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가방을 머리에 쓴 시인
며칠 째, 내 눈을 피하며 말이 없던 남편은 아침 일찍 카메라를 들고 집을 나섰다. 어디를 간다 말은 없었다. 카메라를 든 그에게는 목적지가 없었다. 문 밖이 목적지다,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농담인 것 같기도 했고, 진담인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그가 찍어온 사진들을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예쁘고 기분 좋아지는 것들도 많은데 왜, 맨 날 이런 걸 찍으러 다녀?’
그의 사진 속에 있는 건 하나같이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사람이 없는 버려진 의자이거나, 기울어진 나무문이거나, 주인을 잃은 자전거이거나, 깨져 도드라진 도로의 블록이거나. 그 때 그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예뻐지라고. 너희들도 이렇게 누군가의 사진 속에 담기고 있으니, 언제나 예뻐지라고.’
그의 꿈이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마다 나는 깜짝깜짝 놀란다. 그리고 시인이 되지 못한 남편을 위해 카메라 하나를 사 준 일은 참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곤 한다. 그가 시인의 꿈을 버렸는지, 아니면 아직도 그 꿈을 간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은 분명 시인을 닮았다. 그렇다면 그는 오늘 어떤 시를 쓰려고 거리로 나간 걸까. 얼마나 예쁜 것들을 담아와, 어떤 시들을 내게 들려주려고.
- 그래서 지난여름에 수도세가 팔만원이 나와 부렀다니께. 호호.
언제나 그랬듯 그녀의 웃음은 힘찼다. 하루에도 두 번씩 세탁기를 돌려야하는 일상에 관해 말하던 중이었다. 아들 둘을 키우는 생활이 얼마나 부산스럽고 정신없는지, 그녀는 한탄 반, 웃음 반 마구 쏟아냈다.
- 시영이 아빠는 잘 지내지?
- 그냥, 저냥 그렇죠, 뭐. 근데 언니. 이 인간이 요즘은 내가 어디다가 돈을 쓰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그러대요? 내가 어디 엄한데 돈을 썼을까봐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죠, 언니?
샛눈을 뜨며 그녀는 이를 앙 물었다.
- 시영이 시원이 처음 가졌을 때에는 집 한 채라도 떡 하니 내 앞에 가져다놓을 것처럼 유세드만, 요즘은 내가 애를 뱄는지 말았는지 영 관심도 없고.
그녀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 언니, 글쎄 내가 이번에 임신했다고 이 인간한테 말했을 때 뭐랬는 줄 알어요?
대답 없이 나는 그저 빙긋 웃었다.
- 여보, 나 임신이래. 이랬더니, 갑자기 펄쩍 뛰면서, 누가, 누가? 사색이 되어가지고 그러는데? 허이고, 언제는 펄쩍 뛰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더니, 이제는 사색이 되어가지고 나는 그런 일 없다, 시침 뚝 떼려고 하는데……. 허이고, 내가 기가 맥혀서. 그 놈의 화상, 화상, 으이그.
부른 그녀의 배를 슬쩍 넘겨보았다.
- 똥물을 퍼부어도 시원찮을 인간, 딸내미 하나 갖고 싶다고 밤마다 옆구리를 찌른 것이 누군디? 허이고, 똥통에 빠져 뒤질 것.
억울한 사람처럼 그녀는 무릎을 쳤다.
- 잘 지내지, 다들?
- 잘 지내다 뿐이요? 밖에 나가서 빈하다 소리 들을까봐 있는 거 없는 거 다 해맥여 놨더니, 요즘은 또 배나왔다고 살 뺀다고 자전거 사내라고 얼매나 징징대던지. 또 그 인간이 말하는 자전거는 뭔 놈의 것이 그리 비싼지, 요즘 인터넷 가입하면 주는 그런 자전거랑은 또 완전 차원이 다르더만요?
- 훗, 잘 지내나 보네, 다들.
- 하이고, 말도 마쇼. 영락없는 애 셋이요. 이거 사내라 저거 사내라,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밥 달라, 물 달라. 아, 참! 맞네, 맞네. 가끔 밤마다 젖도 달라는 것을 보면 영락없이 맞네, 맞어. 히히히.
까르르 웃으며 그녀의 몸은 활처럼 휘어졌다. 만삭의 몸인데도 그녀는 조금도 위태롭거나 힘겨워 보이지 않았다.
- 워메, 워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어 부렀네. 언니, 나 그만 가볼라요. 우리 새끼들 유치원에서 올 때가 되었네. 밥 맥여야지. 덩치 큰 아들놈 들어오면 젖도 맥이고. 히히히.
