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눈썹을 그리는 법
모텔 방으로 돌아온 그는 제일 먼저 거울 앞에 섰다. 비비크림으로는 잡티커버에 한계가 있다며 투덜거렸고, 아이크림을 바르고 자지 않았더니 눈가에 주름이 겹겹이 쌓였다고 한숨을 쉬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경찰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올까 나는 오금이 저리는데, 그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다. 나도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담을 것 없는 작은 가방을 문가에 밀어 놓는데,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졌다. 침묵의 눈이라도 내렸던 것처럼 너무 고요했다.
- 저, 저기…….
어느새 그가 들어갔던 화장실 문이 닫혀있었다. 종이 한 장 같은 얇은 모텔 벽은 숨소리마저 고스란히 들려줄 것 같은데, 그의 투덜거림으로 시끄러웠던 공간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서늘한 생각이 스친 것은 그 때였다. 어쩌면 그는 눈썹을 다듬는 가위를 들고 거부할 수 없는 충동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뾰족한 그것의 날카로움은 짧지만, 목덜미를 찌르거나 동맥을 뜯어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 리, 리브야?
간밤의 일들은 그에게는 분명 너무 혹독했다. 울지 않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는 새처럼 울었던 건지도 모른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날갯짓과 노래로 그는 내내 그렇게 울고 있었던 것인지도.
- 리브야, 문 좀 열어봐! 리브야!
새빨간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그의 몸뚱이가 떠올랐다.
- 리브야!
언제나 알 수 없는 불안은 고스란히 현실로 드러났다. 끔찍하고 두려웠던 것들이 제일 먼저 내 앞에 다가왔다. 어느새 내 목소리는 울부짖고 있었다.
- 리브야, 문 좀 열어! 문 좀 열라고!
그러자 딸깍 문이 열렸다.
- 아이, 참! 라이너 그릴 때에는 집중을 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난리야?
그는 시커멓게 두터워진 눈꺼풀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 왜, 벌써 짭새들이 따라왔어?
그는 문 밖으로 목을 빼며 물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나는 멍청한데, 그는 그런 내 앞에 다시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 없네, 뭐. 언니, 언니, 나 라이너 잘 그렸지? 그치? 내가 라이너 그리는 데는 정말 도사라니까? 이게 너무 힘을 줘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힘을 빼도 안 되고. 너무 천천히 그려도 안 되고, 너무 빨리 그려도 안 되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거든. 그치, 언니가 봐도 예술이지, 그치? 호호호.
그는 눈을 갸름하니 뜨며 연신 깜빡였다. 호홋, 하는 특유의 웃음소리도 잊지 않았다.
버스터미널로 돌아와 우리는 가장 먼저 도착하는 아무 버스나 집어탔다. 우선 경찰들의 눈을 피해 이 마을을 벗어나는 일이 먼저였다. 그러니 버스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버스가 우리를 내려놓은 곳은 용두터미널이었다. 그러나 그 곳은 터미널이라기보다는 어느 시장 통의 입구 같았다. 옛날에는 버스가 들어와 정차했을지도 모르는 안쪽은 ‘우리상회’라는 가게가 까만 먼지를 이고 굳게 잠겼고, 빈 공간의 한 가운데에는 너무 큰 드럼통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리브는 ‘한밭슈퍼’라는 간판 앞에 한참을 섰다. 그러고는 이내 큰 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 이봐, 이봐! 여긴 용두라는 곳인데 왜 한밭 슈퍼냐고? 한밭은 대전이라는 말 아니야? 그치, 언니? 맞지, 맞지? 그럼 한밭슈퍼가 아니라 용두슈퍼라야 하는 거 아니냐고! 용두슈퍼가 아니라 한밭슈퍼라고 해서 팔 걸 안 팔아, 그렇다고 슈퍼가 아니고 목욕탕이나 이발소 같은 거야? 못된 인종들! 좋겠네? 지들은 용문에서 태어난 용문슈퍼나 용문파출소 같은 거여서. 퉷!
이해할 수 없는 노래와 춤으로 털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는 간밤의 일들을 또 다시 곱씹고 있는 모양이었다.
- 언니, 나 어때?
화장실에서 나온 리브는 내 앞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홍천터미널에 도착해서 여기저기 군복을 입은 젊은 사내들이 보이자,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며 화장실로 들어가고 난 후였다.
- 어때? 좀 영하고 큐트 해 보이지, 그치? 호홋.
그러나 허리까지 딱 달라붙은 청바지에 밑이 짧은 분홍색 점퍼는 칠팔십년 대의 다방 여종업원을 떠올리게 했다.
