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요원의 무전이 왔다. 다음곡으로 씨스타의 So Cool 을 준비해달라는 요청이다. 급히 폴더를 뒤졌지만 곡이 보이질 않았다. 남은 시간은 1분여 남짓... 등줄기에 땀 한 방울이 흐른다. 어쩔 수 없이 재빠르게 핸드폰의 네이년 뮤직을 검색하여 노래를 틀었다. 4명의 여고생들이 합을 맞추어 춤을 춘다. 관객들의 열기가 후끈거린다. "돌아보니 웃음만 나와~ 쏘 쿨 쿨 쿨~ 눈을 씻고 찾아봐도 ....." 갑자기 음악이 끊겼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집안 막내라 걱정을 한가득 받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께서 아침 일찍 출근을 했다고 걱정이 되서 전화를 하신 게다. 재빨리 오른손 검지를 이용하여 통화 거절을 하였다. 잠시나마 음악이 끊겼지만 나의 빠른 대처로 인해 별무리 없이 잘 넘어갔다, 싶었더니 이어서 울려퍼지는 카톡음... 행사 끝나고 깨질 생각을 하니 대뇌의 전두엽이 욱신거린다.
며칠 전.
가뜩이나 행사 준비로 바쁜 나에게 실장님께서 또 다른 행사 일정이 잡혔다고 말씀하셨다. 무슨 행사인고 하니 "ㄷ"대학교의 입시설명회라고 한다. 갑자기 멍해지고 헛웃음만 나온다. 그 학교와 나와의 인연이 이렇게 질길 줄이야.... 언젠가 한 번쯤은 들를거다 생각은 했지만 그게 이번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난 어정쩡한 4년제 "ㄷ" 대학교를 자퇴하고 전문대에 들어가 지금은 이벤트 / 프로모션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청년이다. 3년 전, 방황하던 스물다섯 살, 난 2학년 2학기에 재학중이던 대학교를 자퇴하겠단 결심을 했다. 주위 친구들은 그동안 낸 등록금이 아깝지도 않냐고 말렸지만, 남은 대학시절 동안 원치 않은 것을 배우려고 하니 그 시간이 더 아깝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도 꿈도 없이 대학에만 다니는 대학생들이 한심하게 보였다. 내가 다니던 학과의 친구들만 하더라도 절반 이상이 수능성적에 맞춰서 입학을 한 경우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목표도 없이 졸업장만 따서 연봉이 높은 대기업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가진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학과뿐 아니라 우리 대학교에 다니던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런 판에, 나도 그들과 같이 있으니 같은 무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너무 싫었기에 자퇴를 하게 된 것이다.
자퇴를 하려면 자퇴신청서에 부모님 확인도장과 학과장 확인도장이 필요하다. 자퇴를 할 때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가 학과장님과의 상담이다. 학과장님은 나의 성적표를 뒤적이며 "이 어정쩡한 성적 가지고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자퇴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요즘 세상에 대학졸업증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괜한 짓거리 하지 말고 일주일 간 다시 생각을 해보고 와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고 며칠 뒤 교수님 연구실에 들려 다시 한 번 굴욕의 말을 들으며 자퇴신청 확인도장을 받았다. 학생서비스센터에 가서 자퇴신청서를 내고 스무 살 추억이 있는 대학교와 작별을 했다.
웃기게도 자퇴를 하고 난 후에 난 행사 공연 기획 연출을 배우고 싶어 전문대학의 이벤트학과에 입학을 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이벤트학과를 졸업하고 이벤트/프로모션 회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이벤트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번 "ㄷ"대학교 입시설명회 행사는 우리 회사 입장에서는 올해만 아니라 내년에도, 앞으로도 쭉 행사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소한 것 하나부터 신경을 많이 썼다. 11일 동안 하는 장기행사이기 때문에 신경이 더 쓰이는 게 사실이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입시생들이 오기 전에 행사장을 세팅해야 했고 입시홍보 도우미들이 직접 행사를 하는 거라 서투르기 때문에 이것저것 챙겨줘야 할 것이 많았다. 특히나 입시생 장기자랑 시간에는 정말이지 정신이 없었다. 처음엔 노래방 기계만 있으면 될 줄 알고 별 일 없겠다 생각했는데 요즘 학생들은 개성이 강해서 그런지 요구사항이 너무 많았다. 노래방 반주 말고 꼭 MR을 찾아서 틀어달라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직접 편집한 곡이 핸드폰에 있으니 틀어달라고 하는 학생이 너무 많아 음향을 보는 내내 이 핸드폰 저 핸드폰에 잭을 연결하여 틀어야해서 혼이 다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행사는 어찌어찌 별다른 이상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3년 전 자퇴할 때만 하더라도 이 학교에 대해 미련 없이 떠났지만,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이벤트 일을 하러 온 거기 때문에 감회가 새로웠다. 아무도 알아주진 않지만 무엇인가 이 학교를 떠난 지금의 나는 더 즐겁고 떳떳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내가 그런 인물이 되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건 이번 행사에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나에게 부정적이였던 이 학교가 생각해보니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는데 보탬이 되어준 거 같기도 하다. 내가 "ㄷ"대학교를 자퇴하지 않고 계속 다녔다면 지금의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인생은 정말 흥미로운 이벤트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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