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금화다방
죄책감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의 길을 갔던 것이고, 나는 내 길을 갔던 것뿐이다. 양평의 근처에서 우리의 길은 갈라졌다. 같은 시간 속에, 똑같은 공간 속에 공존하는 서로 다른 방향의 여행.
누구든 만나고 헤어진다.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난다. 길은 엇갈리고 미소는 달라진다. 슬픔을 건너가면, 다른 길속에서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 시간은 쉽게 내가 지나온 발자국을 지운다. 죄책감이란, 어리석게도 지나온 발자국을 따라 뒤로 걷는 일. 소용없다. 이미 시간은 그 곳에 없다. 우리의 여행이란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혼자 오셨어요?
여자는 작은 쟁반을 들고 삐딱하게 섰다. 그러나 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풀이라도 붙은 것처럼 찰싹 들러붙었다.
- 혼자 오셨냐고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금화다방이라는 입구의 두 글자가 그녀의 등 뒤에서 선명했다. 딸랑 방울소리가 들리며 지상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열렸다. 남자들 서넛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아무도 혼자가 아니었다.
- 아줌마! 혼자냐고요!
- 물 좀…… 물 좀 줄래요?
- 아이, 참. 뭐야, 귀머거린 줄 알았잖아? 씨.
여자는 투덜거리며 돌아섰다. 혼자일까.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을까. 목이 탔다. 여자는 금새 물 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녀가 건넨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음껏 물을 들이켰는데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 커피 드려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다른 여종업원들과 귓속말을 나누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딸랑 다시 방울이 울렸다. 또 다시 지상에서 남자들이 들어왔다. 익숙한 목소리로 그들은 킥킥거렸다. 그들을 따라 들어온 또 한 사람의 목소리는 더욱 익숙했다.
- 어머, 언니!
작은 공간은 둘러볼 필요도 없이 한 눈에 들어왔다. 리브는 함께 들어온 남자들을 다른 테이블에 세워두고 망설임 없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맞다. 우리의 여행이란 멈출 수 없다. 그와 나는 또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엇갈리며 만났다. 여기, 우리가 만난 이 곳의 시간은, ‘금화다방’이라고 부른다.
- 만나야하는 사람 있다며?
죄책감을 지우느라 지레 목소리가 높아졌다.
- 아까 전화했더니 여섯시가 넘어야 끝난데. 그러니까 여기서 아까 그 친절한 오빠들하고 잠깐 이야기하며 시간 보내자, 응?
그러나 그들의 웃음소리를 나는 똑똑히 기억했다. 내 곁에 서서 리브의 당혹스러움을 같이 구경하던 그들의 모습. ‘같은 남자끼리 뭐 어때?’ 라고 말하던 그들의 목소리, 알고 있다.
- 그 오빠들이 아까 나 구해줬단 말이야. 그 오빠들 아니었으면 그 놈들한테 내가 어떤 봉변을 당했을지 언니가 알아? 막 치마를 들치고, 가슴도 만지고. 으유, 못된 새끼들, 어린 것들이 그래도 예쁜 건 알아가지고, 흥!
팔짱을 끼며 리브는 턱을 치켜들었다.
- 이봐, 이봐. 여기, 여기 다 찢어지고 까지고 그랬잖아? 저 오빠들이 백마 탄 왕자님들처럼 쨘 하고 나타난 거야. 그러니까 얼마나 고마워, 언니? 언니도 언니가 힘들 때 누가 쨘 하고 나타나면 굉장히 고맙고 그렇잖아, 응? 그러니까 우리 저 친절한 오빠들하고 같이 이야기하고 밥 먹고 그러다가, 나중에 만나러 가자, 응? 저 오빠들이 여기 가이드도 해주고 그런다고 그랬어? 가이드가 뭔지는 알지?
리브는 샛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 아까 그렇게 일을 당하고도 모르니? 애들이라고 믿고 만만히 보다가 큰 코 다쳐놓고도 또 다시 사람들을 그렇게 무턱대고 믿는 거야? 세상에 좋은 사람이 어딨니? 자기한테 먼저 좋은지 아닌지 다 따지고 나서야, 겨우 배시시 웃어주는 게 세상 사람인데, 고마워하고 감사해야하는 좋은 사람 같은 게 어딨어?
자꾸 얼굴이 붉어졌다. 나도 어쩌면 그에게 용기를 빌려 썼는지 모른다. 나 혼자의 힘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런 여행을 위해 그의 무모함을 도용했던 건지도.
