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출이 많다고 선호도가 높았다. 바싹 2호의 표지그림은 춤추는 여인.
이 그림을 그린 이는 32세의 정청. 팝아트적 분위기가 난다 했더니 만화를 그리는 작가다.
모름지기 언어를 하나 더 가진 사람들은 막간을 그 언어로 채운다.
- 학교 다닐 때, 수능친 뒤 봤던 “애플시드”, “무한의 주인” 이런 만화 속 그림의 강렬함이 아직도 기억나요. "해와 달"이라는 김가야의 만화는 또 다른 느낌이었지요. 주인공 이름도 아직 기억해요. 백일홍.
한 번씩 돌려보던 그런 만화가 누군가의 인생을 만화쟁이로 이끌었다. 남들에게는 별 것 아닌 그림, 음악, 우연히 만난 사진 한 장이나 시의 한 구절이 한 인생을 관통하면서 만들어내는 작지만 강한 균열. 내면 저 깊은 곳에서 나침반이 되어버리고 마는 그런 강렬함을 예술은 종종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따라간다고 해서 결코 행복할 수만은 없는 길을 걷게 만드는 환청, 벗어나면 더 괴로워지는 그런 이상한 환청의 시선과 마주하게 된 사람들이 종종 있으리라.
정청은 대학에서 국제통상학을 전공했다. 대부분이 그렇듯이 성적에 맞추다 보니 선택한 진로이다.
- 대학에서는 할 것 없으면 술을 마셨고, 술 마시고도 할 것 없을 때 종종 그림과 만화를 그렸어요.
대개 이런 경우 할 것 없어서 마시던 술이 추억의 주가 되는 주술역전이 일어나지 않나. 술 아니면 그림이었다는 건데 그럼 실전용 인간되기 연습이라는 연애와 사람노릇 보장해줄 것 같은 취업 공부 따위 들어갈 틈이 있었을 리 만무하리라.
- 제대 후엔 본격적으로 해봐야겠다 싶어 미술학원에 갔었죠. 처음에는 일반반에서 원장이 직접 가르쳐주기도 하더니 어느새 입시반에서 똑같이 입시미술을 배우고 있었죠. 그래도 만화를 좋아하던 나에게 원장이 그러더라구요. “미술 배우면 만화 같은 것은 금방 그려!” 지금은 기본기가 중요한 것 알지만 그때는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더라구요. 모나리자 잘 따라 그린다고 다빈치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어쨌던 전 창조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미술학원과의 인연은 짧게 끝이 났다.
주변에 그림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이후에는 홀로 특훈을 했다. 책을 사보고, 남의 그림을 관찰하고 많이 그리면서 커뮤니티나 사이트에 그림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보고 몇 군데서 작품을 같이 해보자거나, 발행을 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완성된 원고도 있었고, 연재에 선정되기도 했으나 업체가 부도나거나 사이트가 폐쇄되는 등 결말이 좋지는 않았다. 어떻게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류의 행복은 좀체 찾아오지 않는단 말이지. 불행들은 네비게이션이 달리기라도 한 듯이 개떡같이 찾아오더만. 귀신같단 말이지.
2005년 이후 대학은 제적상태. 얼마 전 대학동기가 결혼한다고 연락이 와서 7년만에 처음 만났다. 직장을 구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 어차피 인생이 쉬운 것은 없으니까 쟤들도 머리가 아플테지. 그래도 아픈 만큼 돈은 벌텐데, 나는 골치가 아파도 돈도 안 나오는 삶을 사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 몇 년 후에 뭐하고 있을지 생각해보셨어요?
- 그것보다 평창동계올림픽 발표 났을 때 있잖아요. TV에서 사람들 축하하고, 김연아 나오고 사람들 막 즐거워하고. 보통 평창에 가서 올림픽 봐야지 이런 생각들 할 거잖아요.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때쯤이면 뭐하고 살까... 살아는 있을까’라고 말이죠.
그렇게 말하면서 혼자서 낮게 웃는다. 자기가 생각해도 웃기는 모양이다. 나도 같이 웃는다. 이런 웃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절망은 아니고 달관에 가깝지만 뼈에 사무치기도 하는 그런 웃음이다.
현재도 계약중인 만화가 하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장르가 SF라서 망설이고 있다. SF보다는 웅장한 대서사를 담아보고 싶다고 한다.
- 위트와 일상의 모습을 잘 포착한 웹툰보다는 길어야지만 전달 가능한 웅장한 서사나 비극 같은 것을 그리고 싶어요. 그리고 내가 그렇게 종이 만화책을 봐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웹보다는 종이질감과 함께 내 그림과 서사가 전달되면 좋겠어요.
아날로그적 감성을 지닌 그는 만화와 함께 소묘나 드로잉, 조각도 좋아한다.
- 특히 구스타프 도래의 판화를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어요. 영화 “세븐”에서 모건프리먼이 도서관에서 단테의 신곡을 뒤적거려요. 그때 그려져 있던 삽화를 보고 놀라서 도서관에 달려갔죠.
좋아하면 눈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영화 속에서 그게 다 보이다니.
단테의 신곡 삽화. 그림을 보고 나니 대서사를 그리고 싶다는 작가의 성향을 조금은 이해하겠다.
- 음악에는 20대에 이미 일가를 이루는 경우가 많잖아요? 근데 서사적인 장르는 살아가면서 알게 된 지식이 쌓이고 세상을 보는 눈이 깊어져 늦은 나이에 뛰어난 작품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시인 천재론이 떠오른다. 예전에 대학 선배는 못쓰는 시를 너무 많이 들고 찾아가는 나에게 오래 살아야겠다고 한 적이 있다. 천재는 타고나는 것인데 나는 그런 것 같지는 않으니 오래 살아서 좋은 시를 쓰라고 격려 겸 조롱을 한 것이다. 여기 또 한 명의 둔재가 있다. 사회를 보는 눈과 시선이 묻어나는 대서사시를 만화로 보여주겠다는 정청. 당신도 나와 더불어서 좀 오래 살아야겠다. 묵히고 삭혀야 나오는게 대서사라면, 다만 지금은 버티기 기술을 공유할 때.
표지의 그림은 사실 만화의 한 장면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만화의 한 장면. 정청 작가가 아직 그려내지 않은, 그러나 꼭 그려낼 많은 서사들 중에 한 장면을 먼저 볼 수 있는 영광을 독자에게 드린다. 지금 세상을 보고, 배우고, 생각하면서 그려내고 있는 이 그림들이 조만간 웅장한 대서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서사나 그림은 필시 누군가에게 또 충격을 줄 것이고 환청을 들려주게 될 것이다.
이제 불행에 장착되었던 네비게이션을 빼서 정청작가에게 주노라.
그러니 정청! 귀신같이 당신의 대서사를 따르라.
정청의 그림을 더 볼 수 있는 곳.
'+인물&장소&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화] 대화 그 이상의 매력 - 탱고 (1) | 2012.05.04 |
---|---|
[인물] 순간의 힘을 믿어요 -사진 찍는 권하형 (8) | 2012.05.03 |
[장소] 장전상가? 장전시장? (1) | 2012.03.29 |
[인물] 아르바이트하면서 그림을 그릴 것인가, 그림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것인가 - 청년 작가 김도진 씨 (3) | 2012.03.01 |
[인물] 만만한 마산삼촌들의 음악 '엉클밥' (12) | 2012.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