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속 라디오
1화. 다시 만나서 반가워
글. 유아사해올
사랑니를 뽑은 자리가 아파서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나는 늘 버스 안에서는 습관처럼 귀에 이어폰을 꽂아 음악을 듣곤 하는데, 그날은 까먹고 이어폰을 가져 오지 않은 내가 멍청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무심한 듯, 심심한 듯 스마트 폰만 요리조리 만지작대고 있었다. 언제나 밖의 소리와는 단절한 채 시끄러운 음악소리만 귀에 가득 찼었는데, 그날따라 기사 아저씨께서 틀어놓으신 라디오 소리가 조용하게 들려왔다. MBC 표준FM에서 하는 ‘여성시대, 양희은 강석우입니다’였다. 처음엔 양희은 아줌마가 특유의 그 깨랑깨랑한 목소리로 소개하던 사연을 무심코 듣기 시작했는데 나도 모르게 집중하고 있는 나를 딱 맞딱뜨린 거였다. 잊고 있었다. 라디오의 매력을.
라디오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지 싶다. 방학이 되어 밤낮이 바뀌면서 낮에 너무 많이 잠을 자는 바람에 밤에는 통 잠이 오질 않았다. 매일 밤을 그렇게 괴로워하던 내게 엄마는 라디오를 추천해주셨고, 그렇게 라디오의 매력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푸른 밤, 그리고 성시경입니다’라는 라디오에서 내 문자가 성시경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읽혔을 때는 자고 있는 가족들이 깰까봐 소리도 못 지르고 혼자 누워 난리부르스를 치기도 했고 라디오 게시판에 사연을 적어놓고(지금 생각하면 오글거리기 짝이 없는) 내 사연이 혹시나 읽히지는 않을까 혼자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자정이 지나고 나면 ‘신해철의 Ghost station’의 무서울 정도로 으스스한 로고송을 어느새 신나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했고, 10월의 마지막 날인 10월 31일에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라디오마다 계속 나와서 나도 모르게 그 노래가 좋아지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겁이 많았다.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어릴 때보다는 덜 하게 됐지만, 아직도 밤에 혼자 다니면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정도로 귀신도, 어둠도 무서워한다. 이런 나에게 라디오는 최고로 좋은 친구였다. 라디오 하나만 켜 놓으면 유세윤처럼 익살맞은 목소리의 디제이가 읽어주는, 여느 드라마 못지 않게 재미있는 사연이 가득했다. 또한 사람들의 신청곡을 통해서 내가 모르는 새로운 노래를 추천 받을 때도 있고, TV에는 자주 출연하지 않는 ‘옥상달빛’과 같은 게스트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얘기를 할 때는 그들과 누구보다도 가까워진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영화 '써니'에서. 이미지 출저 : 네이버 영화
때로는 ‘스윗소로우의 오후의 발견’처럼 시끌벅적하게, 또 때로는 ‘푸른 밤 그리고 정엽입니다’처럼 잔잔하게 다가오는 라디오로. 때로는 ‘윤하의 별이 빛나는 밤에’처럼 나 한 사람을 위한 DJ 친구가 속삭이는 것처럼, 때로는 ‘두시탈출 컬투쇼’처럼 수십 명의 청취자와 한 방에 모여 친구가 되기도 했다.
라디오는 텔레비전과 달리 1시 땡 치자마자 사라지는 의리 없는 놈도 아니다. 24시간 쉬지도 않고 재잘재잘 떠들어주어서 이 좁고 컴컴한 공간에 혼자 있다는 기분이 들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이토록 다정한 녀석을, 어쩌다가 잊고 살았을까.
시간에 치이고 생활에 밀리다 보니 라디오라는 매체를 잊고 살았다. 눈을 요란스럽게 사로잡는 이미지들이 펼쳐지고 휘황찬란한 사운드가 가득한 영상매체를 접하게 되면서 라디오 위에는 먼지만 수북이 쌓이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라디오’가 나와 똑같은 의미일수는 없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나의 ‘라디오’ 같은 존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하나쯤은 품고 있는, 잊고 살던 것들에 대한 감성. ‘복고’라는 말이 주는 애틋함이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감성이 나에게는 ‘라디오’이고, 그것을 뒤늦게라도 되찾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이 아싸DJ가 이런 라디오와의 추억을 하나씩 펼쳐 놓으려고 한다. 때로는 저녁 10시 같은 글이, 또 때로는 새벽 2시 같은 글이 준비돼 있으니, 주파수 이대로 고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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