- 어머머, 언니! 세상을 그렇게 살면 안 되지. 그런 거 다 따지고 그러면 피곤해서 어떻게 살아? 그렇게 쓸데없는 것까지 다 생각하고 사니까 언니 피부가 그렇게 찌들었지, 에이그, 에이그!
리브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 그 사람들 좋은 사람 아니야.
- 언니가 어떻게 알아?
나도 그들 옆에 구경하고 서 있었다,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보면 알아. 좋은 사람들 아니야.
- 우리 언니, 돗자리라도 까셨나? 그걸 어떻게 알아?
리브의 얼굴을 봤다. 그런 일을 당하고 났으면 지금쯤 어디서 펑펑 울고 있거나, 태생을 탓하며 가슴을 쥐어뜯었을 텐데, 어디에서도 인간에 대한 환멸 같은 것, 세상에 대한 적개심 같은 것 상상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쩌자고 인생이라는 여행이 저렇게 즐겁기만 한 건지. 누구보다 굴곡 많았을 시간의 길 위에 어쩜 저렇게 경쾌할 수 있는지.
- 나, 갈게.
온 힘을 다 해 나는 귀환을 선언했다. 다 필요 없다. 돌아가는 일만이 지금 내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그래, 알았어. 그럼 가자. 내가 가방 가지고 나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그는 그렇게 말해놓고는 총총 계단참으로 사라졌다. 귀환이나, 회한 같은 거, 그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여행을 되돌아보거나, 아쉬워하는 시간의 길 같은 거, 그에게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그는 사라졌다. 나는 그를 기다렸다. 여전히 그의 말과 나의 말은 어긋났지만, 이제 나는 도망치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처음 깨닫고 있었다.
똑똑, 똑똑.
여전히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멈춰선 뒷모습은 금방이라도 뒤를 돌아볼 것 같았다. 눈썹이 없는 눈을 다시 보게 될까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런데 마찬가지였다.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릴 것 같은 아이의 모습이 눈앞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아이의 얼굴은 지워지지 않았다.
아이의 뒷모습이 조금씩 움직였다.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똑똑, 똑똑. 새하얀 것이 고운 모래사장이거나, 보드라운 구름 위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뒷모습이 다가올 때마다 어딘가 딱딱한 곳에 부딪히는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똑똑, 똑똑.
- 저리 가! 따라오지 말라고, 저리가라고!
두 손을 휘저으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얀 색의 허공은 안개 속 같았다. 어디에든 금방이라도 몸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를 따라오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똑똑, 똑똑. 돌아보니 아이는 뒷모습으로 내게 뛰어오고 있었다. 뒷걸음인데도 아이의 뜀박질은 내 것보다 훨씬 빨랐다. 지푸라기와 흰 삼베 끈으로 엮인 갈래머리가 덜렁거리며 내 등 뒤로 바짝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긴 목이 돌아가 눈썹이 없는 아이의 얼굴이 보일 듯 했다. 똑똑, 똑똑.
- 안 돼, 저리 가! 저리 가!
그러나 둔탁한 아이의 발걸음소리는 이미 내 뒷덜미까지 다가왔다. 서늘한 기운이 목덜미를 차갑게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아이의 목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사를 조이듯 목덜미만 나를 향해 천천히. 똑똑, 똑똑.
- 악!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도 귓가에는 여전히 아이의 발걸음 소리가 또렷했다. 똑똑, 똑똑. 환청을 막으려고 황급히 귀를 틀어막았는데,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던 리브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 음, 누구지? 오빠야?
휘청거리며 그는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건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만나야할 사람이 일이 늦게 끝난다고 하더니 이제야 찾아온 모양이었다. 온 몸을 옥죄었던 공포가 갑자기 풀어졌다.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기댔다. 낯선 사람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긴장 같은 것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악몽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모종의 감사를 떠올렸다.
- 이제 일이 끝난 거야? 치사하게 하루 종일 튕기고,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악!
리브는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을 밀치고 들어온 것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 잠깐 파출소까지 같이 좀 가시죠?
- 어머머, 이 아저씨 봐?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어머머!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리브의 말 같은 건 들을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몸부림치는 그와, 공포에 흠뻑 젖어있던 나를 막무가내로 끌어냈다. 나는 아무렇게나 그들에게 몸을 맡겼다. 어쨌든 뒷모습으로 내게 달려오던 아이는 아니었으니, 그것만으로 내겐 충분했다.
