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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면호상/[ 빠쓰정류장 ] 장편 연재 소설

長篇小說 '빠쓰 정류장' - <제12화> 고래의 말

 

 

 

 

 

 

 

 

11.

고래의 말

 

 

 

 

 

벨이 울렸고, 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내렸다. 삑삑, 딸랑, 딸랑.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사람들이 버스에 올랐다. 가끔 타는 문으로 내리는 사람들 때문에 운전기사와 손님 사이에 고성이 들리곤 했지만, 그건 지극히 일상적인 소리여서 오히려 나를 안도하게 했다.

사람들이 많았는지 누군가 내 등 뒤 의자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섰다. 조물거리는 작은 손이 어깨에 닿았다. 어린 아이일까. 그렇다면 내 무릎에 앉혀 주어야지. 무거운 몸을 틀어 아이를 향해 손을 벌렸다.

- 아줌마 무릎에…….

그러나 내 입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 고맙습니다.

아이는 작은 입을 벌려 그렇게 말해놓고는 떨고 있는 내 무릎 위에 털썩 앉았다. 아이의 뒤로 늘어진 갈래머리가 목덜미를 간질였다. 분홍색 원피스는 아무렇게나 구겨졌다. 아이의 머리에서 아직 지워지지 않은 젖내가 났다. 무릎에 앉은 아이는 낯을 가리지도 않고 발장난을 하며 창밖을 봤다. 옆으로 돌린 아이의 작은 얼굴에 어색하게 휘어진 눈썹이 또렷했다. 내가 그려주었던 바로 그 눈썹이었다.

- 장난하지 말고 잘 앉아야지, 아줌마 힘들잖아?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에서 입을 벌렸던 여자는 너무 평범한 모습이었다. 부스스한 파마머리를 아무렇게나 올려 묶고, 립스틱만 겨우 바른, 조금은 지친.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아이는 흘끗 그녀를 올려보고는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엉겁결에 나도 아이의 허리춤을 감싸 안았다. 초록색 리본이 내 손에 선명하게 엉겼다.

꿈일까.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며칠 동안 잠을 설치기는 했다. 너무 많은 생각들과, 상념으로 머리가 무거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건 정말 꿈일까.

, 다시 벨이 울렸고, 뒤쪽의 손님 하나가 사람들을 비집고 출입구로 다가섰다. 그 바람에 서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내 앞으로 조금 더 기울어졌다. 버스는 다시 멈췄고, 사람들이 내렸고, 다시 또 다른 사람들이 탔다. 삑삑, 딸랑, 딸랑. 소름끼치도록 일상적인 풍경. 너무 일상적이어서 그건 비현실적이었을까.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안고 있는 아이에게 얼굴을 기댔다. 느껴진다. 따스한 온기. 분명히 느껴진다. 살아있는 것의 온기. 용기를 내어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리고 아이의 작은 귀에 속삭였다.

- 이름이, 뭐니?

- 호홋.

그러나 아이는 대답도 없이 그렇게 웃고 말았다. 꿈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리브처럼.

- 어디, 가니?

이번에도 호홋 웃고 말 줄 알았는데, 아이는 살짝 고개를 돌려 내가 그렸던 눈썹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 바다요. 엄마가 바다 간다 그랬어요, 호홋.

- 바다?

바다를 달리고 있는 상상을 하는지 아이의 두 발은 허공 위에서 춤을 추었다.

- 남쪽이랬어요, 바다.

아이는 창 밖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이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지만, 그 쪽이 남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 고래가 산댔어요, 바다. 큰 밍크 고래. 호홋. 고래 만나러 바다 가요, 호홋.

이번에는 고래를 표현하기 위해 아이의 팔이 양옆으로 주욱 벌어졌다. 물론 그것도 고래 모양은 아니었다.

- 여기 자리 났다, 이리 와!

머리 위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사람들을 뚫고 건너편으로 멀어졌다. 아이는 폴짝 무릎에서 내려와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또 다시 벨이 울렸다. 삑삑, 딸랑 딸랑. 벌써 시가지에 들어섰는지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 내리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아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똑똑히 보아야겠다, 나는 아예 아이가 앉아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건너편 의자에 앉은 그녀의 무릎 위에는 처음 보는 낯 선 아이가 앉아 있었다. 분홍색 원피스도 입고 있지 않았고, 허리춤에 초록 리본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아이의 얼굴 위에는 그려진 눈썹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낯선 이방인인 나를 잔뜩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버스 안에서 아이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리브에게 하지 않았다.

