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 낡은 책상 서랍을 열 때면 꼭 서랍 속에 숨어있다 데굴데굴 굴러 나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나미 볼펜. 특유의 볼펜 똥(?)을 온 몸 여기저기 묻힌 채, 마치 기다렸다는 듯 볼품없이 등장한다.
급히, 메모를 해야 될 때면 집 안 여기저기 숨어 있는 펜들을 찾곤 하는데 그 많은 펜들 중에 내 손에 잡히는 건 결국 이 녀석. 낡을대로 낡은 녀석은 그간 쌓인 세월의 연륜을 과시하듯 노련하게 잉크를 내 뿜는다.
1963년 생산, 판매되기 시작한 [모나미 153]볼펜은 사실, 내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다. 펜 디자인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라고도 볼 수 있으며 프랑스어로 (mon ami, 좋은 친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름 만큼이나 우리에겐 너무나 친숙하다.
약 5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모나미 볼펜의 디자인은 크게 변함이 없다.
최근에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었지만 제품 컬러와 B.I(브랜드 아이덴티티:브랜드이미지의 일관된 형성을 통해 특정한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를 재고시키는 것)만 바뀌었을 뿐, 제품 본연의 형태는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펜들이 저마다 화려한 모습으로 문구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모나미 153]은 음악이나 영화의 장르를 구축하듯 동네 문구점 볼펜 코너 한 편을 아직도 꿋꿋히 지키고 있다. 따라서 모나미의 국내 누적 판매량과 보급률은 다른 볼펜에 비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손이며 종이며 잉크 얼룩이 지기 십상이고 휴지에 볼펜 똥(?)을 닦아가면서까지 이 볼펜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나미 볼펜의 가장 큰 메리트는 저렴한 가격일 것이다. [서민의 볼펜]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주고 싶을 정도이니 말이다. 가격이 이토록 저렴할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간결하고 정직한 디자인]이다. 군더더기 없는 모나미 볼펜은 볼펜이 지녀야할 최소한의 요소들(육각주 형태의 몸체, 촉 덮개, 조작 노크, 스프링, 잉크심 총 5가지 부품)로 구성되어 있다. 말 그대로 볼펜 노릇만 할 수 있으면 된다.
이처럼 오랜 시간 존재하며 사용되고 있는 것들에는 그에 맞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오래오래 살아남는 것들의 대부분은 기본에 충실하다.
자, 주위를 둘러보자.
모나미 볼펜 한두 자루 정도는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봐왔던 모나미 볼펜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는가.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들이 머금고 있는 가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어쩌면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가진 완벽에 가까운 평범함과 익숙함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질에 가까운 모습보다 더 새롭고 화려한 디자인에 현혹되기 마련이다. 외형적 화려함을 선사하는 것도 디자인이 가진 역할 중에 하나이기도 하지만 늘 새롭고 화려한 것만이 양질의 가치를 가져다 주진 않는다.
Super Normal(슈퍼노멀_저자:후카사와 나오토, 재스퍼 모리슨)이란 책에서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제품의 우수성은 그것이 지닌 특징들이 보이지 않도록 감추는 능력에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극도로 평범한 것은 오히려 특별한 것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들의 몫을 다 해내는 것.
너무나 익숙하기에 왜?라는 의문 조차 던져볼 수 없었던 것들.
작은고추는 세상에 익숙한 모든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려 한다. 낯설게 보기를 통해 주위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것들에 숨은 가치를 찾아내고 어렵지 않은 접근으로 한번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해보려 한다.
거창하지 않은 것을 거창하게 포장하는 것, 거창한 것을 더 거창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존재하는 소소한 디자인들을 통해 그들에게 숨겨진 새로운 의미들을 재밌게 찾아보자.
작은고추디자인스튜디오
http://jagungochu.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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