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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리 생존중/[글로발로 걷다] 세계여행

떠나기도 전 그리워지는 바라나시




글 : 김 황


여행시기 2013. 6. 3 ~ 6. 6




# 계획한 여행루트에 비해 일정이 촉박하다보니 한 여행지에서 그렇게 오래 머물수는 없는 처지다. 한 도시를 방문하면 평균 사흘에서 닷새 정도를 머무르게 되는데, 나의 경우 그 정도 시간이면 대개 큰 미련 없이 머물렀던 도시를 뒤로 하고 다음 여행지로 떠날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다른 여행자들과의 헤어짐이 아쉽게 느껴졌던 적은 종종 있었지만 여행지 자체의 매력 때문에 그 곳을 떠나기 싫었던 적은 지금까지 없었다. 단 한 곳, 인도의 바라나시를 제외하면 말이다.

아직 초보여행자 티를 벗어나지 못한 나로서는 인도 여행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인도에서 여행자들이 겪은 각종 고초들과 사건사고 소식을 전해들으면서 인도는 내 여행의 1차 난관이 되리라 확신했다.(1) 네팔에서 인도로 넘어가기 전에 단단히 각오를 하고 국경을 넘는다. 덥고 비좁고 불편하며 시끄럽기까지한 로컬버스를 타고 20시간을 달린 끝에 내 발이 닿은 곳은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그 첫인상은...."명불허전 인도"랄까. 오물투성이인 길거리와 후세포를 자극하는 그 지린내라니. 인도 특유의 난잡함과 혼돈속에서 그들만의 질서와 행동양식을 구축한 인도인들의 모습을 보며 걷고있자니 ‘내가 인도에 오긴 왔구나’ 실감이 난다.



# 바라나시의 첫인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자. 바라나시에 처음 도착했던 그 날 아침에 본 갠지스강은 ‘똥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 대체 뭘 보고 이게 신성한 강이란 거냐? 그 똥물에 몸을 씻는 인도인들의 모습을 보며 “하여튼 종교란게 무서운거야....”라고 혀를 끌끌 찼더랬다. 바라나시의 어지러운 뒷골목은 또 어떤가? 나같은 길치&방향치에겐 짜증나는 미로인데다가 무지하게 더럽기까지 하다. 아아, 소똥이 사방에 널린 이 뒷골목을 맨발로 지나가는 강한 멘탈의 인도인들이여, 당신들은 대체 어느 혹성에서 왔나요? 게다가 밖에만 나가면 왜 이렇게 내게 관심을 갖는 애들이 많은지. 뭐? 헤.이.마.이.프.렌.드?? 왜 내가 니 친구냐고!! 제발 나 좀 그냥 가만히 놔둬줄래? 아니, 다 필요없어!! 제발 이 살인적인 더위만 좀 어떻게 해줘!!(2)

이렇게나 나를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요소로 가득찬 것처럼 보였던 바라나시. 하지만 놀랍게도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서서히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기 시작했다. 갠지스강을 바라볼 때면 점점 마음이 푸근해져 감을 느꼈고, 비좁은 뒷골목을 헤집고 다닐 때면 골목골목에 녹아있는 사람들의 생활상에 슬며시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내게 관심을 표하는 인도인들을 귀찮다고 무시해버리기보단 조금씩 어울려보고 싶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무더위도 슬슬 적응이 되기 시작해 제법 견딜만해졌다. 불과 며칠만에 모든 것들이 처음과 다르게 느껴진다. 주위로부터 몸을 사리던 내 몸과 마음도 따라서 서서히 무장해제 되어갔고, 바라나시의 풍경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 애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 나는 바라나시를 떠났다.(3)




여행이 매력적인 이유는 여행지에 새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풍경, 처음 먹는 음식, 처음 듣는 언어...낯섦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여행지를 찾는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것들이 점차 익숙해질수록 여행지의 매력은 대개 반감되기 마련이고, 그럼 또 다음 여행지를 찾게된다. 하지만 바라나시는 조금 달랐다. 내가 바라나시를 떠날 때 특별히 내 관심을 끌만한 새로운 요소가 그 곳에 남아있었던가? 갠지스강은 지난 며칠간 수십 번도 넘게 강가를 따라 오르내리며 질리도록 봤다. 소문난 근처의 맛집도 웬만큼은 발도장을 찍었고, (항상 길을 잃었던 탓에 본의 아니게)바라나시 뒷골목 구석구석도 훑어봤다. 더 이상 전혀 새로운건 없는데, 바라나시는 내게 하루하루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익숙할수록 더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곳. 처음과는 다른 시선으로 또 다른 바라나시 여행을 시작하려는 참인데, 나는 허무하게 이별을 고해야 했다.

아쉽다. 참을 수 없이 아쉽다. 바라나시를 떠나기 싫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이 곳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머무른다면 틀림없이 사랑하게 되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다. 떠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립다. 역사보다, 전통보다, 전설보다 오래된 도시 바라나시.(4) 장담컨대, 이곳을 언젠가 다시 한 번 찾게 되리라.

바라나시를 떠나는 기차를 타기 직전, 마지막으로 라씨(5)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단골집을 찾았다. 이 집의 새콤달콤하고 걸쭉한 라씨는 마시면 마실수록 더 맛있는 마법의 음료. 항상 말없이 찾아와서 한 잔 마신 뒤 돈만 내고 조용히 사라졌지만 이번엔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인사를 건넸다ㅡ“니 라씨가 바라나시 최고야!!” 주인장은 기분좋게 웃는다. 이 사람은 내가 지난 나흘간 아침저녁으로 왔었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 한국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라씨집을 찾았을 때 한국인 여행자가 벽에 남겨놓은 메모를 봤다. 이런 메모를 남길 수 있을 정도로 바라나시에 정을 준 그 여행자가 어찌나 부러운지. 모르긴 몰라도 그가 짧지 않은 시간동안 바라나시에 머물렀으리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갠지스 더럽다 욕하지 마요
누군가에겐 어머니요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이요
누군가에겐 신의 흔적이요
나에겐 추억입니다





(1) 2차 난관 : 여행 인프라가 열악하고 치안이 불안한 아프리카, 3차 난관 : 전국민이 단합하여 펼치는 사기극이 나라의 자랑인 이집트, 4차 난관 :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남미.
(2) 인도에는 3계절이 있다. 덥다, 많이 덥다, 최고 덥다. 그리고 내가 인도를 찾은 6월이 바로 최고 더운 시기. 연일 40~5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 아래에서 “서울 오늘 30도..불볕더위 기승” 따위의 인터넷 기사를 읽을 땐 실소가 절로 나왔다. 허허, 귀엽네.
(3) 바라나시에서 머문 기간은 나흘. 원래는 더 길게 일정을 잡았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바라나시 일정을 대폭 줄여야만 했다. 하여튼 여행이란게 맘대로 되는게 아니다.
(4) "Varanasi is older than history, older than tradition, older even than legend, and looks twice as old as all of them put together" ㅡ Mark Twain
(5) 인도식 전통 요구르트. 집집마다, 지역마다 그 맛에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