낄낄거리며 웃는 그녀의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 언니, 언제가 되었든 주말에 한 번 형부하고 다 같이 아귀찜이나 먹으러 가요, 예? 요즘 들어 이상하게 그게 자꾸 먹고 싶대? 거기 목포항 앞에 아귀찜 잘하는 데 있잖아요? 언제 거그서 우리 맛난 점심 한번 먹고 옵시다, 잉? 바람도 쐬고 맛난 것도 먹고. 요즘 거기 길이 잘 뚫려서 여그서 목포까지 사십 분이면 갑디다. 그러니까 이참에 거그가서 점심 먹고 바다도 보고 그라믄 딱 좋을 것 같은디, 그죠?
그러나 쉽게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야기한 ‘주말에 한 번’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 근데 언니, 보약 좀 해 묵으쇼.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것이……. 우리 조만간 창주엄마랑 다 같이 몸보신 하러 갑시다, 잉? 꼭이요?
번쩍 손을 들며 그녀는 황급히 문을 나섰다. 불러오는 배 때문에 여전히 그녀의 허리는 뒤로 휘어졌지만, 그런데도 걸음걸이는 전혀 위태롭지 않았다.
- 그래, 그러자.
그러나 이미 그녀는 문 밖으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 올 해가 가기 전에, 꼭.
멍하니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내다보며 어느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꼭. 주말에 한 번 꼭.
적은 소자본으로 가장 실패할 확률이 적은 것이 치킨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가게를 계약했었다. 그 때, 남편과 나에게 욕심은 없었다. 회사에서 받은 퇴직금과 보상금으로 가게를 마련했으니, 그저 그곳에서 받는 월급 정도의 수입이면 족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해, 운이 좋다면 가게에 딸린 쪽방에서 나와 임대 아파트라도 하나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 기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시작 앞에 꿈을 꾸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니, 우리도 꿈을 꾸었던 건 당연했다. 그 때 우리가 떠올렸던 꿈이란 것이 희망을 닮았던 건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그 즈음 남편과 나는 설레어 자주 잠을 설쳤다.
그러나 그런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 물류를 공급하겠다던 가맹점에서 겨우 한 달 물건을 공급하고 소식을 끊었을 때, 우리는 배신감에 주저앉기 보다는 담담하게 거짓으로 드러난 희망을 받아들였다. 항상 그래왔다. 희망의 얼굴은 언제나 우리 앞에 새빨갰다. 그러나 가맹점에서 이야기했던 기대 수익이 예상과는 너무 동떨어지고, 길 건너편에 깔끔한 인테리어를 가진 대기업 체인의 치킨전문점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현실이 두려웠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소원하며 살지 않았는지, 발버둥 쳐 봤자 소용없는 삶은 아닌지. 빈 테이블에 마주앉아 공포에 질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런 생각들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흐르는 물줄기에도 길이 있듯이, 우린 처음부터 길 밖에서 살아야하는 그런 삶인 건 아닌지.
남편은 오후 늦게 돌아왔다. 분명히 카메라를 가지고 나갔는데, 그는 빈손이었다. 가게에 들어와서도 그는 내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TV는 허공에 매달려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고, 그 밑에 앉아 나는 시영이 엄마가 사라진 골목을 멍하니 내다봤다. 남편은 건너편 테이블에 걸터앉아 벼룩 같은 글씨가 뒤엉킨 정보지를 뒤적였다.
오늘은 어떤 시를 보여줄까. 예쁜 것들의 사진도 없이 그는 오늘 어떤 시를 말해줄까. 물끄러미 남편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방안으로 들어가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 작아.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 작아, 안 들어 가.
그의 침묵이 하고 싶은 말이란 결국 희망이겠지만, 그는 나만큼이나 희망을 불신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쪽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 오빠, 안 들어 가! 안 들어간다고!
가방의 입은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져 지퍼 끝부분이 틀어졌다. 시영이 엄마의 지인을 통해 구입한 것이었지만, 그건 중가브랜드의 로고를 어설프게 흉내 낸 가품이었다.
- 소용없어, 안 들어가!
가방을 뺏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뿌리쳤다. 서랍장에서 옷을 꺼내 있는 대로 가방 안에 우겨 넣었다. 작은 화장대 위에 놓은 화장품들도 한꺼번에 쓸어 담았다.
- 익!
남편은 가방의 지퍼를 움켜쥐고 이를 앙 물었다. 벌어진 양쪽 끝을 찢어내듯 잡아 당겼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마구 우겨넣은 것들은 당장이라도 가방을 뚫고 튀어나올 듯 했다.
- 작아, 작다고, 오빠!
