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여기, 있다
우리가 다시 경기도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돌아와서 알게 되었다.
- 어머, 포천은 강원도 아닌가? 맞는데? 강원도 포천?
높이 매달린 운행표를 올려보며 리브도 눈이 커졌다.
- 맞아, 언니! 강원도 포천, 산도 많고 계곡도 많고, 군인들 부대도 많고 겨울에 눈도 엄청 내리고. 강원도 포천!
리브는 믿지 못하겠는지 매표창구로 쪼르르 달려갔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와서도 다시 공중에 둥실 뜬 운행표를 올려보았다.
- 이상하네, 맞는데? 강원도 포천, 분명히 맞는데?
나도 알고 있다. 인생이라는 무대가 벌이는 깜짝 쇼. 마술이라도 걸린 듯 멍하게 만드는 갑작스런 시간 속. 그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본적 없는 소름끼치는 시간의 반전. 알고 있다.
- 언니도 이상하지 그치? 누가 우리들 놔두고 사기 치는 것 같지, 그치? 몰래카메라 아니야, 이거?
썰렁한 대합실을 둘러보는 그의 얼굴은 금새 장난을 치듯 환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웃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이것이 사기이고 장난이라면 그건 내겐 너무 가혹했다. 결국 나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처음 그 곳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예언 같아 자꾸 몸이 떨렸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으리라, 내 팔 다리를 묶은 시간의 공포(公布).
- 이상하네, 이상해.
눈썹을 씰룩이며 그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쩐지 그의 눈썹은 간밤에 내가 아이에게 그려주었던 눈썹과 닮은 듯 보였다.
다행히 내 앞에 처음 얼굴을 보여준 아이의 모습은 평범했다. 뺨까지 올라와 있다고 생각했던 아이의 입 꼬리는 울먹이느라 뒤틀려 있었을 뿐이었고, 기괴하고 끔찍하다가 생각했던 두 눈은 그저 울먹이느라 찌그러져 있을 뿐이었다. 그런 아이를 나는 어쩌자고 그렇게 두려워했던 건지.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 아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겨우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작은 여자 아이는 내 품에 들어와 ‘앙!’ 울음을 터뜨렸다. 애써 웃는 얼굴로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눈물범벅인 작고 동그란 얼굴을 닦아 주었다. 눈썹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병이라도 앓고 있는지 그저 듬성듬성할 뿐이었다. 주머니에서 리브에게 받았던 눈썹연필을 꺼냈다. 그리고 리브의 말처럼 조심스럽게 손을 놀려 눈썹을 그리기 시작했다. 눈썹 산이 너무 높지 않게, 또 너무 진하지 않게.
두 눈에 눈썹을 모두 그리고 얼굴을 들여다보자, 아이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새로운 눈썹을 단 제 얼굴이 마음에 드는지 아이의 미소는 자꾸 커졌다. ‘여기에도 그려주세요.’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작은 손 위에는 풀어져버린 머리 끈이 올려 있었다. 지푸라기와 흰 천으로 엮은 머리 끈.
망설였다. 흰색이나 검은 색이나 어차피 마찬가지 일 텐데. 그러나 나는 아이의 말대로 바스락거리는 검은 천위에 눈썹연필을 가져갔다. 그리고 정성스레 흰 공간을 채워주었다. 새까맣게 채워진 지저분해진 천 조각을 떠올렸는데, 검은 연필 끝에서 눈이 시린 분홍빛이 쏟아져 나왔다. 어느새 흰 천의 조각들은 분홍색 꽃들이 되어 피었고, 말리 비틀어진 지푸라기는 초록의 싱싱한 줄기가 되었다.
‘아!’ 하고 탄성을 지르는데, 눈앞에 섰던 아이가 물감을 뒤집어 쓴 든 머리끝에서부터 천천히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예뻐진 제 모양이 좋은지 아이는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아이의 발길을 따라 꽃향기가 콧속을 가득 채웠다. ‘호홋, 호홋!’