- 언니, 언니. 나 저 오빠들하고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저 오빠들 아까부터 나한테 자꾸 눈길을 주고, 눈짓을 하고. 호홋, 뻔해, 뻔해. 내가 말했잖아, 언니. 내가 연하에게 좀 먹히는 얼굴이라고. 호홋. 갔다 올게.
리브는 엉덩이를 잔뜩 뒤로 빼고는 종종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제복을 입은 군인들은 주춤거리며 물러나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길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맥이 빠졌다. 여기에서도 나는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일 뿐인 건지. 나는 또 다시 내가 원하지 않는, 내가 모르는 공간 속으로 끌려와 있었다.
- 언니, 언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리브는 키가 작은 군인 한 명을 끌고 내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처럼 그의 얼굴에는 새빨간 여드름이 가득했다.
- 언니, 이 오빠가 거기 안대!
- 저 오빠 아니에요.
그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 어머머, 그럼 언닌가? 호호호. 오빠 나 키만 컸지, 아직 어리다? 직장 생활을 일찍 시작해서 성숙해서 그런 거지, 나 그렇게 나이 안 많아? 이 오빠, 참 사람 보는 눈 없으시다. 호홋.
그는 몸을 베베 꼬며 군인의 팔짱을 슬쩍 꼈다.
- 그럼 민증 깔까? 근데 오빤 군인이라 민증 없지? 호홋, 사실 나도 민증 없거든.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같은 처진 거지. 동병상련, 이심전심,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그럼 나는 님? 오빠는 뽕? 호호호.
피곤한 얼굴의 나를 세워두고 그의 이야기는 또 다시 엉뚱한 곳으로 빠져들었다.
- 거기라니?
- 맞다! 거기 언니, 거기! 그치 오빠? 오빠가 거기 본 적 있다고 했지, 그치?
- 아, 까맣게 탄 산등성이 이야기를 하길래요. 포탄 사격장이 있는 데는 원래 산들이 그렇게 새까맣게 그을려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이야기한 건데.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장막처럼 기억 속의 검은 산등성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 정말 거긴 산들이 검은가요?
- 네, 맨날 포를 사격하니까 까맣게 타고 그러죠.
그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리브의 팔을 자신의 팔꿈치에서 빼냈다.
- 그 봐, 맞지 언니? 그치?
리브는 호들갑스럽게 떠들며 다시 팔짱을 꼈다. 검은 산이 아니라, 검게 그을린 산? 그러고 보니 그 날 지축을 흔드는 굉음 때문에 귀를 막았던 것도 같고. 그렇다, 그래서 엄마가 내게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들이 들리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에 묻어두었는지도 몰랐던 기억들이 불쑥 솟아올랐다.
- 어디, 어디죠, 거기?
- 제가 가는 곳은 전곡인데……. 포천 위에 전곡이요.
그는 또 다시 팔꿈치를 밀어내며 덧붙였다.
- 이 오빠가 우리 거기까지 안내해 준덴다? 그치 오빠? 호홋.
- 뭐 어차피 그리로 가기는 하는데…….
그는 그렇게 말을 흐려놓고 저만치 물러섰다. 그러고는 도망이라도 치듯 몇몇 동료 군인들과 함께 승강장 쪽으로 뛰었다.
- 언니, 언니, 빨리 표 끊어가지고 와! 내가 저 오빠들 잡아놓을게. 빨리!
리브는 그렇게 말해놓고는 종종 걸음으로 뛰어갔다. 지갑을 들고 일어서는데 현기중이 일었다. 머릿속에서 엉켜있던 기억이 쿵쿵 소리를 내며 하나로 겹쳤다가, 다시 흩어졌다. 그 때, 악악거리며 입간판 옆을 뛰고 있을 때,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던 것 같기도 했다. 도와주려는 그의 손길을 나는 바보처럼 물어뜯었던 것 같기도 하고. 흐릿한 기억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 눈가는 촉촉하게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현리터미널과 일동터미널과 포천터미널을 지났다. 현리터미널은 장터 근처였고, 일동터미널은 도로 근처였고, 포천터미널은 도심지 한복판이었다.
어느 때부턴가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는데, 그게 통증이 아니라 설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동두천터미널 근처를 지날 때였다. 이제 어쩌면 내가 떠나왔던 그 곳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설렘. 나를 버린 그녀를 만나게 된다면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말을 할 수 있게 될 거라는 설렘. 그리고 나는 이제야 비로소 내 생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마무리하며 눈을 감게 될지도 모른다는 설렘.
