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딸기 맛이 날 때
리브와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터미널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터미널이 떠내려가는 배도 아닌데, 마음이 자꾸 조급해졌다. 동동거리며 발을 구르고 있는 내 앞에 마술처럼 천천히 버스가 다가왔다. 꿈속처럼 그건 ‘장항’이라는 커다란 푯말을 문 앞에 달고 있었다. 흘러가듯 나는 버스에 올랐고, 버스는 미끄러지듯 밤안개가 자욱해지기 시작한 검은 허공 속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 안 내려요? 장항가신다면서요?
기사는 그렇게 물어놓고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버스 밖으로 사라졌다. 어둠 속을 한참을 달려 버스는 허공 속에 멈추었다. 창밖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내 모습만 유리에 비춰 기괴하게 구겨져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버스는 정말 허공 속에 멈춘 것 같았다. 떨리는 발걸음으로 문 밖을 나섰다. 분명히 운전석에 기사는 없었는데 마술처럼 문이 닫혔다. 딸깍 버스 안에 불이 꺼졌다. 기사도, 버스도 스르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디선가 나를 태우고 여기에 내려놓은 듯 그건 새까만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터미널이라고 했는데, 분명 터미널이라고 했는데. 그러나 새까만 어둠 속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터미널 건물이 어둠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새까말 수는 없는 일이었다.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움직여 어둠 속을 더듬는데, 갑자기 검은 허공 속에서 불빛이 드러났다. 어떤 모퉁이 뒤였다. 그러고 보니, 내 눈 앞에는 거대한 건물이 검은 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한 귀퉁이에서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새어나왔다. 영락없이 꿈 속 같았다.
- 엄마?
내가 알지 못했던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겨우 말 한 마디였는데, 잔뜩 겁에 질렸던 몸뚱이가 조금씩 펴졌다. 그 한 마디가 어떤 마술인지 내 두 다리에는 불끈불끈 힘이 솟고 있었다. 천천히 불빛을 향해 걸었다. ‘순옥아, 순옥아.’ 하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운 채였다.
천천히 불빛이 새어나오는 작은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비뚜름하니 서 있는 냉장고가 보였다. 때에 전 이부자리가 작은 시멘트 모퉁이 위에 깔려 있었고, 승객들을 위해 표를 끊었을 책상 위에는 흐릿한 사진 몇 장이 유리 밑에 깔려 있었다. 두 명의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 하나가 서 있는 사진. 그 뒤에 든든하게 그들을 감싸고 있는 부부의 모습. 어른이 된 아이들 모습, 그 아이들의 아이들인지 귀여움을 떠는 또 다른 아이들의 모습. 그 속에서 나를 찾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나와 닮은 것들을, 순옥아, 하고 부르는 내 이름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어디에도 내 모습은 없었다. 아무데서도 내 이름은 들리지 않았다.
끼익, 등 뒤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문가에 노파가 서 있었다. 백발에, 주름이 가득한데다가, 어느 시간에 깔렸는지 종잇장처럼 그녀의 모습은 접혀 있었다.
- 누구세요?
노파의 말이 아니었다. 그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 도대체 누구시냐고요?
어느새 나는 노파의 팔뚝을 흔들고 있었다. 내 손에 들어온 그녀의 팔뚝은 마른 북어처럼 얇았다. 나를 바라보는 노파의 눈에 알 수 없는 물빛이 가득했다. 회한인지, 깨달음인지. 아니면 그저 낯선 이방인을 만난 두려움뿐인지.
- 할머니는 도대체 누구에요! 도대체 누구냐고요!
그녀는 순간 내 눈빛을 피했다. 그리고 바닥에 놓여 있는 때에 전 이불 위에 주저앉았다.
- 할아버지는요? 할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할머니, 자식들 없어요? 여기……. 여기 이 사람들, 할머니 자식들 아니에요?
책상 위 사진들을 가리키는 내 손가락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여기 자식들 셋이나 있는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씩이나 있는데, 할머니가 왜 여기 이러고 있어요? 할머니가 왜 여기 이러고 있어야 되는 거냐고요!
내 악다구니는 텅 빈 어둠 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둠을 밝혔던 것이 촛불도 아닌데 내 비명을 따라 그건 힘없이 흔들렸다.
- 그런 자식들을 뭐 하러 키웠어요? 처음부터 다 갖다 버려버리지, 그런 자식새끼들 뭐 하러 애지중지 키웠느냐고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내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 죽었어요? 다 죽은 거예요?
듣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로라도 당신 자식을 죽인 것이 싫었는지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그럼 왜요? 그런데 왜요!
