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현 수
번영로를 타고 수영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 편에 참 인상적인 간판이 하나 지나간다. 'OO 팩토피아'가 그것이다. 검색해보니 아파트형 공장 상가라고 나온다. 지어졌을 당시엔 획기일지 아닐지는 몰라도 이름 하나는 엽기다. 팩토피아라니. 팩토리와 유토피아를 합친 단어임에 분명하다. 우리말로 바꾸면 '공장천국'쯤 되겠다. '유토피아'나 '천국'이나 둘 다 이상향, 또는 낙원의 의미로 통하니까. 그러나 아무리 해도 머릿속에 연상이 안 된다. 공장 굴뚝이 늘어선 지역을 생각하면 어떻게 해도 낙원보다는 '블레이드러너'의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밖에 그려지지 않는다. 아하, 혹시 팩토리와 디스토피아가 결합된 말? 에이 설마(일리 있어 어떡해 건물주 만세)
대체 천국이라는 말이 뭘까? 팩토피아에서 시작된 망상은 천국, 나라, 랜드 등등의 단어로 뻗어나갔다. 당장 떠오르는 게 두 가지였으니, 바로 '김밥천국'과 '전자랜드'였다. 오오, 아무 생각 없다가 갑자기 떠오른 이 천국들의 이미지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감나무에서 참치김밥과 땡초김밥들이 자라나고, 모든 길에 무빙벨트가 깔려있을 거 같다. 이거 천국 맞어?
이런 나라, 저런 천국
김밥천국이라는 말에 들어가 있는 '천국'이라는 단어의 실제적인 의미는 "여기엔 다 있어요"쯤 되겠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이 얼마나 컸으면 이런 말을 쓰게 되었을까. "여기가 바로, 내가 그렇게도 원했던 김밥이 가득한 천국이로구나!" 김밥천국이라는 이름은 이것의 역발상쯤이라 추정한다. "김밥을 원했나요? 컵라면 하나로는 밥이 모자란가요?? 이곳이 바로 없는 김밥이 없는 김밥의 천국이랍니다!!" 좋은 세상이다. 천국 프랜차이즈 산업 덕분에 꽤나 획일화된 천국의 맛을 동네 곳곳에서 느낄 수 있으니까. 천국 찾으러 하늘까지 안 가도 된다. 우리 동네엔 천국이 5분 거리 안에 있다고 친구에게 자랑하시라. 알고 보면 그 친구 집도 천국에서 멀지 않으니 과연 도시에선 누구나 다 이웃사촌이다.
이왕 천국이라 호칭한 김에 안에 넣는 것을 손님의 기호에 맞춰준다거나 하면 정말 천국일 것 같다. 저는 캐비어 짬뽕 김밥으로 부탁해요 라든가. 그러나 위대한 김밥천국이여. 김밥천국에 맞서서 고봉민김밥이 생겨나 대박으로 장사가 잘 되자, 김밥천국에서 고봉김밥을 메뉴로 넣어 버리더라. 기본 김밥보다 몇백 원 더 비싸게 해서는 그걸 판다. 대단하다. 남의 브랜드를 자기 메뉴로 소화시키다니. 이쯤 되면 김밥에 한해서는 없는 게 없는 천국으로 인정해주긴 해야겠다.
전자랜드는 그보다 사정이 조금 더 안타깝다. 이름은 전자랜드인데 실제로 가 보면 없는 게 더 많다. 전자제품들의 부피 문제도 알겠고, 워낙 제품들이 많은데 오륙층 건물 정도로 그 많은 제품들을 다 비치하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알겠다. 그래도 이름이 전자'랜드'라서 용서가 된다. 전자'천국'이었으면 어쩔 뻔했나.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최고의 전자제품이라고 생각하는 펜탁스 DSLR도 하나 없는 전자천국을 나는 천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 악의 기업 삼성 제품이 종류별로 다 있으므로 더더욱 천국 자격 박탈이다. 그러니, 전자랜드라는 말은 인정해줄 수 있다. 어차피 땅이야 부동산 소유주에 의해 놀아나는 것이니까.
천국다운 천국을 원한다
내가 원하는 천국이 있다면 그건 뭐든 원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 곳일테다. 뒤집어 말하면 없는 게 없는 곳이랄까. 한 종류만 집중적으로 다 있다고 천국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른 건 천국 아닌데 김밥만 천국인 건 뭔가 더 용서가 안 되는 기분이다.
어차피 김밥천국도, 전자랜드도 비유적인 표현에 불과한 거다. 팩토피아도 마찬가지. 거기에서 일하고 살 사람들에게 팩토헬이라고 이름붙은 공간을 제공할 순 없지 않나.
그래도 이왕에 천국이라 할 거면 확실하게 천국스러웠으면 좋겠다. '김밥천국'이 어차피 김밥을 위한 천국이 아니라 김밥 구매자들의 천국이라면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라도 질 좋은 것으로 좀 써달라. 오래 된 계란을 써서 잿빛 면이 두드러지는 그런 계란심은 좀 심하다. 또, 24시간으로 운영되는 김밥천국은 일하는 사람들에겐 전혀 천국이 아닐테다. 야간에 일했으면 눈 밑에 다크서클 말고 다른 보상이 주어지는 환경이어야 하지 않겠나.
팩토피아도 마찬가지. 공장에서의 근무가 유토피아적이려면 어떻게 되어야 할까. 공장에서의 일이 인간을 부품화시키지 않고, 너무 위험하지도 않아야 할 테다. 급여도 일한 만큼 받고, 비정규직 없고, 공장 노동자라고 하층민 취급받지 않고(천국에 상류층과 하류층이 있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음) 그래야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는 거다.
전자랜드는, 음, 그냥 생각하지 말자. 나는 여름에 에어컨 빼고는 자연랜드가 더 좋다. 그런 랜드 난 반댈세.
물가는 나날이 상승하고 월급은 멈춰있다는 너무나 상투적인 표현을 온몸으로 느끼는 요즈음. '가진 자들의 천국' 혹은 '믿는 자에게만 천국'이라는 등의 말에서만 씁쓸하게 천국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는 시대에, 김밥천국은 차라리 싸게 먹을 수 있어서 못가진 자의 천국 같다는 생각도 불현듯 든다. 서러운 천국이다. 그런 천국은 가고 진짜 천국이 왔으면 좋겠다. 뭘 해도 행복한 세상.역시 아우토포스(유토피아의 어원,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뜻)로구나!
'+절찬리 생존중 > [ 문득 이 단어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사랑, 그 아름다운 한 마디에 대해 (0) | 2014.04.27 |
---|---|
있어도 부재중 - 부재중 전화 (0) | 2013.08.15 |
오빠라고 불러주기 싫은데요 - '오빠'와 호칭어 (7) | 2012.12.15 |
‘번영’ 뒤의 ‘오륜’ - 오륜동, 번영로, 회동저수지 (0) | 2012.11.06 |
고독하지 않은 인문학을 위하여 : 인문학 (2) | 2012.10.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