교복을 벗고 있었지만, 중년 여자의 뒤에 숨은 아이는 분명 터미널에서 보았던 그 아이였다. 졸지에 성추행 범으로 몰린 리브는 어이없다는 듯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혔지만, 아이가 내민 휴대폰 속의 사진들은 아이의 증언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양 옆에 붙어선 여자 아이들의 어깨에 올린 손은 공교롭게도 어깨 아래로 늘어져 가슴께를 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아이가 말 한대로 만지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자신의 치마를 들쳐 보이는 사진이나, 남자 아이들의 볼에 뽀뽀 하는 시늉의 사진들은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증거였다.
여자아이의 엄마는 강력한 처벌을 원했다. 게다가 화장도 하지 않은 채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에다가 원피스 하나만 간신히 걸친 채 끌려나온 리브는 영락없이 여자 옷을 훔쳐 입고 다니는 정신이상자처럼 보였다.
- 그러니까 일단 이름하고 주민번호를 대라고요.
경찰은 벌써 몇 번째 리브를 다그치고 있었다.
- 어머, 이 아저씨, 정말 몇 번을 말해? 아직 안 바꿔서 그런 거 없다고 했잖아요?
- 원래 이름하고 주민번호가 있을 거 아니냐고?
- 몰라요, 모른다고요! 난 그런 거 다 잊어버리고 살았어요. 내 이름도 아니고, 내 주민번호도 아닌데 내가 왜 그걸 기억하면서 살아야 돼? 내 참, 기가 막혀서, 흥!
- 이봐, 지금 당신은 성추행 혐의로 여기 잡혀와 있는 거야, 알아? 당신 범죄기록 속에 그런 기록이 있으면 어떡할 거냐고? 당신은 지금 아니라고 잡아떼지만, 누가 알아?
경찰은 어깨를 으쓱했다.
- 그리고 객관적으로 봐도 그래. 당신 지금 그 꼴이 절대 그런 사람들이라고는 보이지가 않아. 나도 알거든.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나도 알 건 다 알아. 그 사람들에게도 인권이 있고, 보호 받아야할 권리가 있는 거지. 알아, 알고 있어. 근데 그 사람들은 당신처럼 안 생겼어?
- 어머, 지금 사람 생긴 거 가지고 트집 잡는 거예요? 아저씨도 사람처럼 안 생겼어요! 겉으로 보면 설치류나 양서류에 가깝지 포유류로는 절대 안 보인다고요!
리브는 경찰관의 얼굴을 가리켰다. 쥐 상의 남자는 인중을 씰룩거리며 눈을 부릅떴다. 화를 삭이려는 듯 쌕쌕 낮은 숨을 쉬었다.
- 그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생각하자는 거야, 객관적으로. 당신도 거울 있으면 봐봐, 그 얼굴하며, 턱밑에, 다리에 털 수북이 난 거하며, 당신 영락없이 여자 옷이나 훔치러 다니는 변태로 밖에는 안 보여? 그러니 저 아이 엄마가 성추행 범이라는 생각을 안 하겠어?
- 어머, 이 아저씨가 자꾸? 같은 여자끼리 무슨 추행을 했다고 그러는 거냐고요!
리브는 이제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 호적 안 바꿨다면서? 그럼 남자지, 여잔가?
- 어머머, 그럼 나는 호적 바꿀 때까지 법의 보호도 못 받고 산단 말예요?
- 아, 남자로 법의 보호를 받고 사시면 돼지. 호적을 못 바꿨으면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럼 그 때까지는 남자로 법의 보호를 받으며 사시고, 호적 바꾼 다음에 여자로 보호를 받든 말든 그건 마음대로 하시고. 그러니까 일단 주민번호하고 이름을 대라고요. 남자 주민번호하고 남자 이름.
- 아니, 누가 나한테 남자 호적을 달라고 했어요, 왜 내가 원하지도 않는 것들을 나한테 씌워놓고 그것에 맞춰 살라고 하는 거냐고요!
리브도 이를 악물며 파르르 일어섰다. 그러나 경찰관도 지지 않았다.
- 아니, 그럼 태어날 때부터 젖먹이들 의향까지 물어보고 성별을 확인하란 말이야, 뭐야? 달렸는지 안 달렸는지 그것만 가지고 판단을 하지, 누가 그 머릿속이 어떤지 그것까지 들여다보고 판단을 하는 의사가 어딨어?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 객관적으로. 당신 태어날 때 달렸어, 안 달렸어?
그의 이야기는 점점 악다구니가 되어가고 있었다.