행복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을 때,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 여자 아이가 맞나?’ 그러고 보니 아이의 머리카락은 짧아져 있었고, 흐릿하던 얼굴 모양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아닌가, 그저 남자 아이처럼 생긴 여자아이일까. 빙글빙글 춤을 추며 웃고 있는 아이 앞에서 내 머릿속의 생각은 또 다시 희미해졌다. 그리고 ‘호홋, 호홋!’ 하는 아이의 웃음소리는 나를 가르치듯 점점 더 커져갔고.
- 왜?
리브는 짙은 눈 화장의 두 눈을 깜빡였다. 분명 닮은 것도 같다. 그 아이, 이 사람.
- 그치, 처음에는 몰랐는데 보면 볼수록 자꾸 쳐다보게 되지? 그 봐, 그 봐, 그게 내 매력이라니까? 첫눈에 이뻐서 금방 질리고 마는 스타일이 아니라, 보면 볼수록 알 수 없이 끌리고 자꾸만 빠져드는 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 호홋, 호홋!
꿈속에 그 아이처럼 그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 여기, 여기 이 광대뼈. 이거, 이거 서양에서는 완전한 부의 상징이라는 거 아니우? 언니는 당연히 모르겠지? 그래서 서양에서 활동하는 동양 모델들이나 동양 연예인들 보면 광대뼈 툭 튀어나오고 눈 쫙 찢어지고, 그게 바로 나라니까! 이 코딱지만 한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하는 국제적 미인! 이너내셔널 뷰리!
- 호홋.
어느새 이번엔 내가 아이처럼 입을 가리며 웃고 있었다.
- 어머, 어머! 언니, 웃을 때는 제발 눈가 주름 신경 쓰면서, 엉? 그리고 썬크림 발랐니, 안 발랐니? 아주아주 흙바닥에 하루 종일 굴러다닌 감자마냥 시커멓게 타가지고서는. 쯧쯧.
그러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화장이 뭉친 그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마다 웃음소리는 자꾸 커졌다.
- 푸하하하!
- 으유, 저 기미, 기미! 잡티, 잡티! 어머머, 다크써클, 다크써클!
- 하하하!
- 으유, 으유, 아주 좋댄다, 그냥! 허!
기가 막힌 듯 리브는 팔짱을 꼈지만, 나는 오랜만에 대합실이 꽝꽝 울리도록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그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너는 가고 싶은 곳이 없느냐 물었을 때, 리브는 ‘바다?’라고 말해놓고 깔깔 웃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건 비아냥거림처럼 들렸을 것이다. 약속이나 한 듯 바다로 몰려가는, 마지막 시간을 지나는 사람들을 그는 이죽거리며 비아냥거렸으니까.
그러나 이번에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어느새 그의 눈썹연필이 내 얼굴에도 눈썹을 그렸던 건지 자꾸 웃음이 샜다. ‘진짜 갈래, 바다?’ 그렇게 다시 물었을 때, 그는 물끄러미 나를 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홍당무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후다닥 매표창구로 가서 표 두 장을 끊어 와서는 다짜고짜 내 팔뚝을 끌었다. 어디로 가느냐 묻지 않았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한번쯤 그를 위한 동행이 되어주고 싶었다. ‘고마워서.’ 라는 생각을 떠올리기는 싫었다. 자존심만 센 고약한 속내가 부끄러웠지만, 끝까지 입을 벌리지는 않았다.
버스는 의정부시외버스터미널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결국 그 곳이 리브가 원하는 곳인 줄 알았는데, 그는 다시 매표창구로 뛰어가 다른 표를 끊어왔다. 버스는 전주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지만, 리브는 또 다시 다른 표 두 장을 들고 나타났다. ‘버스를 또 타?’ 그렇게 묻고 있는 내 앞에 그는 두 볼이 발그레해져 호홋 웃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익산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물론 그 어느 터미널도 내가 찾고 있는 그 곳은 아니었다. 터미널에 내려서니 입구에 노란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그 위에는 의정부에서 익산을 거쳐, 군산으로 가는 직통버스가 개통되었다는 내용이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아무리 어긋나고 틀어지는 것이 여행이라지만, 누군가 우리보다 빠르고 쉽게 이곳에 도착했을 것을 생각하니 왠지 허무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인생이라는 건지.