그녀의 입술도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 그럼 왜 이렇게 살아요! 자식새끼들 다 살아 있는데, 왜 이렇게 살고 있냐고요! 그 놈들 목덜미를 붙들고 따져야죠! 야, 이놈들아, 내가 너희들 낳고 키운 시간만 반평생이다, 들인 돈, 노력은 고사하고, 너희들을 지켜보며 산 시간만으로도 반평생이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셨어야죠!
곤혹스러운지 노파의 고개가 외로 꺾였다.
- 그런 자식 뭐 하러 키웠어요? 뭐 하러 열 달을 배 앓아 낳아 키운 거냐고요! 진즉에 어디다가 갖다버리고 말지, 죽든지 살든지 어디 내다버리고 말지 뭐 하러 여태껏 이따위 사진들을 껴안고 살고 있느냐고요! 왜요, 왜요! 흑흑흑!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듣고 싶었다. 찾아서 원망을 하거나, 비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 ‘순옥아, 순옥아!’ 그렇게 부르는, 나를 닮은 목소리를 듣고 싶었을 뿐.
엉엉 울며 노파의 무릎에 쓰러졌다. 말하지 않은 사연을 알겠는지 노파도 어정쩡하니 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도 누군가의 어미, 나는 누군가의 딸. 말하지 않아도 이미 우린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어미와 딸 사이.
밤이 깊어지도록 나는 노파의 구겨진 무릎에 앉아 울고 또 울었다. 엉엉 소리를 내어 울어도 괜찮을 만큼, 다행히 새까만 어둠은 말없이 든든했다.
반쯤 넋이 나간 채 장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는 나를 본 것은 아이라고 했다. 나는 그들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나를 찾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내가 보였다.
군산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또 다시 엉엉 울었다. 두려움이나 실망감 때문은 아니었다. 갑자기 허물어진 어떤 것 때문에 나는 납작하게 깔려 버둥거리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리브와 아이는 널빤지 몇 개를 주워와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보다도 더 커다랗고 튼튼한 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리브는 몇 번이나 망치질을 하다가 손가락을 찧고 말았다. 결국 아이가 망치를 빼앗아 못질을 했고, 리브는 널빤지 끄트머리에 끈을 묶었다. 얼기설기 못으로 박은 상자에 그런 예쁜 리본 같은 거 필요 없는데, 그는 커다란 손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곡선이 근사하게 휘어진, 풍성한 리본을 만들었다.
- 예쁘지, 예쁘지? 호홋.
상자를 들어 보이며 그는 아이 앞에 자랑했다.
- 자, 여기다가 이제 이걸 넣어서 사람들한테 나눠주는 거야. 이렇게.
언제 그런 걸 만들었는지, 흰 종이 위에는 빼곡히 커다란 글자들이 박혀 있었다. 물론 그것은 너무도 선명한, ‘우리 아빠는 살인자가 아닙니다.’였다. 그 위에 어색하게 그려진 분홍색 리본은 ‘살인자’라는 말과 따로 놀았다.
- 이래야 사람들이 읽어보고 아, 그렇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고 서명을 해주는 거지. 이왕이면 하얀 종이에 그냥 주는 것보다는 이렇게 예쁜 리본을 그려주는 게 사람들 이목을 끌어서 좋고. 그리고 이 상자에 매달린 이 리본과 같은 느낌이라야 ‘오, 센스 좀 있는데?’ 그러면서 더 관심을 보이고 그러거든. 이게 바로 환상의 깔 맞춤이라는 거지. 호홋.
리브는 잡지 속 유명한 사람들의 패션이야기라도 하듯, 여기저기 짚어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직접 그것을 아이의 어깨에 걸어주었다. 물론 활짝 편 공책과 연필도 양 손에 쥐어주었고.
- 자, 됐다! 오, 근사한데? 이제 머리에 왁스 좀 발라서 스타일링 해주고, 옷도 좀 환한 색으로, 이왕이면 완전 깔 맞춤이게 핑크색으로 입을까? 아니다, 그건 좀 오버다. 그게 숨긴 듯 드러난 듯 맞아야 되는 거지, 대놓고 맞추면 그건 완전히 컨츄리 스타일이라서 안 하느니만 못하다. 오, 어쨌든, 근사해, 근사해! 호호홋!
리브는 아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박수를 쳤다. ‘우리 아빠는 살인자가 아닙니다.’라는 전단지를 넣은 가방을 매고, 아이도 어느새 푸슬푸슬 웃고 있었다.
과연 어떤 것이 옳은 일일까. 슈퍼 주인의 말대로 아이의 아빠는 가족들을 모두 죽이려했다. 게다가 사고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다니던 공장의 사장을 죽게 만든 것도 그의 아빠였다. 어떤 이유도 살인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일인데, 어떤 시간도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인데, 자신의 아빠가 살인자가 아니라는 아이의 믿음은 과연 옳은 것일까. 설령 그의 아빠가 아이에게 돌아오더라도 어쩌면 그는 아이에게 또 다른 위협이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천천히 몸을 움직여, 나는 쪽마루에서 그들 곁으로 내려앉았다. 말해 주어야한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말해주어야 한다. 죽는다는 건, 너희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의미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냉정하게 말해주어야 한다. 진실의 힘은 센 거라고.