가방을 빼앗으려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아예 내게서 등을 돌려 버렸다. 지퍼를 끌어당기는 그의 손가락에 시뻘겋게 피가 몰렸다. 번들거리며 그의 목덜미에 땀이 찼다.
- 이러지마, 이러지마 오빠!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아예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가방을 마구 짓밟기 시작했다.
- 익, 익!
의족에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그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부서진 장난감처럼 그의 바짓단 속에서 낡은 의족이 덜커덕 벗어졌다. 그러자 그는 아예 의족을 집어 들어, 벌어진 가방을 마구 내리쳤다.
- 익, 익! 으아!
결국 그는 그것들을 방구석에 팽개쳤다. 화장품 병이 깨졌는지 패배한 생물처럼 가방의 벌어진 입에서 누런 액체가 흘러 나왔다. 비명을 지르고 돌아앉은 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울음을 집어 삼키는지 그의 숨소리가 탁해졌다.
처음부터 말했어야 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똑똑히 일러주었어야 했다. 당신이 매달리고 있는 그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가짜라고. 처음부터 다른 것으로 만들어진, 겉모습만 그럴 듯한 가짜라고.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침묵의 말 같은 건 할 줄 몰랐다. 어떻게든 위로를 해주고 싶었지만, 언제나 그의 언어는 너무 어려웠다.
왜 그는 시인이 되지 못했을까. 가난한 사람은 시인이 될 수 없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내게도 변변한 꿈이 없었다. 엄마를 기다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현실과 싸우며 사춘기 시절을 보냈고. 그 시절, 갖고 싶던 것들이 바로 꿈인 거라면, 내 꿈이란 나를 둘러싼 가족과, 친구들과, 가족들 사진이 걸려 있는 내 방과, 아침마다 갈아 신고 나갈 수 있는 깨끗한 신발들이었다. 남편에게는 무수히 많은 책들이 꿈이었을 것이고, 책들이 꽂혀 있는 자신의 방 하나가 꿈이었을 것이고, 언제든 책 속에 빠져들 수 있는, 절대 방해받지 않는 고요한 시간이 꿈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시인이 되지 못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꿈이란 것이 껍질을 까야하는 열매 같은 것이라면 남편에게는 껍질을 벗겨내는 일은 고사하고, 나무 밑에서 물끄러미 열매를 바라보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을 테니까.
남편을 따라 병원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의 손에는 입이 벌어진 가방이 들려 있었다. 한 쪽 주머니에는 돈이 든 봉투가 들어 있었다. 카메라를 팔아 급히 마련한 돈이었다. 예쁜 것들을 담아 시를 줍는 대신 그는 만 원짜리 몇 장을 담아 돌아왔다. 그것마저 예뻐지라고 카메라 대신 가지고 온 건지는 모르지만, 그 날의 시는 예쁘지 않고, 그저 아픈 시였다.
- 어디 가?
그러나 그는 말이 없었다.
- 어디 가게?
- 그냥……. 잠깐 며칠 만.
6인용 병실은 환자들 여섯을 위한 공간일 뿐이지, 보호자들까지 열 두 명의 공간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선지 남편은 병실에 들어와, 옆 침대의 보호자와 계속 부딪히는 스스로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 며칠? 어디 가는데?
- 올 거야, 금방.
- 시 쓰러 가?
갑작스런 시 이야기에 남편은 물끄러미 나를 봤다.
- 오빠 원래 그랬잖아. 잠깐 다녀온다고 하고는 사라져서 저기 사람 안 보이는 구석에 가서 뭐 쓰고 그랬잖아. 내가 모르는 줄 알았어?
그는 또 말이 없었다. 아니다. 어쩌면 남편이 말을 하는 유일한 시간은 이렇게 침묵을 지키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고요한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을 무수히 많은 언어.
- 뭐라고 안 그럴게. 우리 주제에 무슨 그 따위 것들을 쓰고 앉았느냐고 그런 소리 안 할게.
남편의 고개가 푹 꺾어졌다.
- 여기서 그냥 써. 여기, 여기.
나는 부러 좁은 침대 옆으로 물러나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 다녀올게. 검사하고 치료 시작하기 전까지는 올 거야.
남편은 황급히 몸을 움직여 병실을 나섰다.
- 오빠, 오빠?
그러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낡은 의족 때문인지 그의 걸음걸이가 유독 위태로워보였다.