- 누군데?
전화기에 매달려 있던 그는 ‘파트너’를 찾던 지난번과는 좀 달랐다. 하긴 터미널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그를 보았던 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분홍색으로 친친 휘감았을 그의 모습은 개나리꽃처럼 샛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 누구냐고? 호홋. 음, 내 파트너. 진짜 파트너. 흐흐흐.
자꾸 벌어지는 그의 입은 좀 웃겼다. 무얼 떠올리는지 수염 자국이 덥수룩한 턱 밑은 자꾸 파르르 떨렸다.
- 언니는 그거, 언제야?
- 그거?
파트너이야기를 하며, ‘그거’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왠지 소름 끼쳤다.
- 응, 그거. 음, 첫사랑? 호홋!
커다란 몸을 부르르 떨며 그는 얼굴이 발그레 졌다. 사랑이라는 말이 마법인 건 알고 있지만, 그건 어쩐지 그에게는 이물스럽게 느껴졌다.
- 사랑은 무슨…….
그렇게 말하고 말았지만, 나는 애써 불편한 표정을 감추었다. 그에게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일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TV에 나왔던 연예인은 귀여운 인상의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지만, 그의 곁에는 도무지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도, 여자도, 어느 쪽이든 그에게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 너는 언젠데?
- 나? 호홋, 난 고 삼 때? 호홋.
그는 또 다시 꽃잎처럼 너풀거렸다.
- 누군데?
- 음, 좋은 사람. 좋은 사람이야.
괜히 얼굴이 일그러졌다.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도 말이 없어 이상하더니, 오늘 그는 내가 알고 있는 리브가 아닌 듯 했다. 게다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며 발그레해지는 그의 얼굴은, 미안하지만 그저 기괴했다. 명품들을 휘감을 수 있는 돈 많은 부자라거나, 키가 크고 콧날이 오뚝한 호남 형이라거나, 그도 아니면 섹시한 근육질의 남자를 찾아 호호거려야 평상시의 리브다웠다. 그도 아니면, 도구라도 장만하듯 파트너나 찾아다니고 있다고 떠벌리거나. 게다가 용문에서 만났던 남자들이 떠올라, 당장이라도 그런 건 없다, 소리쳐주고 싶은 마음이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 너 오늘 이상한 거 아니?
선뜩한 목덜미를 견디지 못해 나는 그렇게 물었다.
- 내가? 내가 왜? 내가, 내가 어때서?
- 어떻기는? 너 삶은 홍당무 같아.
- 어머머머! 이 언니 어쩜 비유를 해도 딸기나 복숭아 같은 게 아니고 삶은 홍당무니? 하여간 센스 없고 세련되지 못하기는. 쯧쯧. 못 말려, 못 말려!
팩 토라져서도 그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 왜 좋았는데?
- 응? 왜? 호홋, 왜냐고? 호홋.
그는 또 다시 법석을 떨며 발을 동동 굴렀다.
- 나, 처음이었거든. 호홋.
- 처음?
그러나 좋아 어쩔 줄 모르는 그와는 달리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려지지 않던 이물스런 것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뒤엉키고 있었다.
- 응, 처음. 아유, 아유 어떡해! 아유!
손부채질을 하는 그의 모습이 좀 징그러웠다. 편견이라고 한다면 달리 핑계를 댈 생각은 없었지만, 영락없이 내 머릿속은 새빨간 책 한 페이지였다.
- 아유, 몰라, 몰라, 몰라, 몰라! 꺅, 나 어떡해! 호호호!
펄쩍펄쩍 뛰며 그는 빙글빙글 돌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취객이라도 만난 듯 비켜섰다. 펄럭거리며 그가 지나가고 나면 여지없이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렸지만, 그는 꺅꺅 비명을 질러대며 몸을 떨었다.
- 언니, 이것도 그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색이다? 나, 예쁘지, 예쁘지? 꺅! 어떡해, 어떡해!