- 이건…….
천천히 바닥에 쌓인 전단지들을 집어 들었다.
-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좋아라,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던 리브와 아이는 물끄러미 나를 봤다. 철없이 구겨지는 그들의 얼굴은 몇 십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어쩐지 꼭 닮아 있었다.
- 뭐가 안 돼?
여전히 내가 했던 섭섭한 말들에 대한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은 잔뜩 부어 있었다.
- 너희들은 죽는다는 게 뭔지 아니?
그런 말,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입에 담고 보니 그건 생각보다 끔찍했다.
- 그게 얼마나 무섭고, 두렵고.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그게 행복했든, 행복하지 않았든, 그 시간들이…….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모든 것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 헤어진다는 게 그게……. 나만, 나 혼자만 떠나게 된다는 그게…….
나도 모르는 내 속이 얼마나 공포에 질려있었던 건지,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 자꾸 말이 끊겼다. 내 안에 꽁꽁 숨겨 두었던 두려움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우는 것도 모르고 두 눈에서 눈물이 질질 샜다.
- 그, 그게……. 죽음을 기다린다는 게, 죽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너는 아니?
명치끝이 아렸다. 누군가 생각의 칼을 찔러 넣은 듯 온 가슴이 쪼개지듯 아파왔다.
- 딸기 맛이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머금은 내 두 눈은 아이를 향해 멍청했다. 아이는 매고 있는 전단지 상자를 뒤적거리며 다시 한 번 말했다.
- 그거 딸기 맛인데. 그 때 아빠가 그랬어요. 이거 먹으면 행복해진다, 아빠도 엄마도 동생도 나도, 다 편해진다. 그거 딸기 맛인데.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던 입이 벌어졌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부끄러운 그림 한 장이 된 듯, 나는 그 자리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아이는 내 손에 들렸던 전단지를 조심스럽게 끌어 모아 상자 안을 또 다시 가득 채웠다.
- 누나, 누나! 우리 이거 더 만들어요. 나 버스 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다 나눠줄래요.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한테 나눠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죠, 그죠?
상자를 가득 채운 전단지를 아이는 만족스러운 듯 내려 봤다. 딸기 맛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브도 아이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라고 말해야하는데, 틀렸다고 말해야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그건 틀렸다고 말해주어야 하는데, 자꾸 몸이 베베 꼬였다. 나도 모르게 딸기 맛을 떠올리고 있는지 어느새 내 입 안에도 침이 고이고 있었다.
남편에게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말했을 때, 리브의 얼굴엔 놀이를 끝내지 못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우리 아빠는 살인자가 아닙니다.’라는 전단지를 인쇄하는 중이었다. 그는 그 전단지 위에 커다랗게 분홍 리본을 그려 넣는 중이었고. 그러나 리브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가지 않겠다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이가 돌아오면 인사라도 하고 떠나자 말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딸기 맛 우유라도 쪽쪽 빨고 들어오는 아이를 보게 된다면, 아마도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 것만 같았다.
이름이 없는 줄무늬 물고기 어항 밑에 돈 봉투라도 넣어둘까 오래 고민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편지 같은 것도 쓰지 않았다. 그건 희망이나 예의가 아니라, 떠난 자의 알량한 자기 위안, 혹은 핑계에 불과할 테니까. 우리는 지붕이 낮은 그 집을 나와 다시 터미널로 향했다. 그리고 장항터미널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리브는 무엇 하러 거길 다시 가느냐 물었지만, 분명히 목격하고 싶었다. 환한 곳에서, 환한 얼굴로 그녀에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번에 버스는 허공 속에 우리를 내려놓지 않았다. 작은 읍내를 지나 인적이 드문 골목 끄트머리에 커다란 건물 앞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페인트가 여기저기 벗겨진 커다란 건물 맨 꼭 대기에는 ‘장항 버스 공용 정류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모퉁이를 돌며 다시 노파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자꾸 눈물이 고였다.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까, 몸이나 잘 챙기며 지내시라, 하는 무감한 이야기가 좋을까. 눈물을 털어내며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노파가 머물고 있던 작은 공간 입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 아이였다. 죽음의 맛을 아는 아이.
- 어, 대성아? 너 여기서 뭐해?
- 어, 누나!
아이는 이제 제 식구라도 만난 듯 리브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겼다. 대성이었구나. 그의 이름은 대성. 큰 대, 이룰 성. 크게 이루어라, 하는 아빠의 뜻. 반드시 크게 이루며 살아라, 하는 아빠의 희망. 또 다시 찌릿하게 명치끝이 아파왔다.
