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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리 생존중/[ 문득 이 단어 ] 에세이

있어도 부재중 - 부재중 전화

글 >> 현 수.

 

몸이 둔해서 큰일이다. 휴대전화를 벨소리로 하는 건 남들에게 민폐다 싶어 주로 진동으로 해 두는데, 요즘 나오는 스마트폰들은 당최 거대하기가 보통이 아니어서 바지 주머니에 넣기가 영 그렇다. 손에 들고 다니다 액정 한 번 깨먹어봤더니 피눈물이 한강수요, 바지 주머니에 넣자니 이건 좀 변태스럽기도. 해서 뒷주머니에 넣어놨더니 진동이 잘 안 느껴진다. 아놔, 살찐 엉덩이.

전화기에 부재중 전화가 떠 있는 게 그만큼 잦아졌다. 보통은 '아, 내가 또 전화 온 줄 몰랐네' 하지만, 가끔 짜증스러워질 때면 전화탓을 하게 된다. 전에 쓰던 폴더폰은 스마트한 친구는 아니지만 진동 파워 하나는 안마기 수준이었는데. 진동 하나 못 느꼈다고 사람을 부재중 취급하는 게 못마땅해진다.

전화기 나름이야 아주 겸손하게 전달을 하는 멘트일 테다. '주인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전화가 왔네요. 안 비워도 어쩌겠어요. 못 받은 건 자리를 비운 거나 같죠.' 이러나 저러나 전화를 못 받은 게 사실이기는 한데, 휴대전화를 내내 가지고 있었던 내가 어째서 부재중이란 말인가.

 


 

휴대전화가 없었던 시기는 부재중 전화가 맞는 말이기도 하다. 집전화를 쓰던 때, 진동 기능 부재에 전화기를 몸에 달고 다녀봤자 현관문을 벗어날 수 없었던 시절. 누군가의 집으로 전화를 해서 연결이 되지 않으면 그건 정말로 집에 사람이 부재하거나, 혹은 있더라도 부재한 것처럼 보이려고 의도적으로 전화를 받지 않은 거다. 몇몇 이례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설거지를 하는 동안 고무장갑과 손이 일체화되었거나 화장실에서 용을 낳는 산고를 겪었거나 등등) 어쨌든 전화가 올 때 전화기 옆에 없었던 건 맞다. 그러나 휴대전화가 생긴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졌다.

약간 더 원론적인 부분에서 접근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상대에게 말을 걸면 반드시(그것도 가능한 한 즉시) 대답을 들어야 한다. 그것은 오프라인 관계에서는 당연한 거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즉각 답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잡생각에 빠져있다는 거다. "방금 내가 한 말 듣고 있니?" 그러나 온라인에서는 늘 그렇지만은 않다. 온라인을 연결해주는 두 사람이 다 재중(부재중의 반대)이어야만 즉답이 가능하다. 이렇다 보니 기술은 피드백 가능성을 알려주는 방향으로 발전해갔다. MSN, 네이트온 등의 메신저 프로그램에는 지금 상대방이 컴퓨터 앞에서 대화창을 띄워놓았는지 아닌지, 즉시 응답이 가능한지 아닌지를 표시(대개 이름 옆에 자그마한 원형으로 활성화를 알린다)해 둔다. 우리는 그 표시를 보고 안심하고 말을 건다. 적어도 말할 거리 하나는 생긴다. "님하 아까 접속중이던데 왜 내 메시지 씹어썽?"

온라인 메신저에서 원형 아이콘이 활성화 표시라면 현실세계에서는 휴대전화를 쓴다는 것 자체가 활성화 표시다. 휴대전화니까. '휴대'라는 말은 '이동성이 높다'라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서 '늘 가지고(몸에 붙이고) 다닌다'는 의미로 확대되었다. 앞문단의 원리에 의해,휴대전화 소지자에게 있어 응답은 의무가 되었다. 만약 전화를 받지 못하면 해명 요구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다. "너 왜 아까 전화 안 받았어?"어떠한 상황이 있었는지에 대해 전혀 모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매우 쉽게 '안 받았다'라는 말을 쓴다. '못 받았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트랜드와 소통의 핵심 아이콘인 페이스북은 이러한 휴대전화의 기능을 처절하게 증명한다. 페이스북 채팅창에는 새로운 아이콘이 생겼다(생긴 지 좀 됐다). 휴대전화 마크. "이 사람은 지금 컴퓨터 앞에 있진 않지만 휴대전화에 페이스북 앱이 있으니 말 걸면 됩니다"

 

 

<전화라고 쓰고 족쇄라고 읽는다. Illust by 리쥰.>
 

 

 

더 손쉽게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게끔 만들어진 휴대전화는 우리들로 하여금 관계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한층 깊게 만들어 버렸다. '내가 전화를 걸면 너는 받아야 해'라는 인식이 머리에 깊게 새겨진 사람들은 부재중이라는 상태 자체를 견디지 못한다.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전화기 옆에 '부재'한 탓이다. 위대하신 폰느님께서 수십 킬로미터 밖의 사람을 연결해 주시거늘 그 진동의 계시를 감히 무시한 무지랭이 인간은 부재함이 마땅하니 어쩌구저쩌구.

이제는 전화를 안(못) 받은 데에 대해 일일이 상대에게 사정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해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살찐 내 엉덩이만 탓하고 있을 수가 없다. 화장실에 갈 때도 가지고 갈 수 있으니 설사 이무기를 출산하고 있다 하더라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가뜩이나 이런저런 사람들 비위 다 맞추고 살기도 버거운 세상에서 우리가 미안해져야 하는 것이 더 늘어나 버렸다. 답문 빨리 못해서 미안, 니가 전화했는데 못받아서 미안, 전화기를 침대에 놓고 화장실가서 미안, 밥 먹을 때 전화기 안 보고 있어서 미안, 어젯밤 충전기에 밧데리 연결 못해서 미안, 엉덩이 살쪄서 미안. "부재중이라서 미안해"라니 세상에.

 


 

강력한 온라인의 세상이다. 내가 잘 아는 음악가 한 분은 수십 년간 음악을 해왔음에도 이제 처음 페이스북을 쓰고 유투브에 영상을 올리자 신인 음악가 취급을 받았노라고 한다. 오프라인에서의 존재는 손쉽게 소거된다. 더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부재중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삭막하다. 

여러 가지 사연들이 '부재중'에 파묻히는 시대, '부재중'에 책임을 지우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전화를 받나 못 받나라는 사실만으로 나의 존재 여부가 너무도 쉽게 결정되어 버리는 세상에서,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의 전화를 받지 않은 그 사람은 부재중인가?

 

우리는 정말로 부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