- 말해 봐요, 있었어, 없었어? 있었지? 그럼 지금이야 어쨌든 그 때는 남자였던 거 아니냐고? 지금 수술을 했으니 호적을 바꿨어야하는데, 바꾸지 못했다면 또 무슨 이유가 있을 거 아냐? 그 뭐냐, 티비에 나오는 그…… 그 사람, 바꿨어, 못 바꿨어? 바꿔서 결혼까지 했지? 근데 당신은 안 바꿨으면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 이유가 뭔데? 이유가 뭐야?
조곤조곤 따지는 경찰의 얼굴은 어쩐지 징그러웠다. 리브는 더 이상 입을 벌리지 못했다. 아마도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독립투사나, 잔다르크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 그 봐, 뭔가 구린 게 있어, 당신!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딱 나와!
경찰은 이미 다 알겠다는 듯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리브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경찰이 말했던 이유도, 그들이 알고 싶어 하는 남자 주민번호와 이름도 리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였는지.
- 뭐야, 뭐하는 거요, 지금?
리브는 어느새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경찰의 얼굴을 똑똑히 정면으로 응시한 채였다. 좀 전처럼 당혹스러워하거나, 울분을 토해내던 눈빛 같은 건 아니었다. 뜨거운 것을 토해내려는 듯 그의 얼굴이 한껏 부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입이 벌어졌다.
- 아저씨, 탱고 알아요?
갑작스런 그의 이야기에 작은 공간 안에 각자의 생각에 사로 잡혔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봤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쥐 상인 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 뭐래는 거야, 지금?
그러나 그의 물음과는 상관없이, 리브는 한쪽 팔을 높게 쳐들었다. 목덜미를 주욱 빼, 고개를 잔뜩 치켜들었다. 눈을 지그시 감더니, 그는 다른 손으로 원피스 자락을 옆으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슬리퍼를 신은 뒤꿈치를 살짝 들어올렸다. 허공을 딛은 것처럼 발끝으로 몸을 들어 올린 채, 그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라…… 라라라, 라라라라 라라라라. 라라…….
그의 입에서 악기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는 그 소리를 따라 흘러가듯 움직였다. 사람들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도 했고, 서류가 잔뜩 쌓여있는 테이블 주위를 돌기도 했고, 겁먹은 채 엄마 뒤에 숨은 아이 앞에서 격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그리고 허리춤에 손을 올린 쥐 상의 경찰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손을 끌어 잡았다.
- 뭐야, 왜 이래?
- 라라라 라라, 라라라…… 라라!
그가 경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른 손으로 경찰의 손을 잡아 허공에 찍어놓고, 그를 끌어 당겼다. 질질 끌리듯 움직이던 경찰은 짐짝을 던지듯 리브를 밀쳤다. 커다란 리브의 몸뚱이는 책상 위에 서류들을 끌어안으며 바닥에 팽개쳐졌다.
- 당신 미쳤어?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경찰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는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리브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다시 손을 허공 속에 들어 올리고, 원피스 치마 자락을 손끝으로 그러모았다. 그리고 또 다시 테이블 사이를, 사람들 사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는 여전히 악기 같은 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 저 자식이 지금 장난을 하나?
경찰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손에 들었던 볼펜을 책상 위에 던졌다. 그러나 리브는 또 다시 멀뚱히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손짓으로 쓸어내리며 그들의 주위를 돌고, 다시 돌고, 다시 돌았다.
- 허, 이 자식이? 뭐해, 저 자식 끌어다가 유치장에 처 넣어버려!
참고 참았던 욕지기가 그의 입에서 비어져 나왔다. 앳된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들 둘이 춤을 추는 리브의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는 몸부림을 쳐, 두 사람의 손아귀를 뿌리쳤다. 그러고는 이내 사람들을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원피스를 예쁘게 들어 올려 무릎을 구부렸다. 무대에서 내려가듯 그는 두 사람에게 붙들려 작은 문 안으로 끌려갔다. 끌려가면서도 그는 쥐 상의 경찰에게 찡긋 윙크를 했다. 작은 파출소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손 키스를 하나씩 하나씩 날렸다.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새 작은 공간 안의 모든 사람들은 박수를 치기라도 할 것처럼 기립해 있었다.