탱탱한 얼굴로 뛰어가며 그는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말한 ‘처음’을 떠올리느라 발걸음이 자꾸 느려지고 있었다.
뜨거운 물속에 누워 나는 ‘처음’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리브가 말했던 ‘처음’도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더니, 생각해보니 내 ‘처음’도 마찬가지였다. 내 삶의 처음이란 검은 산과, 틀린 글자의 터미널 간판이 전부였으니 기괴하기는 다를 게 없었고, 지금의 내 남편이 처음 말했던 고백도 ‘사랑한다.’ ‘행복하자.’가 아니라, 그저 ‘같이 살자.’ 였으니 이상하기는 똑같았다.
목적지도 없이, 잠시 다녀오겠다는 내 이야기를 남편은 무엇으로 받아들였을까. 쓸데없이 삶의 마지막을 허비한다, 비난이나 하고 있지 않을까. 쓸모도 없는 두꺼운 책에 빠져 끼니 같은 건 잊어버리고 지내지는 않을까. 또 다른 모양의 불안이 조금씩 부풀었다. 시계를 올려보았다. 버스가 끊어졌으려나? 몸을 씻어내고 타월을 둘렀다. 물기를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곧 돌아가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거짓말을 해야겠다, 하는 생각도 나는 슬그머니 떠올리고 있었다.
버스가 끊어진 터미널은 거대한 항구 같았다. 시멘트 깊숙한 곳에 닻을 내리고 조용히 누군가를 떠나보내기 위해, 혹은 누군가를 데려오기 위하여 푸른 새벽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의 방주(方舟). 괜히 오슬오슬 한기가 느껴졌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해쓱한 얼굴들을 보게 될까, 눈길을 피했다. 괜히 나왔나? 어차피 그에게 해야 할 거짓말들은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이나, 그저 바람이나 쐬러 나왔다는 말이나, 혹은 친구나 아는 동생과 같이 여행 중이라는 이야기나 온통 새빨간 거짓말들 뿐인데.
어느새 꼬깃꼬깃 숨겨놓았던 두려움이 슬그머니 일어섰다. 안되겠다, 돌아가자. 이미 시간이 너무 늦어 버렸으니 그 이도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다. 뒷걸음으로 물러나며 나는 서둘러 모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도로 곁에 세워진 자동차 뒤에 두 개의 다리가 삐죽 새어나온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발을 걸 듯 그건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시간의 덫처럼 두려움이 왈칵 일어섰다.
- 호홋.
웃음소리가 들린 건 그 때였다. 조금씩 꿈틀거리는 두 다리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적막 속에 깊숙이 빠진 노란색 블라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 리브니? 리브야?
그러나 그는 이미 무언가에 흠뻑 젖어있는 듯 했다.
- 어, 언니? 호홋, 우리 언니네? 호홋.
부축하기 위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무엇을 머금었는지 그의 몸은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다시 그를 내려놓고 곁에 쪼그려 앉았다. 그에게서 갖가지 물의 냄새가 진동했다. 술의 냄새, 눈물의 냄새, 그리고 적막이라는 바다의 냄새.
- 언니, 사람이 그렇게 삐딱하게 살면 안 되는 거야. 있어, 분명히 있다고. 언니는 자꾸 없다고 말하는데, 그거……. 그거 분명히 있어. 분명히, 분명히!
없다고 말했던 무수히 많은 것들 중에 어떤 걸 말하는 걸까. 꿈? 아니면, 희망? 그도 아니면 남편이 내게 말했던, 피안? 천국? 벌레처럼 그의 손이 꿈틀거리며 내손을 잡았다.
- 에이, 이봐, 이봐! 전혀, 전혀 감이 안 오잖아! 전혀!
만지작거리던 내 손을 팽개치더니 그는 오른 손으로 자신의 왼손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 처음이었어. 처음. 화장도 하지 않았고, 치마를 입지도 않았고, 여드름이 가득한 얼굴에, 일부러 수염까지 듬성듬성 기르고 있었는데, 처음으로 날, 누나라고 불러줬어. 누나, 그렇게.
