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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생존마감

[산청에서 보내는 편지] 간디학교 이동학습 인도로 가다

#이동학습

   

우리는 학년마다 한 번씩 이동학습을 간다. 학교에서 벗어나서 배운다는 건데, 1학년 때는 제주도 도보, 2학년 때는 필리핀, 3학년 때는 인턴십이다. 그런데 우리 학년이 2학년이 된 봄, 뜬금없는 제안이 들어왔다.

 인도에 가면 어떻겠니?”

 두 담임 선생님들의 제안이었다. 우리나 학부모님들이나 괜찮은 반응이었고 인도에서 더 많은걸 보고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우리는 덜컥 인도로의 이동학습에 찬성했다. (모두들 그땐 몰랐다. 그때의 결정이 큰 후폭풍을 불러올 것이란 걸.) 그 때부터 인도를 가기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이동학습은 그냥 무작정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가기 전 수업시간에 다 같이 준비를 한다. 특히나 2학년 해외 이동학습은 2주가 넘는 데다 외국으로 가기 때문에 1학기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이동학습 수업시간을 가진다.

우리는 월요일마다 인도의 역사, 문화, 지리 등에 대해 발제도 하고 강연도 듣고 조를 짜서 인도에서 할 수업 연습도 했다. 커리조, 알이즈웰조, 여권사진망했조, 샨티샨티조, 시바조 등등 조이름도 정하고, “나마스떼? 나마스떼!”라는 모토도 정하고. 물론 반쯤은 떠들고 졸았지만서도 그렇게 우리는 실감도 나지 않는 그곳, 인도로 떠날 준비를 했다.

 

 #인생은 다른 곳에 있다

 

인도 여행을 가기 전 나는, 말하자면 방전 상태였다. 연극이며 공연, 일제고사 나들이, 수업 등 쉴 새 없이 바빴다. 바쁠 때는 또 바빠서 힘들고, 여유로울 때는 괜스레 공허해서 축 처졌다. 에너지가 바닥이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전과 다르다고 주변사람들의 걱정까지 들을 정도였다. 학교에서는 뭘 해도 시들시들하고, 바쁜데도 심심하고,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지치고. 농담처럼 나 요즘 학교랑 권태기야하고 말했지만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마냥 행복하고 하루하루 즐거울 것 같은 이곳에서도 이렇다니. 이런 마음을 먹고 있는 내가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바빠서 그런 거라느니, 이제 늙은 거라느니, 다 핑계겠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얼른 인도로 떠나고 싶었다. 기온이 40도를 훌쩍 넘어도, 아무리 시끄럽고 지저분해도.

   

#나마스떼? 나마스떼!

   

정신없이 새벽까지 짐을 싸고, 새우잠을 자고 일어나 부산 친구들과 기차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몇 년 만에 비행기를 타고. 그렇게 몇 시간을 날아 우리는 드디어 델리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나는 두근거림을 느꼈다. 인도는 나의 오랜 로망이었다. 이때까지 읽은 인도여행기들이 준 기대, 낯선 곳으로 간다는 약간의 두려움과 새로움에 대한 설렘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공항은 인도스러운 문양과 벽화로 가득 차 있었다. 인도 땅을 밟고 있다는 게 점점 실감이 났다. 공항문을 나서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코로 들어왔다. 거리를 유유히 걸어다니는 소와 개, 인도사람들과 꼬부랑 힌디어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우와, 진짜 인도구나. 우리는 버스를 타고 호텔로 이동했다. 함께 떠난 팀장님이 여러분, 오늘은 호텔에서 자구요, 마지막 천국이니까 마음껏 즐기세요!”하고 말하셨다.