잠자리가 바뀌어선지 잠은 오지 않았다. 6인용 병실에 뒤척이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고통을 참아내는 그들의 낮은 신음소리는 더욱 끔찍한 것들을 떠오르게 했다. 조용히 복도로 나왔다. 불이 꺼진 복도는 어둠 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두려웠다. 문 밖이나, 안쪽이나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때였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콧속으로 스몄다. 담배 냄새였다. 누군가 복도 끝에서 담배를 태우는지 보이지 않는 연기가 그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오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무언가를 쓰던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어쩌면 그건 바람인지도 모른다. 그 곳에 그가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 오빠야?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믿고 나니 두려움은 훨씬 덜했다. 성큼성큼 연기가 나는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나는 동굴처럼 새까만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맡는 담배 냄새는 향기처럼 나를 끌어 당겼고, 보이지 않는 생각 속의 환상은 두려움을 지웠다.
그런데 거기, 너무 어둡다.
순간, 하얀 얼굴 하나가 새까만 어둠 속에서 둥실 떴다.
- 악!
얼굴을 감싸 쥐며 털썩 주저앉았다. 심판의 소리처럼 기이한 목소리가 기다란 복도를 왕왕 울렸다.
- 어머, 언니?
그건 여전히 변조에 실패한 목소리였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다. 담배 갑을 쥐고 있는 그의 손톱은 깨져 있었다. 매니큐어를 지우는 법을 배우지 못했는지, 덜 지워진 분홍색 매니큐어는 색깔의 때처럼 손톱 구석에 뭉개져 있었다. 얼굴 화장도 지우다 말았는지 턱 밑이며 목덜미에 분가루가 덕지덕지 엉겼다.
- 어머, 그럼 언니도 암 걸렸구나?
담배 개비를 받아들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건 마치 감기에 걸렸느냐고 묻는 말투이거나, 무좀이 있느냐는 비아냥거림을 닮았다.
- 와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 에이, 요즘 암이 무슨 병인가? 항암제도 좋아져서 웬만하면 다 낫는다는데?
또 다시 어깨를 으쓱. 목이 탔다. 들고 있던 담배 연기의 환각이 간절했다.
- 뭐 말기라면 약이니 수술이니 소용없는 일이겠지만. 그럼 깨끗이 물러나 주는 거지 뭐. 추잡스럽게 버둥거리며 사느니 보다는 깨끗하게 두 손 들어주는 거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추잡하다’라는 이야기에 목구멍 속으로 악 소리가 저절로 고였다.
- 빵하고 쏘면, 끽 죽어주는 거지, 까짓 거!
그는 항복한 사람처럼 두 손을 번쩍 들었다.
- 그나마 언니는 암이라도 걸렸지, 나는 환자도 아닌데 여기 이렇게 갇혀 있는 거잖아? 우리 아빠가 여기 꼰대하고 친구거든. 나를 정신병원에 보내니 마니 그러다가 여기에 처박아 넣더라고.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 자식이 정신병원에 있는 건 쪽팔리니까 우아하고 고상하게 시한부 인생을 가진 환자로 만들어서 가둬 놓은 거지. 흑, 내 피부가 원래 창백해 보일 정도로 투명해서 사람들이 깜빡 속아 넘어가기는 하지만.
열여덟 소녀인 양, 그는 두 볼을 감싸 쥐었다.
- 언니는 내 맘 이해하지? 소수자의 삶이란 이렇게 고단하고 힘겨운 것이거늘, 무수히 많은 편견과 싸우며 이겨내야만 살아낼 수 있는 이 비참하고 안타까운 현실. 흑흑흑.
허공을 향해 손을 뻗던 그는 복도 바닥에 그대로 엎어져 통곡하는 사람의 흉내를 냈다. 그러다가 고개를 휙 뒤로 돌렸다.
- 언니, 나 예쁘지?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은 희번덕거렸다. 그런데도 그는 속눈썹이 도드라진 눈을 깜빡이며 계속 물었다.
- 정말 우아하지 않아? 지적이고 고상하고. 그치, 그치?
그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 여자가 섹시함만 가지고 있으면 안 되지. 섹시도 지성과 어울려야 그게 아름다운 거지,
한껏 턱을 치켜들고 가슴을 죽 내밀었다. 환자복 사이로 드러난 가슴은 수염이 난 턱과 따로 놀았다. 잘못 맞추어진 퍼즐처럼 그건 기괴했다.
- 내 장담하지. 요즘의 트랜드가 섹시지만, 금방 그건 시들해질 거라고. 이제부터는 지성과 섹시가 결합해서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야만 진정한 섹시함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올 거라고. 그러면 나처럼 숨겨진 보석 같은 미인들이 각광을 받는 시대가 올 거야.
그는 팔꿈치를 움직여 만들어진 가슴을 끌어 모았다.
