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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리 생존중/[ 손녀방송국, 채널 223 ] 매체

제 1화 <거침없이 하이킥!> 봄날에 관하여.

- 제1화 <거침없이 하이킥>

  91화 문희의 봄바람 + 164화 순재의 은퇴식

 

1.

 

할머니, 큰 일 났어!

아침을 먹으려고 부엌에 들어갔는데... 엄마가... 엄마가... 곰국을 끓여놨지 뭐야...

이건 필히 삼시세끼 곰국을 데워 먹으란 말인데, 솥의 어마어마한 크기로 봐선...

 

엄마, 또 시작 된 거지. 뭐.

 

새파란 보리가 자리 잡고 있던 논에 물이 차고 어린 모들이 바람에 살랑이는 이때가 되면, 엄만 늘 바빠져.

오늘도 아침부터 울려대는 엄마의 핸드폰을 보면서, 또 어딜 가시려나 하고 있었어.

매년 돌아오는 초여름의 기분 좋은 바람처럼 엄마의 나들이는 이유가 없지.

그래도 가끔 ‘엄마~ 어디 가는데?’ 하고 물어보면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유월 장미가 그렇게 이쁘다잖아!’하고는 화장대로 가 앉아.

음... 엄마의 나들이가 정확하게 언제 부터였는지 모르겠어.

다만, 엄마의 화장대에 있는 갱년기 알약을 보면서 조금은 알겠더라고~ 엄마의 이름 모를 바람의 시작과 약을 먹기 시작한 날이 같다는 걸.

 

“내 인생에 봄이 몇 번이나 올 것 같아!”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방영됐던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91화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 누군가의 부인, 엄마, 할머니로서의 역할을 착실하게 해 오던 문희(나문희)가 화장대에 앉기 시작하지. 갑자기 왜 그러냐고? 

 봄, 봄 때문이지. 뭐-

 

문희의 봄바람으로 엉망이 되어버리는 집안 때문에 화가 난 순재(이순재)는 그녀의 이유 없는 나들이를 금지 시켜. 그때, 문희가 가족들이 모두 모인 거실에서 울면서 이야기 하지.

 

남은 봄이 얼마가 될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역할을 가지고,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겠지.

나는 여자야, 나는 엄마야. 뭐 그런 것과 같은.

나에게 주어진(혹은 내가 얻은) 역할에 최선을 다해 걸어왔는데,

음... 그게 비눗방울처럼 빵!하고 터져버리고 한다면 어떨까?

 

할머니, 나는 아직 내 역할을 찾아 걸음을 떼고 있는 어린 어른이라 그 시간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는데, <거침없이 하이킥>의 문희의 봄바람을, 그리고 엄마의 나들이를 지켜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 여자로서의 봄이 끝난다면, 이 생애서의 봄이 끝난다면.

 

아아, 그래서 문희의 봄바람은 멎었냐고요?

 

아뇨. 어떻게 부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어. 그러다 부러지지!

순재는 하얀 봉투에 두둑이 돈을 넣고, 쪽지를 하나 넣어두지.

 

 얼마 남은 지 모를 봄바람에 문희가 마음껏 흔들릴 수 있게.

 

2.

 

할머니!

나는 요즘 문득 나의 청춘이 무르익어 갈수록 찡해져. 내가 하나 둘 혼자서 할 수 있는(혹, 해야 하는) 일들이 늘어가고 번듯한 어른이 되어가면서 엄마, 아빠 생각을 더 하게 되는 것 같거든. 당신들의 청춘을 먹고 자란 내가 또 다른 이름의 청춘으로 꽃봉오리를 맺는 것 같아서...

찡해.

 

40년 침을 놓아온 한의사 순재는 은퇴를 결심하며 이런 말을 하지.

 

“이만하면 됐어.”

 

주변에서 어떤 권유도 없었지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이 순재에게 은퇴를 결심하게 한 것 같아.

음, 예를 들면 며느리인 해미에게만 환자가 몰린다던가 몇 없는 환자들에게 실수를 해서 욕을 먹는다던가... 뭐 그런 작지만 한 없이 나를 작게 하는 일들이 끝을 보게 했나봐.

 

가족들은 순재의 은퇴를 말리지.

아직 정정하신데 벌써 일을 끝내는 건 아닌 것 같다면서. 하지만 결국 순재는 자신의 평생을 바친 병원을 떠나고, 남은 여생은 다른 무언가를 해 보며 천천히 삶을 정리해 나가고 싶다고 말하더라.

 

할머니!

나는 왜 순재의 은퇴식을 보면서 연극의 끝이 아닌 또 다른 막의 시작을 보는 것 같았을까?

지금 이 무대 위에서 내려가는 커튼이 마지막을 알리는 것이 아닌 절정으로 달리기 위한 준비처럼 보였어.

 

그러고 보니 아빠의 정년퇴임이 얼마 남지 않았네.

엄마는 2년 연장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순재의 대사와 같은 그 표정을 읽었어요.

“이만하면 됐어.”

 

은퇴.

봄날과 멀어지는 것 같은 그 단어를 접하며 섭섭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래도 뭐, 청춘만 아름답나, 봄날만 멋있나!

중년의 도전도 청춘 못지않게 열정적이고

가을의 어느 날도 봄날 못지않게 멋진걸.

 

병원을 은퇴한 순재는 아프리카로 의료봉사를 떠나. (물론, 며느리 때문에 억지로 가게 된 거지만) 짧은 내레이션과 몇 장의 사진으로 그의 은퇴 후의 삶을 모두 이야기 하기엔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순재는 웃고 있었어. 삶의 흐름 속에 미간에 내려앉은 내천자의 주름이 펴지고, 치켜 올라간 눈 꼬리가 쳐지면서 가장 봄날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어.

 

 

할머니!

누가 처음과 끝은 만들어놓은 지는 모르겠지만, 그 거리를 달리면서 봄을 만나고 가을을 만나고 하는 건 달리는 나의 몫인 것 같아.

물론, 끝으로 가면서 힘도 빠지고 처음의 열정도 시들어가겠죠. 그래도 후반부 나름의 재미를 느끼고 달리다 보면 처음 못지않은 처음을 맛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은퇴라는 단어 너머에 있는 봄날, 그 날의 나를 기대해 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