우리는 마냥 신이 나서 버스 창밖으로 지나가는 인도의 밤거리를 눈에 가득가득 담았다. TV에서나 보던 풍경이 진짜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인도다. 언니 오빠들이 해준 말처럼 후회 없도록 놀고, 열심히 해서 그득그득 담아가야지, 조원들도 잘 챙기고, 그 전에 나도 잘 챙기고, 힌디어는 어디까지가 한 글자일까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하면서 호텔에 도착했다.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호텔 구경도 하고, 인도 직원과 나마스떼-’하고 인사도 해보고, 그렇게 인도의 첫날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델리 그리고 기차

   

다음 날부터 델리에서 관광을 했다. 비행기 표 사정 때문에 하루 일찍 인도에 왔기 때문에 이날 일정은 여유로웠다. 인도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인도 음식 맛있는데?’라는 등의 생각 뿐이었다. 마냥 들뜨고 신기해서 이리 저리 둘러보고 다녔다. 하지만 대도시에서 친구들과 같이 다녀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인도를 온전히 만났다는 느낌이 잘 안 들었다.

세계 2차 대전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위령탑인 인디안 게이트를 구경하고 기차를 타러 바라나시 역으로 갔다. 기차역에는 수많은 사람들과 소, 개가 한데 뭉쳐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차역을 안방삼아 자고 있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정말 어지럽고 더운 곳이었다. 우리는 기둥 하나를 둘러싸고 앉아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들리는 충격적 소식, 기차가 연착되었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기차가 제시간에 오길 바라는 건 헛된 희망이라는, 말로만 듣던 소문을 직접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앉아서 게임도 하고 책도 읽고 누워 자기도 하고, 나가서 기차역 구경까지 다해도 기차는 오지 않았다. 그 사이 우리는 되려 인도인들의 좋은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밤이 다 되도록 기다려서야 기차는 도착했다. 우리는 3층으로 되어 있는 침대 기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다. 심지어 기차는 가는 도중에도 뜬금없이 섰다가 가기를 반복했다.

기차역에서 내리자 델리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왔다. 델리는 영국 식민지 시절 개발된 대도시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깨끗하고 높은 건물도 많은 반면, 바라나시는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구걸하는 사람들과 낡은 집들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쪄 죽을 것 같은 날씨. 진짜 인도로 한 걸음씩 더 다가가는 느낌이었다.

   

#홈스테이

   

바라나시에서 우리는 람나가르 마을에 머물렀다. 그중 산토스씨가 주인으로 있는 브라만 계층의 집이 우리의 숙소였다. 이때부터 진짜 차파티, 커리, 토마토, 오이, 수프, 사모사 등 인도인들이 먹는 식사를 그대로 먹었는데, 인도 음식 특유의 강한 향 때문에 음식을 못 먹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도 처음에는 먹을 만하다 생각했지만 갈수록 한국 음식이 지독하게 그리웠다. 방이 너무 더워서 다들 옥상에서 누워서 잤다. 인도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잠이 들 수 있다고 하면 낭만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물이 부족해서 샤워도 고양이 세수처럼 해야 했고 정말 더웠기 때문에 힘들었다.

그렇지만 지나갈 때마다 수줍게 나마스떼, 하고 웃어주는 사람들, 우리 꽁무니를 졸졸 쫓아오는 마을아이들, 그리고 정말 인도의 친척처럼 우리를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겨주는 홈스테이 가족들 덕분에 홈스테이는 너무 재밌었다. , 한국에서 얼마나 낭비하고 살았는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물을 쓸 때도, 에어컨을 켤 때도 늘 별 생각 없이 했었는데 말이다. 불편해 하는 것도 부끄러웠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최소한의 것으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듯하다.

 

#아쉬람 대안학교

   

아쉬람 대안학교는 우리 이동학습을 함께 한 아시안 브릿지에서 만든, 불가촉천민 아이들을 위한 학교이다. 한국에서의 이동학습 준비과정 중에 아쉬람 대안학교 담장 쌓기 프로젝트를 했었다. 학교에 도난이 잦다는 말을 듣고 우리가 직접 담장 쌓기 기금을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공연팀, 카페 팀, 만들기 팀, 일 팀 등으로 나뉘어져 몇 달 동안 열심히 돈을 벌었고 꽤 많은 금액이 모였다. 담장 쌓기 기금과 조별 미술, 체육 수업준비를 해서 아쉬람 학교 아이들을 만나러 갔다.