- 언니, 언니! 저기 봐, 저기!
고함소리에 고개를 들었을 때, 리브는 제복을 입은 군인들 틈바구니에서 창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는데, 촉촉해진 눈 가 때문에 눈앞이 흐려졌다. 태양은 등 뒤에 있는데 어디서 빛이 들어오는지 눈이 부셨다. 있었다. 그의 말대로 그곳에 검은 산들이 있었다. 높은 등성이들이 어느 식구들의 새까만 속인지, 여기저기 검은 흔적들로 뒤덮였다.
- 맞지, 언니? 저기 맞지? 그렇지?
그의 고함소리는 버스 안을 꽝꽝 울렸다. 맞나? 저기가 맞나? 나는 고개를 죽 빼 검은 산들 주위를 살폈다. 내가 앉아있던 자리, 내가 울던 모퉁이, 내 옆에서 돌아가던 틀린 글자의 입간판까지.
- 그치, 찾은 거지! 그치 언니!
그러나 없었다. 검게 그을린 산들 밑에는 기다란 밭이랑이 늘어져 있을 뿐, 어디에도 기억 속 입간판 같은 것 보이지 않았다.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릴 무렵, 버스는 천천히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눈앞에 보이던 검은 산들이 조금씩 멀어졌다. 어딘가를 향해 달음박질치던 심장도 조금씩 느려졌다. 기억의 근처에서 멀어지듯 촉촉했던 눈가도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버스는 우리를 전곡터미널에 내려놓았다. 혹시 어느 모퉁이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입간판이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렸지만, 먼지가 낀 넓은 터미널 안에는 사연 많은 얼굴의 사람들뿐이었다. 다른 터미널은 없느냐 기사에게 물었지만, 시내버스가 서는 작은 터미널이 있긴 한데, 그것도 이 근처라고 했다. 정류장이 아닌 곳에 사람들을 내려주는 읍내버스가 조금 더 북쪽으로 가기는 했지만, 그건 겨우 마을 외곽일 뿐이었다. 여전히 나는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없는 사람이었고, 여기는 그저 희망의 근처일 뿐이었다.
익숙한 냄새가 난 건 여드름이 난 군인을 따라 리브가 터미널 바깥으로 뛰어나가고 난 후였다. 매캐하게 나를 환각시키는 기억의 냄새.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검은 산처럼, 쿵쿵 울리던 굉음처럼 불쑥 내 안에서 솟아올랐다.
고개를 드니 곁에 누군가 와 앉았다.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커다란 짐 보따리 하나를 그녀는 아이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겁먹은 아이의 목덜미를 품어 안고 있듯 그녀의 팔꿈치는 단단했다. 여자가 나를 쳐다봤다. 사연 많은 눈을 알겠는지, 그녀의 눈빛도 흔들렸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 모습이 조금 어색했다. 립스틱만 급하게 바른 민낯이어서 였을까. 그녀의 이마 언저리가 조금 허전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두 눈 위에 눈썹이 없었다.
- 한 대 줄까요?
내 앞에 내밀어진 담배 끝에는 립스틱 자국이 선명했다.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아들었다. 한 모금 깊게 빨았다. 두려움을 지워내듯 내 입술은 조급했다.
- 늦었죠?
담배 연기 때문인지 탁한 그녀의 목소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 네?
- 이미 늦은 거야. 다들 너무 늦어버린 거야. 돌아가긴 틀렸어. 가고 싶어도 더 이상 갈 수 없어. 그렇죠?
너무 갑작스런 물음에,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 한 모금에 머릿속은 혼미해졌다. 분명히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여전히 담배를 문 채였다. 그냥 흰 피부라고만 생각했는데, 어떤 공포에 질렸는지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 아유, 졸라 빠르네. 아유, 힘들어!
얼마나 달음박질을 했는지 리브의 온 얼굴에는 땀이 범벅이었다.
- 아니 누가 잡아먹어? 귀엽게 생겨서 좀 이뻐 해 주려고 그랬더니만 무슨 사자를 만났니, 호랑이를 만났니? 그 짧은 다리로 다다다다 달리는데, 아유 난 무슨 이봉조 탄생한 줄 알았다니깐?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리브는 나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두드렸다.
- 맞나, 이봉조? 이봉주인가? 어쨌든 봉다리인데? 어, 언니 담배 끊었다면서?
그는 내 손 안에 혼자 타들어가는 담배를 가리켰다. 발갛게 묻은 립스틱 자국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필터에는 아무런 자국도 남아있지 않았다.
