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한 곳으로 쏠려 있는 것들이 많다. 디자인만 해도 그렇다. "이것은 이래야 하고 저것은 저래야 한다"는 고정 관념들이 많은 편이다. 물론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오랜 시간 "그냥, 그래왔으니까"라는 식의 관례적인 것들도 많다. 그 중에서도 "색"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 한번 이야기 해보려 한다.
'옥상 물탱크는 모두 파랗다'
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은 건물 5층에 있다. 건물이 높은 편이라 대부분의 주변 저층주택 옥상들이 내 시야에 들어오곤 하는데 하루는 창문을 열다 바라본 바깥 풍경이 '정말 재미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집집마다 올려 놓은 "파란 물탱크"가 너무 뻔해 보였다고 할까.
'한치 예외도 없이 죄다 파란색이다. 모양은 그렇다 쳐도 색상까지 다 같을 필요가 있나?' (간혹 노란색 물탱크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주변의 물탱크들은 모두 파란색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그럴만한 이유는 있을 것 같았다. 가장 단순한 생각으로는 '저 파란색 물탱크는 모두 같은 회사의 제품인가?'라는 생각부터 '아니야, 제작 공정상에 이유가 있을거야!'라는 생각까지.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그 이유는 이랬다.
가장 큰 부분은 수질 보존의 측면이라고 한다. 물탱크 중 대부분은 PE(폴리에틸렌)으로 만들어진 수조. 이 수조는 삼중 구조층으로 외층, 발포층, 방수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본래의 재질이 투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물탱크 겉면에 색을 칠해줘야 하는데 탱크의 겉 색상을 띄는 유기안료 1는 자연광을 제대로 차단하지 못하면 장시간 물을 저장할 시에 탱크 내부에 녹조류가 발생하고 이끼류가 생성되어 배관을 막는 등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러한 것들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물탱크는 파란색 유기안료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그 유기안료가 왜 하필 파란색일까?'
자연광의 투과는 조도 2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옥상 물탱크의 색상을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떠올린다. 하지만 노란색 물탱크 마저도 파란색 물탱크로 바뀌어 가고 있는 추세. 결과적으로 노란색 물탱크 보다는 파란색 물탱크가 자연광 투과율이 낮다는 뜻이다. 기본적인 색상에 따라서도 물을 보존할 수 있는 여건이 달라지는 셈이다.
물탱크 제작시 특수한 공법을 사용하여 공기층이나 진공층을 만들어 주어 조류의 광합성을 억제시킬 수도 있다고 하지만, 앞서 언급한 의문에 대한 답으로는 적절치 않은 부분들이 있다. 색상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지만 모든 주택의 옥상 물탱크가 "파란색"인 것은 너무 재미없지 않은가. 여건상 물탱크의 색상이 꼭 "파란색"이어야 한다면 그 안에서 크고 작은 재미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파랗기만한 것들 말고 "퍼렇고, 시퍼렇고, 프릇프릇하고, 프루죽죽하고, 파르스름한" 것들도 있으면 좀 더 흥미로운 "옥상 풍경"이 되지 않을까.
'돼지 저금통은 모두 빨갛다'
어렸을 적 돼지 저금통에 밥을 주고 살이 차오른 돼지의 배를 가르면 내가 갖고 싶은 것 하나쯤은 가질 수 있었다. 실제 가축처럼 정성스레 키웠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하지만 요즘은 "빨간 돼지 저금통"을 보기가 힘들다. 동전에 대한 화폐 가치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듯한 느낌이다.
비록, 예전처럼 흔히 볼 수는 없지만 저금통하면 돼지, 돼지 저금통하면 빨간색이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애써 떠올릴 수 있는 "돼지 저금통"의 색도 "빨간색"에 가깝다. 불변의 진리처럼 말이다.
돼지 저금통의 형태적 유래는 두 가지라고 한다. 한가지 설은 중세 유럽인들이 "Pigg"라는 오렌지 빛깔의 점토로 돈을 담는 그릇을 만든 것으로 "Piggy bank" 라 불리며 돼지 저금통이 되었다는 설. 나머지 하나의 설은 미국 캔자스 주의 한 소년이 한센병 3환자들을 돕기 위해 돼지를 키운 사연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다.
그렇다면 색상은 왜 "빨간색"일까?
붉은 색은 예로부터 선명하고 쾌할한 색의 이미지로 자리 잡았으며 이러한 붉은 계열의 색은 신용 또는 깨끗한 마음을 전달하는 의미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인감도장의 인주와 행운을 비는 부적에서도 붉은 계열의 색을 주로 쓰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돼지 저금통의 색상이 "빨간색"이었을 것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형태와 색상에 대한 정확한 탄생 배경은 없다. 모두 가설로 남아 있고 우리 나라에서도 빨간 돼지 저금통과 관련된 또 다른 유래들를 찾아볼 수 있다. 돼지는 "다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리고 돼지의 그림으로 부를 염원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더불어 역사적 배경도 작용하고 있다. 어려웠던 시절 새마을 운동에 힘입어 동전 한푼이라도 모으자는 저축 운동이 일었고 그 덕에 "빨간 돼지 저금통"을 집집마다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빨간 돼지 저금통"은 저금통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사용 빈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시간이 흐를 수록 동전의 화폐가치는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언젠가는 "저금통"도 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존재와 부재의 문제를 떠나서 사람들은 "저금통" 하면 "빨간 돼지 저금통"을 떠올릴 것이고 또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앞서 말한 옥상 물탱크의 "파란색"은 뚜렷한 기술적 근거가 있었던 반면에 돼지 저금통의 "빨간색"은 관례적 근거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으레 그래왔던 것들이지만 잠시 뒤로 물러나 낯설게 바라보았더니,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들에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기술적이든 인식적이든 그 "까닭"이 그런 색을 사용하게 만든 것이다.
글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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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물탱크가 돼지 저금통 모양이라면?'
음...
썩 보기 좋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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