- 이 언니는 무슨 바다를 또 가재? 이제 질리지도 않으우?

리브는 팔짱을 끼며 팩 토라졌다. 아직도 내게 들은 섭섭한 말들을 곱씹고 있는지.

- 만나야할 사람이 있어서. 아니, 사람은 아니다.

- 사람이 아니면 귀신? 언니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봐. 언니 정말 이상해. 아직도 그 동자귀신이 꿈속에 보이지 그치? 설마 그 귀신이 현실에도 나타나서 막 뛰어다니고 그러지는 않아?

흠칫 놀라는 내 두 눈을 보며 그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 이봐, 이봐! 맞지, 맞지? 어머머, 언니, 언니, 그러지 말고 진지하게 잘 한번 생각해봐. 이거 단번에 팔자를 고칠 수도 있는 일이거든. 압구정동이나 노량진에 잘나가는 점쟁이들, 한 달 수입이 몇 천이래, 몇 천! 언니 죽을 때까지 몇 년 동안 평생 벌 돈을 다 벌고, 마음껏 쓰고 즐기다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게?

또 다시 엉뚱한 곳으로 빠져드는 그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샜다.

- 어머머, 이 언니 웃어? 정말 어쩌면 이게 마지막 선물 같은 걸 수도 있어, 언니? 사람 팔자가 만날 죽으라는 법이 있어? 끝도 없이 곤두박질쳤으면 반드시 이렇게 한번은 솟구쳐주는 맛이 있는 게, 그게 인생이라는 거라고, 언니? 잘 생각해봐, 그 동자귀신이 언니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이디? 혹시 무슨 숫자 여섯 개 같은 걸 속삭이고 그러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는 매표창구로 다가갔다. 부산까지 바로 가는 표가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여기는 또 다시 끝에서 끝인 곳이었다.

- 아니면, 마포구, 은평구, 뭐 이런 지명을 대거나 그랬던 건 아냐? 언니, 언니, 기억을 똑바로 살려서, 나쁜 머리를 제발 팽팽 돌려서, 언니! 제발!

나를 졸졸 따르며 리브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물론 그의 목소리를 따라 내 웃음소리도 커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부산으로 가는 버스가 내 기억속의 그곳으로 데려다 주리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알고 보니, 부산에도 큰 터미널이 두 군 대. 기사에게 기억 속 터미널을 말했더니, 거긴 또 해운대 근처에 있는 작은 터미널이라고 했다. 겨우 막차나 다름없는 지하철을 타고 해운대에 도착하니 이미 사위는 새까맣게 어두워져 있었다. 내 기억 속 그곳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을 서성거리며 헤매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마음이 급했다. 배고프다며 리브는 연신 투덜거렸지만, 나는 그의 팔을 끌고, 바닷가 쪽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어느새 시간의 물결에 떠밀려 금방이라도 고래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 뭐니, 겨우 스파게티니?

낡은 인테리어의 이탈리아 음식점은 이미 음악이 꺼진 채였다.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도 계산을 하려고 일어서고 있었다.

- 스파게티 집을 가려면 근사하고 좀 괜찮은 데를 가야지. 언니, 이런 데는 스파게티라면 끓여주는 거랑 맛이 비슷하다? 그거 아니?

투덜거리며 리브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이곳은 이렇지 않았다. 넓지 않았지만, 단정하고 멋스러운 분위기는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음식점보다 아름다웠고, 우리 앞에 놓였던 음식들은 엄마의 품처럼 포근했다. 남편에게나 나에게나 그건 생전 처음 경험하는 맛이었다.

- 가자, 언니. 요 옆에 자갈치 시장에 가서 회 한 접시하고 해물탕 한 그릇을 먹는 게 낫지, 여기서 이런 걸 깨작이고 있을 게 아니다. 내가 멀미난다고 그러고 나갈 테니까, 언니는 바로 내 걱정하는 척, 가방 들고 뒤따라 나와, ? 내가 쫌 연기가 되잖수. 호호호.