당신도 여자가 맞느냐, 쥐 상의 경찰이 그렇게 물었을 때, 하마터면 ‘여자가 아니라 아줌마다!’ 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여자니, 남자니 따지고 있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남의 꼬리를 갉아먹는 쥐 꼴 같았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리브와 경찰이 작은 문 안으로 사라지고 난 뒤, 작은 파출소 안은 관객들이 빠져나간 객석처럼 공허했다. 나는 혼자서 객석 가운데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불이 꺼진 무대를 바라보며 있지도 않은 앙코르 공연을 기다리는 열혈 관객처럼. 끝난 것을 인정하지 못해 무희들의 커튼콜이라도 억지스레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처음 그를 만났을 때에도 그는 탱고를 아느냐고 물었다. 알고 있다, 탱고라는 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건, 그 때 그가 보여주었던 그런 춤이 전부였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쓰였던 음악들. 쓰러질 듯, 부러질 듯 남자의 손길에 의지해 움직이던 여자 무희들의 고혹적인 몸짓. 열정이나, 사랑이라고 그 춤을 누군가 설명했던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그저 남세스러운 짓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던 그 춤.
그런데 좀 전에 그가 보여주었던 건 좀 달랐다. 그저 인상적인 악기 소리에 맞춰 끊어지듯 움직이는 것이 탱고라는 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리브가 오늘 보여주었던 건 조금 느렸고, 부드러웠다. 그래선지, 더 우울했고, 처절했다. 그의 몸짓이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나, 지그시 감은 눈빛의 표정까지, 그건 내가 알고 있는 탱고와는 분명 달랐다.
하지만, 왜 갑자기 그런 춤을? ‘미친 거 아냐?’ 라고 소리치던 경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말 그런 건 아닐까, 내가 걱정스러우면서도, 또한 그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정이라도 쌓인 건지, 대놓고 그를 정신병자 취급하는 경찰들에게 곱게 눈이 떠지지 않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던 것은 까맣게 어두워진 무대 위로 아이의 뒷모습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적막하고 고요한 공간이 평화롭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뒷모습은 무대 천장 위에서 뚝 떨어졌다. 그리고 내 앞에 그가 있었다. 성별을 알 수 없는 그였다.
- 언니, 언니?
리브가 피곤한 얼굴로 나를 내려 봤다.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정체를 납득시키는데 성공한 것일까.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을 마무리하기 위해 그는 또 어떤 노래를 불렀고, 또 어떤 춤을 추었을까. 그들은 그를 끌어안고 기꺼이 춤을 추어주었을까, 아니면 이번에도 끊어질 듯 이어지는 혼자만의 춤이었을까.
- 어떻게…….
- 쉿!
그는 손가락으로 내 입을 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파출소 안의 책상들은 텅 비어 있었다. 공연이 끝난 걸까. 무대 위가 어두워진 뒤 누군가 저 문에서 나와 소품들을 모두 치워가게 되어 있는 것처럼 작은 공간은 그저 적막했다. 리브는 천천히 내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심스럽게 유리문 쪽으로 다가갔다. 엉성하게 몸을 구부리며 나는 그를 따랐다. 순간 마법처럼 딸깍 불이 꺼졌다. 고개를 드니 리브가 문 옆에 서 있었다. 빨리 오라는 그의 손짓은 유리문을 붙들고 다급했다.
- 빨리 와, 빨리.
입 모양만으로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를 따라가는 발걸음이 괜히 급해졌다. 유리문 밖은 연기 속처럼 뿌옇게 흐렸다. 안개가 끼었을까. 그렇다고 생각하기에 공기는 너무 메말랐다. 그렇다면 이 뿌연 것은 안개가 아니고 무엇일까. 리브는 종종걸음으로 뿌연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발밑이 보드랍게 느껴졌다. ‘밤’이라는 시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여긴 어딜까. 내가 믿고 있는 그 곳이 아닌 걸까.
- 호홋, 호홋.
뿌연 어둠 속에서 리브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웃음소리가 번지는 물감 같은 것도 아닌데, 어느새 내 입 꼬리도 슬며시 올라갔다. 나는 조금씩 두 다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내 발걸음은 뜀박질이 되었다. 똑똑, 똑똑. 내 발 걸음소리가 새벽녘의 공기에 튕겨 여기저기 울려 퍼졌다. 분명히 발을 디디고 있는 건 둔탁한 소리가 나지 않는 좁은 흙바닥이었는데, 환청처럼 발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똑똑, 똑똑. 고개를 들었다. 밤 속으로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봤다. 그가 자꾸 뒤를 돌아봐 내게 손짓했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떠올랐다. 갑작스레 떠오른 두려움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리는 줄 알았는데, 두 다리는 날아가듯 움직이고 있었다. 여긴 어딜까. 이곳이 어디기에 내게서 이런 두려움을 지웠을까. 새벽안개에 쌓인 마을 풍경을 둘러봤다. 호홋, 호홋. 그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어느새 물감처럼 내 얼굴 위에도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맞다, 기억났다.
이곳은 용문이라는 자그만 소읍, 양평의 근처였다. <8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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