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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리 생존중/[ 껍데기는 가라 ] 건축

규모의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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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을 가려면 일단 차를 사야된다. 백화점 탐방 같은 장거리여행을 준비함에 있어 - 가방따위 무거운 짐은 차에 던져두고 - 최대한 가벼운 차림을 갖추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에는 뚱뚱한 패딩이 대단한 유행을 탔지만, 백화점을 즐길 줄 아는 진정한 멋쟁이들은 겨울에도 반팔패션을 고집한다.

여름 무렵에야 한결 낫지만, 가을·겨울철 날이 쌀쌀하다고 긴팔옷을 입거나 등에 가방이라도 지고 가면 낭패를 보기 쉽다. 이따금씩 겁없이 완전 무장을 갖추고 백화점을 방문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예외 없이 엘리베이터에 오른 듯한 답답함을 경험하고서야 반팔의 교훈을 얻는다. 등에서는 땀이 베어나오고 얼굴에는 촌병걸린 사람처럼 홍조가 이는, 무자비한 백화점의 가르침.

붐비는 사람들이 유난히 부담스럽고, 공기는 후텁지근하다. 평소보다 아이고다리가왜이리무거운데 자꾸 바지는 달라붙고, 신발양발 짜증이 나는데 딱 잡아 뭐라 혼내 줄 사람이 없다. 으아아아앙. 내가 해 봐서 아는데, 삼십분의 백화점 유랑은 행군훈련 두세시간에 견줄만한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유발한다. 그러니 대한의 건아들이여! 백화점에는 아빠차를 가져가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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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각주:1]를 파니까 돈은 많이 벌겠지. 아무렴 전기값은 충분히 벌겠지. 그러니까 겨울에도 땀이 나도록, 따숩은 바람을 훗후 불겠지. 다 틀어막고 창문 하나 안내고도 눈부시게 등불을 켜는 거겠지. 일층에서 칠층까지 쉬지도 않는 자동 계단을 굴리는 거겠지. 에스컬레이트아!

이제 시스템 에어컨만 넣으면 끗.


춥으면 라지에타 · 훈풍을 틀면 되고, 더우면 에어컨을 돌리면 되니까, 건축이 쉬워졌다. 적당히 예쁜 모양이 만들어지면, 가로로 썰어서 기둥을 넣고, 껍데기를 두르면 대충 뭐가 된다. 오장육부를 기계로 채워 넣고, 매끈하게 얼굴과 몸매를 다듬으면 ‘럭셔리 + 명품 + 디자인 + 랜드마크’가 완성되는 것이다.


완벽하다. ‘아빠차의 문제’를 뺀다면 말이다. 빌딩 안에 돌아다닐 공기나 물을 다루는 방법이 크고 굵직한 - 시스템에어컨 같은 - 이야기가 되면서, 건축의 작은 문제들은 무시되거나 튕겨나간다. 예를 들자면, ‘겨울에 실내에 들어오면서 외투까지 다 걸치고 오는 인간’이나, ‘거대에어컨을 돌리면서 나오는 (차가운 바람보다 더 많은) 열’과 같은 것 들.

최근 인기를 모은 영화의 원작 ,은 아니지만, 납뜩이[각주:2]가 나오지 않는 버전의 건축학개론[각주:3]에는 울타리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울타리는 시선 · 움직임의 차단, 그늘주기, 바람막이, 영역나누기, 활동을 구별하기 위한 표지 따위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건물은 인간과 (그리고 자연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그리고 그 관계는 문화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입장에서 건물을 이해할 수 있다.“[각주:4]

울타리 하나에도 이토록 다양한 역할이 있을 수 있기?없기? 있기! 울타리를 걷고, 이것을 홈-시큐리티 어쩌고 하는 걸로 바꾸면 도둑걱정을 줄일 수는 있겠지. 대신 울타리가 가진 다른 역할을 싹- 밀어 치우면서 또 다른 ‘아빠차의 문제’가 불거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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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신경쓰면 좋을 것 같은데, 네모지게 꽉 닫힌 콘크리트 덩어리를 만든다. 덥다고 에어컨을 달고, 어둡다고 불을 킨다. 사람들은 꼼짝없이 인큐베이터에 갇힌 꼴이 된다.

때로는 계단이 너무 높거나 낮고, 화장실까지 가는 길이 복잡하거나 너무 길다. 건물이 넓을수록 길을 잃는 일도 많아진다. 실내온도는 27도에 맞추어져 있는데 추웠다가 더웠다가, 내가 너무 변덕스러운가 싶을 정도로 자꾸만 엇갈린다.

인간척도 / 르꼬르뷔지에


이것은 단순히 춥다/덥다, 밝다/어둡다 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씨 아빠 오늘 출근하셔야 되는데 차는 어쩌지?’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규모의 문제다. 사람은 고작해야 백센치, 이백센치 하는데, 우리는 밀리미터 단위로 보고 듣고 생각하는데, 집은 몇십미터 몇백미터 하다 보니 놓치게 되는, 규모의 문제다.

작은공간과 큰공간은 각각의 매력과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꼭 크다고 다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적정규모의 공간이 있는데 자꾸 크게크게 만들어서 나를 땀나게 만들고 촌놈으로 만드니까 터트리는 불만이다.

너무 크다 보니까 일하는 사람 한 둘은 까먹는다. 비싼 돈 부어서 대리석까지 눈부시게 깔아놓고는, 조립식 판넬 갖다 붙여 계단밑에 휴게실을 만든다. 로비는 이렇게 넓은데 건물 밖으로 가야 나무무늬 시멘트 벤치에 앉을 수 있다.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각주:5]



  1. (百貨 : 백가지 상품) [본문으로]
  2.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인 듯. 인기 검색에 자꾸 나오길래) [본문으로]
  3. (제임스 C. 스나이더 & 안토니 J. 캐터니즈) [본문으로]
  4. (1991년판 30쪽 내용. 글이 어려워서 살짝 고침) [본문으로]
  5. ('블랑카'와 '사장님 나빠요'를 모르면 한번쯤 찾아보시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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