아쉬람 학교에 가니 아이들이 모두 문으로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이 나와서 이마에 붉은 점을 찍어주며 환영의 인사를 했다.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나마스떼, 엑 도 띤(하나 둘 셋), 나마르(이름), 이런 단어 몇 개만으로 우리는 몇 시간 동안 정말 땀나게 놀 수 있었다. 노는 동안에는 정말 더운지도 모르고 정신없게 놀았다. 아이들이 웃는 게 너무 예쁜 데다, 뭐 하나라도 말하려고,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순수함이 주는 행복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담장을 만들었다. 바닥에 깊은 구멍을 파고, 거기에 기둥이 될 통나무를 박는다. 그리고 쪼갠 대나무를 가로나 대각선으로 대어 기둥 사이에 못으로 박았다. 하는 동안 정말 힘들고 더워서 땀이 비 오듯 줄줄 흘렀지만 완성된 담장을 보니 너무 보람찼다. 다하고 돌아갈 때 아이들이 입을 모아 단야밧(고맙습니다)-하고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니 뿌듯함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지금도 인도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이곳이 떠오른다. 아이들과 함께 있으니 나도 하루 종일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갠지스 강

 

저녁에 갠지스 강을 보러 떠났다. 버스를 타고 근처로 간 뒤 시장에서부터는 릭샤를 타고 이동했다. 말로만 듣던 인도의 릭샤를 직접 타본다는 게 무척 설렜지만, 낡은 옷을 입고 변변한 신발도 없이 일하고 있는 할아버지뻘의 릭샤꾼들을 보니 그런 마음이 사그라졌다. 두 명씩 타기도 미안할 정도로 릭샤꾼들은 힘들게 일하고 있었다. 차선과 신호등 대신 소, 돼지,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를 릭샤꾼들은 씽씽 달렸다. 도착한 뒤 우리는 배를 타고 갠지스강을 건넜다.

밤이었지만 화장터의 불빛과 강물 위의 초들이 강을 밝히고 있었다. 티비에서만 보던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부자들만 여기서 화장을 할 수 있다, 화장은 다섯 가지 원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설명들을 들으며 멀리서 화장터와 의식을 지켜봤다. 기분이 아주 묘했다. 정말 신기한 순간이었다. 삶과 죽음이 다 뒤엉켜있는 것 같았다. 식상한 표현인지 몰라도, 갠지스강은 정말 그런 곳이다.

 

#긴급 상황?

 

점점 친구들이 이상해졌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때문인지 아픈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먹으면 토하거나 설사를 하고 열이 펄펄 났다. 옥상에서 링거를 맞고 누워있는 아이들을 보니 황당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역병이 돈 마을처럼, 지리산 종주도 가뿐하게 잘 가던 애들이 이렇게 쓰러져 있으니까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홈스테이집의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고, 괜찮은 사람들은 아픈 친구들을 간호했다. 선생님들의 회의 끝에 새벽에 급하게 버스를 타고 단체로 바라나시 종합병원에 가서 모두 진료를 받았다. 그 때까지 좀 멀쩡하던 편이던 나도 점점 정신이 헤롱헤롱해졌다. 병원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니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대여섯 명이 입원을 하고, 우리는 홈스테이 대신 급하게 구한 호텔로 가게 되었다.