리브는 카운터의 눈치를 살피며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들어섰다. 활처럼 휘어지는 그의 웃음은 단박에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고 그를 따라 들어온 백색의 거대한 몸짓.

- 고래야!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 나갔다. 그리고 와락 고래를 껴안았다. 컹컹, 나를 알겠는지, 내 눈물을 알겠는지, 고래는 꼬리를 치며 컹컹 짖었다. 어정쩡하게 일어났던 리브도 화장이 지워진 큰 눈을 껌뻑이며 고래의 인사를 들었다.

 

차 한 잔을 내오겠다며 그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생이었는지, 카운터를 지키던 스물 초반의 남자는 연신 리브를 보며 킥킥거리다가 휴대폰을 들고 문을 나섰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그에게 쪽지라도 적어 넘겨주려고 애를 썼겠지만, 오늘은 오히려 웃음이 인자한 백발의 그에게 자꾸 눈웃음을 흘렸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향긋한 차 한 잔을 건네는 그의 손길을 따라 그의 입은 헤벌쭉 벌어졌다. 물론 그건 노인이 우리에게 건넨 이야기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웃음이었다.

- 사는 게그렇게 인력으로 안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 사람도 악하게 산 사람이 아니었고, 나도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한테 그런 연이 없었던 거지, 그렇게 믿어야지, 별 수 있나? 허허허.

첫 아이를 낳다가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난 부인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렇게 웃더니, 그 후에 벗하며 함께 살던 친구까지 작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더라, 하며 곤혹스러워하던 참이었다.

- 어머, 그럼 아저씨도 이쪽?

갑작스런 이야기에 그와 나는 물끄러미 리브를 봤다.

-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자신의 감추어둔 성적 취향을 인정하지 못하다가 결국 운명에 이끌려 평생의 동반자를 만났지만,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 그런……. 뭐 그런 소설도 있었는데, 언니는 몰라?

- 너는 정말 말을 해도?

이번에는 내가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나 내 앞에서 호방한 웃음이 팍 터졌다.

- 허허허, 그런가? 애틋하기는 했지, 같이 살았던 햇수로 따지면 우리 집 사람보다 훨씬 더 오래 같이 살았으니. 동피랑이라고 통영에 있는 달동네 마을에서 그 친구를 만난 게 구십 육 년인가, 칠 년인가, 그랬으니까. 그러네, 그 친구랑 더 오래 살았네. 허허허.

- 그 봐, 언니? 맞잖아? 맞다니깐? 하여간 이 언니 기억력도 나쁘고, 머리도 나쁘고, 센스도 바가지에, 팔자도 더럽고. , !

마지막 말끝에는 그래도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지, 리브는 내 눈을 피했다.

- 그래도 그게 같니? 사랑이랑 우정이랑 그게 같아?

나무라듯 리브를 다그쳤다.

- 사랑했지.

그러나 대답을 한 건 리브가 아니라 백발의 그였다.

- 그랬을 거야, 사랑했을 거야. 사랑이라는 게 꼭 몸을 섞어야 사랑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면, 그래 그건 사랑이었지, .

옛 추억을 더듬듯 그의 눈빛이 고즈넉해졌다.

- 맞죠? 아저씨 게이인거죠?

생뚱맞게 그는 그렇게 다그쳤다.

- 허허허, 그런 걸 그렇게 부르던가? 근데 꼭 그렇게 불러야 하나? 나는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를 죽은 우리 집 사람만큼이나 애틋하게 생각했던 건 사실이고, 지금도 사실 집 사람보다 그 친구 얼굴이 더 많이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고. 허허허.

왠지 그의 주름 가득한 얼굴이 붉어지는 듯 보였다.

- 난 내 인생에 그 두 사람을 만난 것을 참 고맙게 생각하고, 그 사람들 덕분에 정말 인생이 행복했으니까. 그거면 되지 않나?

컹컹, 고래는 마치 우리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있었던 것처럼 컹컹 짖었다.

- 그래, 너도 있었지? 허허, 미안, 미안! 아마 이 놈이 내 인생의 마지막 사랑일걸? 허허, 그건 뭐라고 부르나? 동물을 사랑하는 거, 그것도 이름이 있나? 허허허.

