책들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찢어내는 거였어. 그래서 오빠가 책의 찢겨진 부분을 찾아내나, 찾아내지 못하나, 그런 내기를 하면서 오빠를 놀렸지.

입을 꽉 다문 남편의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라 싱긋 웃음이 났다.

- 그런 오빠가 좀 불쌍했는데, 그래서 괜히 나도 시를 좋아하는 척 그랬는데. 사실 난 그거 별로였거든. 뭐라는 소리인지. 별이 어쩌고, 검은 잎이 어쩌고. 뭐 가끔 알아듣는 이야기들은 전부 닭살 돋는 그런 것들이어서 사실 좀 그랬어. 그런 걸 뭐 하러 쓰는지, 그런 걸 뭐 하러 읽는지.

남편이 열심히 읽어주던 목소리가 구름 너머의 별처럼 희미하게 떠올랐다.

- 근데 오빠는 그런 내가 좋았나봐. 그 때부터 자꾸 읽어주고, 또 읽어주고. 그리고 어느 땐가 나한테 그걸 읽어주며 눈물을 글썽거리는데……. 좀 이상했어. 이 사람, 나랑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그런 느낌? .

너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라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혹시 그의 표정이 변했을까 눈치를 살폈지만,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 까맣게 가려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 언젠가 분명 시인이 되겠다고, 대학교에 들어가 시 공부를 하겠다고 돈을 모으고 있었는데. 그게그게 잘 안되더라? 정말 오빠는 필사적이었는데, 생각처럼 안 되었어. 가끔 TV에서 젊은 사람들이 나와서 자기는 아르바이트만 해서 뭐 혼자 공부를 하고, 일억을 모았느니 뭐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오빠는 참 힘들어했어.

또 다시 가슴이 묵직했다. 어느새 갈래머리 아이가 올라와 앉아있을까 싶어 아래를 내려 보았는데, 그저 까만 어둠만 가슴 위에 올려 있었다.

- 그건 마치 놀림 같았어. 오빠를 놀리고 비아냥거리는, 오빠의 삶과 꿈을 두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은. 오빤 정말 필사적이었거든. 어떻게든 꿈을 이루고 싶어서. 꿈 밖에는 없었으니까, 그거 밖에는 없었으니까. 근데, 안 되더라. 보육원을 나와서 월세 방을 벗어나는데 몇 년이 걸렸고, 전셋집을 얻는 건 나랑 같이 살며 돈을 모으면서 부터였으니까.

간절했던 그 시절이 떠올라 눈가가 뜨거워졌다.

- 그러다가 사고가 났던 거고.

하늘을 올려보니 별도 달도 없었다. 그새 어느 구름 뒤로 숨어버린 건지.

- 사라진 건 다리 하나 였는데, 오빠한테는 너무 많은 것이 사라졌어. 겨우 다리 하나를 잃어버렸을 뿐인데, 오빠에겐 일순간 모든 게 다 사라진 것 같았어. 혼자라는 건, 아무 데도 의지할 데가 없이 혼자라는 건 정말 무서웠어.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목이 멨다. 이제 나를 잃고 나면 남편에게는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사라질까. 자꾸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 꿈같은 거, 없었니? 너는 꿈이 뭐니?

눈물을 삼키며 리브에게 물었다.

- 그런 거 있었을 거 아니야? 춤추는 사람이 되고 싶었니?

그런 사람을 무어라 부르는 지 떠오르지 않았다. 직업으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TV에서 본 것 같은데,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 탱고는 어디서 배웠니? 잘 추던데. 대학교에서 무용했니?

그러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조용한 어둠이 그와 내 사이를 드리웠다. 긴 시간은 아니었는데, 짧은 고요는 생각보다 깊었다. 순간 리브는 벌떡 일어나 눈앞에 펼쳐진 어둠 한 가운데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작은 초등학교 운동장은 어둠에 가려 새까만데, 그는 마구 달려갔다. 그리고 한 가운데 우뚝 섰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주변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조명이 쏟아지듯 유독 머리 위에 빛이 환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잠옷으로 입은 원피스 자락을 손가락으로 집어 예쁘게 들어올렸다.

- 라라, 라라라라! 라라라, 라라라라!

멀리서 또 다시 음악소리가 들렸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악기소리였다. 지난번보다 조금 빠른 그 소리에 맞추어, 그의 몸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텅 빈 어둠 속을 빙글빙글 돌기도 했고, 누군가 앞에 함께 춤을 추고 있는지, 그는 보이지 않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듯 했다. 꿈을 물었는데, 그는 춤을 추었다. 그의 꿈은 정말 춤을 추는 댄서였을까. 그 때, 양평의 근처에서 경찰이 그의 정체를 물었을 때에도 그는 그렇게 춤을 추었다. 그렇다면 원래 그의 정체가 춤을 추는 댄서였을까.

어둠 속에서 그의 춤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꾸 가슴이 꿈틀거렸다. 어떤 춤인지, 그가 흥얼거리는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여전히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이 자꾸 가슴을 두드렸다.

그는 계속해서 춤을 추고 또 추었다.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듯 몸을 숙이기도 했고, 활처럼 허리를 뒤로 젖혀 유연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곧추세운 두 다리를 움직여 내가 모르는 스텝을 밟았는데, 그건 마치 어둠 속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 했다. 아니면, 무언가 하지 못한 말들을 두 발로 쓰고 있는 듯도 했고.

물론 아직도 나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가 추고 있는 춤이 정말 탱고인지, 흥얼거리는 그의 노래가 탱고 리듬이 맞는 건지. 왜 그런 춤을 추고 있는 건지, 그의 꿈이 정말 춤을 추는 댄서였던 건지, 나는 모른다.

다행히 새까만 어둠이 덮인 초등학교의 풍경은 예의바른 관객처럼 그의 공연을 응시하고 있었고, 달빛은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머리 위를 밝혔다. 처음부터 공짜표를 얻어 온, 준비되지 않은 관객처럼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그의 춤을 응시했다. 이번에 그의 공연이 끝나면 아무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고, 그저 박수를 쳐주리라 다짐하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춤의 매혹만을 기억하리라 생각하면서. <17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