아침이 다 되서야 나온 병원 앞에는 원숭이들이 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열사병 증세에 좋다는 일렉트랄이라는 약이 있는데, 포카리스웨트에 소금을 탄 맛이 난다. 우리는 이걸 많이 받아서 먹어야했는데 정말 먹을 게 못된다. 나중에도 일렉트랄이라는 말만 들어도 다들 경기를 했다. 그 뒤 우리는 호텔을 매일매일 옮겨 다니는 환자들이 되었다. 결국 이 이후의 일정은 몸이 괜찮은 사람만 갈 수 있게 되었고 마흔 명 중에 한 번도 안 아팠던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모두 상태가 안 좋았다.

 

#돌아오다

 

우리는 결국 예정된 날짜보다 며칠 일찍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다. 선생님과 아이들 저마다의 의견이 달랐고 충돌도 있었지만 조금씩 양보해 이것이 최선이라는데 동의하고 조기귀국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인도에 왔는데 타지마할을 못 보고 돌아간다는 아쉬움보다는 드디어 집에 간다는 기쁨이 더 큰 것도 있었다.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바라나시공항으로 가자 홈스테이 호스트분이 간디티를 입고 나와 계셨다. 우리가 민폐만 끼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날씨 때문에 이렇게 돼서 너무 안타깝다며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고 말해주셨다. 아저씨의 따뜻한 마음에 모두 뭉클해졌다.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델리 공항으로 갔다. 여기서도 현지인 가이드 라즈 그리고 로히트와 헤어져야 했다. 누구보다 우리 때문에 잠도 못자고 고생한, 큰오빠 같고 삼촌 같은 라즈와 로히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마구마구 표현하고 인사까지 한 다음 비행기에 올랐다. 피곤한 우리가 곯아떨어진 사이에 어느새 비행기는 하늘을 날아 인천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몇몇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이 마중을 나와 계셨다. 나는 왠지 모르게 코가 찡해서 눈물이 났다. 옆에서 대체 왜 우냐고들 놀렸지만 정말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음이었다. 도착했다는 안도감, 인도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 끝났다는 느낌, 그런 것들이 다 뒤섞여서 복잡한 마음이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왔다. 넓고 깨끗한 도로 위로 아무도 경적을 울리지 않는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인도의 거리가 생각났다. 인도에 있을 때 버스에서 늘 유리창에 코를 박고 창밖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곤 했다. 그럼 창밖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의 인사에도 수줍게 웃으며 같이 손을 흔들어주고, 아이들은 버스를 따라 뛰어오며 인사를 해주기도 했다. 그토록 정신없고 시끄럽고 지저분한 인도거리가 행복하게 남아있는 이유는 아마 그런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부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인도가 자꾸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집에 와서 김치찌개며 냉면 같은 지독히 그리웠던 한국 음식들을 실컷 먹고 푹 자고 나서야 기운을 차렸다. . 순서도 좀 뒤죽박죽이고 빠진 것도 많고 내 글 솜씨가 부족해서 인도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 틈새에 있었던 깨알같이 재밌는 이야기들, 인도의 그 향기와 순간들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게 아쉽다.

 

그렇게 무덥고 지저분하고 힘들고 고생하고 아프고 심지어 한국에 와서도 후유증이 남아있고 카레만 보면 흠칫하게 만든 인도지만.

나는 인도에 또 가고 싶어졌다.

 

능글맞고 따뜻한 인도 가이드와 천사 같은 웃음을 가진 아쉬람 대안학교 아이들, 정말 푸근하게 잘 챙겨주셨던 넉넉한 홈스테이 가족들, 그리고 그 밖에 릭샤를 끌었던, 기차역에서 마주친, 버스 창밖으로 손을 흔들어준 사람들까지 모조리 그립다. 벌써부터 말이다. 여행에서 가장 즐거운 건 사람들과의 만남인 것 같다. 그 더럽고 알록달록한 거리들도 갠지스 강도 인도영화도 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빛나던 14기 친구들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렇게 인도여행은 끝이 났지만 그 2주 간의 기억은 오래오래 내 기억 속에 남아서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고 즐거운 일들을 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줄 것 같다. 다시 또 만나요, 나마스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