다행히 리브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힘들어도 그 때 그 식당을 하면서 이렇게 추억을 찾아오는 양반들과 사는 이야기나 하며 지낼 걸,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중에 남편 되는 분이랑 제주도로 와요. 조만간 여기 정리하고 거기로 갈 거거든. 우리 누이가 먼저 제주도로 옮겨서, 거기 관음사 올라가는 길 앞에서 수제비도 팔고 전통차도 팔고 그런 식당을 조그맣게 하거든. 거기 오면 또 늙어가며 사는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아무래도 거기가 이놈에게도 좋을 거고. 이름만 고래였지 이놈은 여기 바닷가에 살 팔자가 아니야. 거기는 공기도 좋고, 들판에 푸른 풀밭도 많고 그렇다니까, 마음껏 자유롭게 뛰며 지내도록 해야지. , 그래야지.

고래도 그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들판이라는 말, 풀밭이라는 말, 자유라는 말을 다 알고 있는지, 노인을 향해 불쑥 고개를 들어 컹컹 짖었다.

- , ! 그렇지, 이놈도 실은 고래가 아니지.

- ?

갑작스런 이야기에 내 두 눈은 동그래졌다.

- 그 때 보셨던 그 고래가 아니에요, 이 놈. 그건 이 놈 어미지. 지금은 이놈이 어미 대신 나를 지켜주고 있지만.

컹컹, 고래는 다시 노인을 향해 그렇게 짖었다. 어미를 그리워하는 외침인지, 슬픔을 토해내는 울부짖음인지 어쩐지 그건 길고 무거운 울음이었다.

- , 엉엉!

그런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 건 리브였다. 나중에 언젠가, 라는 말에, 내가 알던 그 때 그 고래는 사라지고 없다, 하는 그의 말에 또 다시 코끝이 시큰해진 건 나였는데, 마개가 터진 듯 리브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고래는 그런 리브를 향해 또 다시 컹컹 짖었다. 그의 울음소리를 따라 컹컹, 컹컹컹 짖고 또 짖었다. 울지 말라고 말하듯, 괜찮다고 말하듯.

그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는데도, 괜히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없기는 리브도 마찬가지였다. 이름 없는 관계로 살면서도 내내 행복했다고 말하던 노인의 말은 그에게 많은 가르침이고 또한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켜켜이 쌓였던 상처를 드러내는 참으로 고마운 위안이었을지도.

- 미안해.

그건 하지 못한 말이었다. 병원의 화장실 안에서 만났을 때부터, 대성이가 사는 지붕 낮은 집에서 있었던 일까지, 나는 분명 그에게 그 말을 했어야했다.

- 아까 거기, 그 식당에서 그랬어. 우리 오빠랑 나랑 여기로 신혼여행을 왔을 때, 오빠가 되게 미안해하고 그랬어.

어색하게 내 손을 움켜잡고 걸었던 그 때 그 바다가 떠올랐다. 이름표라도 붙인 듯 커플 셔츠를 입고 걷던 바다는 온통 심장소리로 가득했다. 파도가 치는 소리가 들리거나, 갈매기가 우는 소리 같은 건 없었다. 그 때 바다는 그저 내게 거대한 심장을 가진 뜨거운 생물이었다.

- 그리고 이렇게 말하더라? 앞으로도 살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 하고 싶을 때가 많을 거다. 근데 하지 않을 거다. 미안하다는 이야기는 이번 한번으로 마지막이다. 대신 고맙다, 그럴 거다. 고맙다, 고맙다, 그렇게.

내 손을 잡은, 땀이 가득했던 남편의 손이 떠올랐다. ‘고맙다.’ 라고 말하며 떨리던 그의 목소리도.

갑자기 못 견디게 그가 그리워졌다. 마술이라도 부릴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그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놓고 싶었다.

- 멋지지, 그치?

눈물을 삼키며 리브를 바라봤다. 웬일로 리브는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 정말 멋지더라. 나이를 먹어도 어쩜 그렇게 점잖고 매력적일까? 그 웃음도 정말 섹시하고, 그치, 그치? 내가 좀 금사빠이기는 하지만 그 아저씨 쫌 멋지더라. 호홋.

