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할매는 테레비 볼 때가 제일 좋나?”
이 말, 기억나?
매일 밤 ‘테레비’ 앞에 앉아 있는 할머니한테 내가 했던 말이잖아.
밤 아홉시만 되면 칠흑 같던 촌 동네에서 유일하게 불빛이 나오던 상북면 길천리 223번지.
아침에 눈을 떠서,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저녁이 될 때까지
테레비의 재잘거림으로 하루를 보내던 할머니가 생각나네.
할머니 참 좋아했었지. 테레비.
초여름 바람 드는 마루에서 할머니의 다리를 베고 누우면 오늘 하는 드라마가 뭔지, 쇼 프로그램에는 누가 나오는지 얘기 해주곤 했잖아. 아마 내가 테레비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가 아닐까 싶어. 참 재밌었어. 전원일기의 복길이네 이야기도, 전국노래자랑에 나온 괴짜 출연자의 이야기도. 할머니의 눈으로 읽은 테레비 속 세상이 내 귀로 전해지는 그 시간이 참 좋았었어.
“선재야, 할머니 이제 티비 못 보셔.”
엄마가 그랬지. 초등학교 3학년이 되고 얼마 뒤 할머니의 눈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길 들었어. 그때 알았지. ‘아, 그래서 우리 집도 밤 아홉시에 불이 꺼지기 시작했구나.’ 할머니의 침침하던 눈이 그렇게 안 좋아지고 있는지는 몰랐어. 어린 맘에 덜컥 겁이 났어. 깜깜해진 223번지의 밤이 무서워서였을까? 아니면 할머니와의 좋았던 시간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였을까? 그리고 알았지. 할머니 얼굴 위로 표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병원. 일주일에 한두 번 씩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갔던 곳.
내가 음악시간에 배운 노래를 불러도, 상장을 받아와도 희미하게 미소만을 보일 뿐, 할머닌 예전처럼 웃지 않았어. 나는 할머니의 웃음을 알잖아. 눈 꼬리는 아래로 축 쳐지고, 입 꼬리는 위에 쭉 올라가는 그 웃음, 그 표정. 주름 하나까지도 즐거워 보였던 그 얼굴을 보고 싶었어.
어떻게 하면 될까?
그 물음표를 해결하기 위해 공책과 연필을 꺼냈어. 그리고 테레비 앞에 앉았지. 아직 끝나지 않은 드라마들의 이야기들을 옮겨 쓰기 시작했어. 간간히 할머니가 좋아하는 오락프로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까지 공책에 옮기고 나면 얼른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니까.
“할매, 찬우~ 학교 그만 뒀다니가, 즈그 형 복수한다고~ 근데 효경이는~”
주말드라마 ‘첫사랑’의 이야기를 전했을 때, 나는 왜 할머니가 예전 같이 웃었다고 느꼈을까? 다시 고요한 일상의 행복이 내려앉은 얼굴로 내 손을 살포시 잡아 주는데... 참 좋더라. 그래, 안 보이면 뭐 어때! 든든한 손녀가 테레비 대신 방송을 해 줄 텐데, 뭐. 그지?
할머니, 나 그때 정말 열심히 봤다! 테레비.
그리고 지금도 나 열심히 보고 있어. 테레비.
그때는 할머니의 잃어버린 친구와 웃음을 찾아 준다고 테레비를 끼고 살았다면, 지금은... 뭐, 그냥.
적적한 타지 생활에 말벗이 되기도 하고, 생각에 잠기게도 하고, 일상을 되짚어 보게끔 하기도 하고...
테레비란 녀석이 나에게도 제법 큰 의미가 돼버렸네.
이제, 다시 중단됐던 손녀 방송을 시작해 볼까해.
할머니가 없는 동안 재밌는 드라마도, 예능도, 다큐멘터리도 정말 많아졌어! 할 이야기 거리들도 한 아름이고. 할머니, 예전 그때처럼 즐겁게 내 방송 들어 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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