- 내 가방은 언제 뒤졌대? 언니, 사생활 침해 몰라, 사생활 침해?
자신의 손가방을 뒤적이며 그는 투덜거렸다. 짧은 머리의 여자가 앉았던 자리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어린아이를 닮은 커다란 짐 꾸러미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았고,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기억 속 말도 희미해졌다. 리브는 멍한 나를 바라보며 또 다시 투덜거렸다. 그러나 나는 들고 있던 담배를 내려놓지 못했다. 흰 연기를 뿜으며 그것은 끝까지 하얗게 타들어갔고, 끝내 나는 어디에서도 그 여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 날 밤, 전곡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나는 리브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 어머머, 세상에, 세상에!
리브는 손바닥을 연신 부딪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 어머 언니 그거 신 내리는 거 아니니? 언니 무당 되는 거 아니야? 조상들 중에 어렸을 때 죽었거나, 아니면 언니 어떤 남자랑 놀아나다가 애 뗀 적 있니? 그건 영락없이 귀신 쓰인 건데. 어머, 어쩜!
그러나 여지없이 그의 이야기는 엉뚱한 데로 흘렀다. 하지만 화가 나거나 괜히 털어놓았다 후회 같은 건 없었다. 처음부터 그에게 어떤 이해나 위로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건 구토 같은 것이었다. 생각의 명치끝을 꽉 틀어막은 것을 단번에 쏟아놓고 마는.
- 그럼 유명한 무당 만나서 살풀이를 해야 하는 거라던데. 그리고 신 내림도 받고. 아니다, 언니, 내 가방 좀 줘봐.
침대 위에서 호들갑을 떨던 그는 머리맡에 자신의 가방을 끌어 당겨 열었다. 그러고는 작은 화장품 가방에서 무언가를 뒤적뒤적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 언니, 이거.
커다란 그의 손을 내려 보니 거기에는 길쭉한 연필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건 눈썹연필이었다.
- 뭐니, 이게?
- 지금 살풀이를 할 수도 없고, 신 내림을 받을 수도 없으니까 언니가 해결해야지, 뭐. 그건 분명히 동자귀신 같은 걸 거야. 그러니까 언니가 그걸 가지고 가서 걔 얼굴에 눈썹을 그려줘. 걔 눈썹이 없었다면서? 그러니까 눈썹을 그려주고 걔 마음을 얻는 거야. 그렇게 걔를 언니 신으로 받아들이는 거지. 그럼 신 내림까지는 아니더라도 뭐 그 비슷한 게 되는 거 아닐까? 왜 케이블 TV에서 보니까 신 내림 같은 거 받을 때 무슨 원한을 풀어준다던가, 위로를 해준다던가, 그러잖아? 그러니까 괜찮아지지 않을까? 자!
리브는 내 손 안에 눈썹연필을 우겨 넣었다.
- 근데 제대로 그려야 된다?
그는 밀사를 준비하는 독립군처럼 비장한 눈빛으로 내게 속삭였다.
- 눈썹 산이 너무 높으면 사람이 사나와 보이니까 너무 높지 않게 조금만, 조금만 올려서. 그리고 눈썹이 너무 진하면 가면을 뒤집어 쓴 것 같은 화장이 되니까 눈의 라인과 균형을 맞춰가며 너무 길지 않고 또 너무 짧지 않게 자연스럽게, 알았지? 괜히 그려준다고 시작했다가 얼굴에 떡칠 해놔서 동자귀신 열 받게 하지 말고!
그 표정이 얼마나 진지한지 퍽 웃음이 터졌다.
- 어머, 이 언니 웃어? 귀신에 잘못 놀아나면 삼 대가 망가지는 수가 있는 거랬어, 언니?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엉? 괜히 같이 다니는 나까지 피해보게 하지 말고, 엉?
그의 눈썹 그리는 법에 대한 이야기는 그러고도 한참을 이어졌다. 눈썹 그리는 법에 대한 것 뿐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피부 톤을 표현하는 법, 민낯처럼 보이는 화장법, 아이라인을 잘 그리는 법, 립 라인을 그리는 법 등에 대해서도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떠벌렸다. 물론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가 쥐어준 눈썹연필을 손에 꼭 쥐고 잠자리에 누웠다. 또 다시 꿈속에 아이를 만나면, 이번에는 아이에게 눈썹을 그려 주리라 생각하면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반드시 아이를 돌려세워 아이의 얼굴을 마주하리라 다짐하면서. <9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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