어이가 없어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이번에도 어긋났다.

- 이번에는 금사빠를 모르는 거니?

- 금사빠?

- 하여간, 하여간! 어쩜, 어쩜? 쯧쯧.

그는 이제 아예 불쌍하다는 듯 나를 향해 혀를 찼다.

- 금방 사람에 빠지는 사람, 금사빠. 모르니, 정말? 로맨틱하고 감성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그 말을 정말 모르는 거야? 쯧쯧쯧.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언어는 정말 알 수 없는 말이었다.

- 솔직히 말해봐, ? 언니 정말 수상한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내가 신고 안 할 테니까 솔직히 말해보라고. 언니, 저기서 내려온 사람 맞지?

리브의 턱밑은 어디랄 것도 없는 허공을 가리켰다. 어느새 동이 터오는 건지, 새까만 하늘 한쪽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 왜 그런 거 있잖아? 임무를 받고 옛날에 내려왔는데, 다시 돌아가지 못한. 그래서 이제는 남한에 사는 보통 사람의 삶을 살게 되는 그런 거. 하지만 언제든 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접선을 준비하고 있는 그런 거. 뭐라고 부르더라 그걸? 하여간 있던데? 영화에서 보니까 그런 사람들 정말 있대. 솔직히 말해봐, 언니도 그런 사람 아니니? 내가 신고 안 할게. 정말, 정말이라니깐?

이제는 화가 나거나 헛웃음이 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만의 믿음과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 소통을 바라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임무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에게 정말 어떤 임무가 있다면 그건 어쩌면 가장 해내기 어려운 것일지도.

- 내가 삼천만원 안 탈 게. 근데 요즘도 삼천만원인가? 일억인가? 어디서 본 것 같다, 일 억! 맞다, 일억! , 일억이면 이거 생각이 좀 달라지는데?

리브는 샛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무슨 계산을 하는지 연신 눈을 깜빡였다.

- , 울었니?

조심스러움을 들키지 않도록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 ?

- 아까 말이야, 거기에서. 그 사장님이 옛날 이야기해주고 그럴 때. 너 울었잖아. 왜 울었어?

먼 시간이라도 더듬듯 그는 허공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 , 그거? 그거, 내 운명이 너무 가여워서. 이름을 잃어버리고 사는 내 운명이, 아이 하나도 낳을 수 없는 내 운명이,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나서 이런 슬픈 운명을 겪어야하는 걸까, 왜 세상은 이런 나의 슬픔을 동감하지 못하는 걸까? 내 안에도 이렇게 아픈 슬픔이 있다는 거.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는 그저 살고 싶은 거였다는 거, 갑자기 그런 슬픔과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와서. 흑흑흑, 엉엉엉!

터진 풍선처럼 리브는 한꺼번에 모든 것들을 쏟아냈다. 내 무릎에 털썩 쓰러져 흐느껴 우는 리브의 어깨는 너무 커서 안타까웠다. 그래, 괜찮다, 알고 있다, 나도 알고 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며 그의 어깨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나 속에 맺혔던 것들이 많았는지 내 손길을 따라 그의 어깨가 더욱 더 커다랗게 들썩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얼굴이 빠끔히 나를 바라봤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기는 한데, 그건 어쩐지 과도하게 번들거렸다.

- 맞지?

갑작스런 물음에 눈물이 가득했던 내 두 눈도 동그래졌다.

- 이제 나도 말해줬으니까, 언니도 언니 비밀을 나에게 말해봐, ? 맞지? 일억 원짜리, 맞지, 그치?

어이가 없어 입이 벌어졌다. 너무 기가 막혀 숨이 가빠왔다.

- 맞지, 그치? 일억 원짜리, 일억 원짜리, 맞다, 맞아! 그럼 언니 남편이랑 두 사람이니까 이억 원인가? 우와! 이억! 일억도 아니고 이억, 우와!

퍽 터진 그의 함성이 새벽 바닷가를 쩌렁쩌렁 울렸다. 해변을 뛰고 있는 운동복 차림의 관광객도 깜짝 놀라, 뜀박질이 뒤틀렸다. 펄쩍펄쩍 모래밭을 뛰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내 생각도 뒤틀리기는 마찬가지였다. <1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