- 꿀벅지? 가슴골? 흥, 이제 그건 식상해질 거야. 인텔리젼스! 바로 그거지, 그거. 지성! 우후, 지성!
그의 목소리는 빈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언니라고 불러도 돼지?’ 라고 물었을 때 고개를 저어야했던 것일까. ‘아잉, 언니!’ 하며 호호호 웃었을 때, 지난 번 화장실에서 소리를 질렀던 일이 미안하니까, 하는 생각을 말아야했을까. 그냥 그대로 일어서버리고 싶었다. 더 이상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견디기 힘든 이물감.
- 그렇다고 너무 지적이기만 하면 곤란하지. 그 누구냐, 책 쓰는 그 언니는 아유, 그건 너무 심하더라. 그건 당당한 거라기보다는 뻔뻔스러운 거지, 원. 그래도 기본적인 섹시함은 가지고 있어 줘야하는 거지. 암, 암!
크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문득 내게 고개를 돌렸다.
- 맞다, 암! 근데 언니는 어디야?
그의 물음을 이해하지 못해 내 눈빛은 멍청했다. 자세히 보니 그의 화장은 지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물기에 뭉개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암 걸린 데가 어디냐고? 어디, 위? 폐? 아니면 가슴? 아니면…… 거기? 호홋.
담배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잠시 말이 지워진 사이, 그의 눈빛이 내 몸을 훑어가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 게다가 그렇게 말해놓고 웃어버리다니. 내 안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이 중국 화약처럼 팍팍 터졌다.
- 호홋, 아유 병이라는 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더 심각해지는 거야, 언니. 이렇게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응? 즐겁게 깔깔깔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응? 호호호.
그는 커다란 어깨를 들썩였다. 처음 만났던 그 때처럼, 춤이라도 추는 모양이었다. 겨우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너무 심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건 너무 혹독하고 혐오스럽다. 단순히 잔인한 현실, 이라고 받아들이기에 이건 너무 끔찍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돌아서면 그만이다. 눈물이든, 비명이든, 그에게는 추잡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깔깔깔 웃으며 지나야하는데 고작 쓸데없는 법석이 될 것이다. 무릎을 폈다. 두드려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 몸이 욱신욱신 아파왔다.
- 어디 가?
그건 시간을 포개놓은 듯 익숙한 말투였다.
- 저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질질 짜려고 그러지?
환청이라도 들은 것일까? 천천히 그를 봤다. 팔짱을 끼고 모퉁이에 앉은 그는 새까만 어둠 속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 원래 그러잖아? 그깟 것도 자존심이고 쪽팔림이라고 남들 앞에서는 울지도 못하고 구석에 처박혀 질질 짜는 거. 내가 모르는 줄 알았어?
어디서 나와 남편의 대화를 엿들었을까? 이죽거리는 그 표정은 영락없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듯 했다.
- 여기서 울어. 여기, 여기! 내가 귀 막고 못 들은 척 할게. 자!
엉덩이를 움직여 그는 옆으로 물러났다. 탁탁 바닥을 치는 손은 어떤 문이라도 두드리는 듯 복도를 꽝꽝 울렸다. 바닥이 쪼개지며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환상 때문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미 내가 두려워했던 그 어둠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그 한 복판에.
- 언니, 얼마나 살아?
들고 있던 담배 개비가 손 안에서 뭉개졌다.
- 얼마나 사냐고? 한 달? 두 달?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 아니면 육 개월? 일 년?
어느 물속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 언니,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는 물었다.
- 원래 다들 그러잖아? 이젠 끝이구나, 하고 나면 돌아가고 싶은 그런 데가 떠오르잖아? 죽음을 앞 둔 마지막 여행 같은 거, 제가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광어인지, 연어인지, 물고기 새끼들이 하는 짓 같은 그런 거. 호홋. 언니는 그런 거 없어?
그는 또 다시 킥킥거리며 물었다. 마구 소리를 질러주어야 하는데, 네깟 것들이 어디 그런 삶을 알기나 하느냐, 아무렇게나 삶을 낭비하고 있는 너희 같은 것들에게 어디 그런 말이나 할 자격이 있느냐 악다구니를 써야하는데,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축축하게 고여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어떤 물줄기에 휩쓸려 나도 모르는 곳으로 떠내려갈 것만 같았다.
- 언니, 오늘 나랑 도망칠래?
밀어를 전하듯 그는 속삭였다. 하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내 대신 희미하게 흔들렸던 복도의 등불 하나가 팍 터지며 꺼졌을 뿐. 그렇게 그와 나는 새까만 어둠 속에 갇혀버렸다. 정말 그건 끔찍한 속이었다. <5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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