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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리 생존중/[ 손녀방송국, 채널 223 ] 매체

제 3화 <전설의 고향><M>의 귀신보다 더 무서운.

 

제 3화 <전설의 고향><M>의 귀신보다 더 무서운.

- 2012년, 납량특집극이 사라졌다!

 

아! 지독한 여름이야.

원래 여름은 더운 계절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우와- 이건 무슨 누가 어마어마한 솥에 지구를 집어넣고 팔팔 끓이는 것 같이 뜨거워. 이휴. 목덜미를 타고 내리는 끈적함을 피해 다들 에어컨 밑에서 낮시간을 보내고 밤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 근처 공원으로 편의점으로 나와 여름밤을 보내.

 

 여름 밤을 떠올리니까, 대청마루에 할머니 다리 베고 누워서 우리 마실 끝에 있는 당수나무 이야기 들었던 거 생각난다! 살랑살랑 부채바람과 함께 불어오는 그 이야기가 무서워서 등골이 오싹해지곤 했는데....... 그러고 보니까 등골이 오싹해지는 이야기는 이 뜨거운 계절에 에어컨보다 더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해.

 

 

 

 

 예전에는 여름이 되면 각 방송사에서 납량특집극이라는 이름을 달고 많은 공포 드라마가 방영되곤 했었지. 94년 M본부의 <M>, 95년 M본부의 <거미>, 99년 S본부의 <고스트>, 2000년 K본부의 <RNA>등등. 90년대 중반 M본부의 M이라는 드라마가 히트를 치면서 2000년대 초반까지 각 방송사에서는 매년 여름이면 공포물 제작에 열을 올렸었지. 단순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귀신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귀신이나 영혼이라는 공포의 코드를 빌려와 이야기 하는 게 많았어. 음~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그때 너무 어려서 낙태가 뭔지도 모르면서 M을 보며 무서워했고, 유전공학이라는 말도 모르면서 사람을 죽이는 거미에 오돌오돌 떨었던 것 같애.

 

그냥 귀신이 제일 무서웠던 거지.

 

 

       

 

 

근데 이것도 유행이었는지, 극장가에는 아직도 매년 여름이면 빨간 피를 떡칠하고 눈이 굴러 떨어질 것 같이 부릅 뜬 귀신들의 포스터를 볼 수가 있는데, 방송가는 2009년 M본부의 <혼>이후로 납량특집극이 뚝 끊겼거든. 이제는 고전공포물의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전설의 고향>은 구미호를 앞세워 매년 새로운 타이틀과 시도로 안방을 두들겼는데, 올해는 그 소식도 없네. 아쉽게.

 

어쩌면 말이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귀신은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닐지도 몰라.

 

대게 귀신이 나타나는 이유를 보면, 지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 그 한을 풀지 못해 떠나지 못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려고 하는 거잖아. 물론 그 모습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지만, 그 속 이야기를 듣고 나면 왜 인간을 괴롭히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돼. 여러 매스컴을 통해 묻지마 살인이나, 단순한 쾌락을 위해 저지르는 범죄들을 접한 2012년의 사람들에게 이런 이해가능한 귀신은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닌 지도 모르겠다.

 

2012년 여름, 납량특집극이 없는 브라운관에서 하는 드라마들을 살펴봐도 귀신보다 더 오싹한 이야기들이 나오잖아. 음~ S본부의 <추적자>(지금은 종영한)나 <유령>을 보면서 억울한 원한을 가지고 세상을 떠도는 영혼들은 오히려 맑다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 잘못된 목적으로 행해지는 수단의 폭력이 인간을 귀신보다 더 무섭게 만드는 것 같아.

 

 

“열두시 전에 안자면 귀신 만난데이”

 

내가 잠을 안자면 언제나 할머니가 이 말 했었잖아. 그때 나는 그 말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어두운 방안에 누워 초침이 흐르는 소리가 마치 귀신이 한발자국씩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같아서 힘들게 잠을 청하곤 했었는데...... .

 

올레길 살인사건, 울산자매사건...

 

손에 쥔 스마트 폰으로 끊임없이 사회의 많은 뉴스들을 접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오싹한 사건들. 오늘도 실시간으로 보이는 뉴스들에 소름이 돋아 해가 지고 밤이 깊어 갈 수록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게 돼. 텅 빈 이 골목길에 내가 아닌 다른 이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길 바라면서.

 

할머니, 어쩌면 조금 슬픈 것 같아.

여름하면 생각나는 것들 중 하나를 잃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귀신보다 사람을 더 무서워하게 되었다는 거. 이 더운 여름, 사람이 무서워 닭장 속 닭 마냥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에어컨 밑에서 헬레레하고 있는 게 슬프네.

 

쏟아지는 별빛들을 온 몸으로 느끼며 맥주 한잔과 납량특집극 한편이 있었던,

나의 여름 밤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정선재 I 자칭 타칭 티비 빼꼼이, 여름밤 찬양가 버뜨 세상이 흉흉하여 열두시 전 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