희미한 달빛 아래 그는 웃고 있었는데, 물 냄새가 더욱 진동했다.
- 내가 아무리 남자 옷을 입고 남자처럼 보여도 여자로 느껴진다고 했어.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고. 누나는 분명히 자기한테는 여자로 느껴진다고.
어둠 속인데 발그레해지는 그의 두 볼이 보이는 듯 했다. 삶은 홍당무 같은 것이 아니라, 딸기나 복숭아처럼 그렇게 붉은.
- 호홋, 그리고 이렇게… 이렇게 내 손을 잡아줬다?
다시 그의 손이 꼬물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하마터면 ‘미안해.’하고 말할 뻔 했다.
- 그리고 나를 일으켰어. 일으켰는데, 엉겁결에 그 사람 품에 안겼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속삭였어. 누나, 탱고 알아요? 그렇게. 호홋. 그리고 우리 춤췄다? 음악도 없었고, 나는 탱고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우리 같이 그렇게 춤췄어. 짠짠짠, 짠짠짠. 호홋, 호홋.
그는 내 손을 들어 올려 허공 위에 아무렇게나 움직였다. 그의 입에서 익숙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잡은 두 손 위로 물기가 느껴졌다. 새까맸던 밤 풍경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 히히히! 그러니까 있어, 언니! 뭐든지, 있다고 생각하면 있어. 왜 요즘 그렇잖아? 정말 말도 안 되는 황당무계한 일들이 얼마나 많아? 믿기 힘들 정도로 고약하고 끔찍한 일들도 있으니까, 믿기 힘들 정도로 행복하고 감격적인 그런 일들도 분명 있을 거야. 있어, 분명 있어! 호홋!
만났느냐 묻지는 않았다. 그렇게 소름끼치도록 설레는 느낌을 주었던 그 사람을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묻는 것도 쓸모없는 일 같았다.
- 그러니까 언니, 우리 죽지 말자? 백 살, 이백 살까지 살아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서 깜짝 놀랄만한 일들이 벌어지는 그런 거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살아야지, 엉? 등골이 뻐개지도록 행복해지는 그런 느낌, 발바닥에 불이 붙은 것처럼 껑충껑충 뛰고 싶을 만큼 기쁜 그런 느낌, 꼭 만끽하며 살아야지, 엉?
휘청거리며 그는 일어섰다.
- 정말 괜찮은 거니?
휘청거리는 몸 이야기가 아니었다.
- 괜찮아?
- 오케이, 오케이! 암 오케이! 호홋! 자, 가자! 우리 언니 빠쓰인지, 빤쓰인지 거기 찾으러가고, 나는 내 파트너 찾으러 가고! 고고고!
휘청거리며 그는 자연스레 내게 기댔다.
- 우선 개소주나 한바탕 끓여서 나눠먹자, 응? 개소주보다는 사슴피가 직빵이지 않을까? 아유, 근데 그건 정말 아니더라. 살아보겠다고 죽어가는 사슴 목덜미에 빨대 꽂아가지고 쪽쪽 빨아먹는 그 인간들은 정말……. 아유, 아유!
네 발 달린 짐승처럼 우리는 조금씩 어둠 속으로 움직였다. 커다란 그의 가슴 때문에 불편하기는 했는데, 기대고 보니 그의 가슴에 안긴 꼴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그건 남편의 품과 닮아있었다.
- 개소주나 사슴피는 칵테일 같은 걸로 안 나오나? 좀 우아하게 먹으면 안 되는 거야? 와인글라스에 따라서 쨍, 개소주 언더 락이나 트로피칼 사슴피 뭐 이런 거. 그런 걸로 만들면 안 되나?
휘적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빈 어둠 속을 꽝꽝 울렸다. 바짝 다가왔던 어둠은 어느새 멀찌감치 물러났고, 우리는 춤을 추는 사람들처럼 새벽 속을 스텝에 맞춰 걷고 있었다.
'+이정도면호상 > [ 빠쓰정류장 ] 장편 연재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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