- 여기서 뭐하는 거야, 응?
- 전단 나눠주려고 왔는데 여기는 사람들이 없어요. 터미널에는 다 사람들이 많은 줄 알았는데, 여긴 하나도 없어요.
아이의 얼굴은 금새 풀죽은 표정이었다.
- 그럼 아줌마랑 같이 갈래?
정체를 알 수 없는 여기 터미널은 모든 걸 토해놓게 하는 힘이 있는지, 생각지도 않은 말들이 자꾸 입 밖으로 쏟아졌다.
- 어머, 정말? 그래, 그래! 우리랑 같이 가자, 대성아! 우리 여기저기 버스정류장 많이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거든. 그러니까 우리랑 같이 다니면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 거야, 응? 그러자, 응? 누나랑 같이 다니자, 응?
리브는 좋아서 홍홍 거리며 뛰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럴 운명이었던 걸까. 정말 시간이란, 허투루 흐르는 법이 없는 건지. 아무도 모르게 숨기고 있을 뿐, 모든 시간에는 길이 있고, 이름이 있는 건지.
- 어디 가는 건데요?
아이는 뜬금없이 그렇게 물었다.
- 어디?
- 네, 아줌마는 어디 가는 건데요?
또랑또랑한 아이의 눈망울은 그렇게 묻고 있었다.
- 글쎄, 어디냐 하면……. 어디냐 하면 말이야.
그러나 나는 모르고 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게 될지. 딸기 맛이 나는 그 시간이 떠올랐지만, 그건 어디라고 말 할 수 없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저 아이처럼 딸기 맛이다, 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는.
- 난 그냥 여기 있을래요. 아빠 기다린다고 했거든요.
- 어머, 대성아, 그러지 말고 누나랑 같이 가자, 응?
리브의 두 눈은 섭섭함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아이는 조금씩 움직이는 버스 쪽으로 눈을 돌렸다.
- 어, 버스 간다! 저는 그럼 갈게요. 잘 가요, 아줌마! 누나, 탱고는 나중에 꼭 다시 와서 가르쳐 주셔요. 히힛!
아이는 어른스럽게 나에게, 그리고 또 리브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언제 아이에게 탱고를 아느냐고 물었던지, 아쉬움을 견디다 못해 리브는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 대성아, 누나 잊어버리면 안 돼! 누나야, 누나라고!
리브는 아이의 뒷모습에 대고 계속해서 그렇게 소리쳤다. 아이는 천천히 버스 유리창 밖으로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왠지 미안하고 고맙고 그랬다. 무언가를 주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잔뜩 얻어가는 것만 같았다. 아이에게 천천히 손을 흔드는데 알 수 없는 생각과 감정들이 내 안에서 어지럽게 뒤엉켰다. 자꾸 말문을 막는 생각은 부끄러운 손짓만 다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노파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 그녀가 남긴 흔적도 사라졌다. 먼지가 가득 쌓인 책상 위에 사진들도 사라졌고, 흔들리던 형광등 불빛도 새빨갛게 녹이 쓸어 있었다. 터미널 건물 안도 텅 비어 있었다. 역전다방이라는 낡은 유리 창문 위에 글자들이 대합실 바닥에 고인 물 위에 뒤집혀 있었고, ‘홍산’이라는 알 수 없는 목적지의 이름만이 대합실 벽, 운행표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리브는 냄새가 난다고 코를 틀어막으며 법석을 떨었고, 이런데 어떻게 사람이 사느냐, 또 다시 내게 눈을 흘겼다. 동자 귀신에게 홀리더니 정말 무당이 되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 떠벌리는 그의 목소리는 빈 대합실을 꽝꽝 울렸다.
다시 사위가 어둑해지면서 우리는 인적이 끊어진 그 자리를 일어섰다. 괴괴한 모습으로 새까매지는 터미널 건물을 돌아 나오는데, 누가 쌓아 놓은 건지, 검은 쓰레기봉투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다른 것들보다 유독 커다랗게 부풀어 넘쳐나는 그 봉투 안에는 사람들이 버린 우유 곽들이 한 가득 들어 있었다. 누군가 맛보았을 딸기 맛, 바나나 맛, 그리고 초콜릿 맛, 커피 맛 우유 곽들. 물론 누가 어떤 맛의 우유를 집어 들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왜 그 우유를 마시게 되었고, 어디에서 샀는지, 또 누구와 함께 마시게 되었는지.
- 아유, 다리야. 뭐니, 누구를 기다린 거니? 근데 언니, 좀 출출하지 않아? 우리 우유 하나 사 먹을까? 딸기 맛 우유, 호홋.
리브는 그렇게 말해놓고 두리번거리며 편의점을 찾았다. 어느새 그의 입 속에도 침이 고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1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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