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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장소&문화

[장소-오륜동특집] 오륜동의 밤, 이렇게 하루가 잠이 들고

 

 

 

부산 장전동 지하철역 4번 출구 맞은 편 작은 마을버스 정류장.

 

저녁 무렵 버스정류장은 벌써부터 꺼뭇꺼뭇거리며 어둡게 날 맞이한다.

버스가 두 대밖에 안 오는 버스정류장에서 30분 간격으로 오는 마을버스를 기다린다.

해가 떠 있는 오륜동은 마치 그 옛날 낭만을 즐기는 은둔자의 낙향지이거나 유배객의 귀양지 같았다.

사람들의 손길이 닿을 적마다 쌓인 옛 정취, 고적한 풍경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그대로 보존하는 힘이 있달까.

그리고 오늘은, 오륜동의 밤에 발을 딛는다.

 


 

 

굴다리.

 

굴다리 입구가 짙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길이 번영로 아래로 파고든다.

밋밋한 터널길을 나트륨등이 주황빛으로 진하게 밝히고 있다.

밤의 어둠 속에서 집으로 향하는 길을 환영하는 현관문 불빛 같다.

반쯤 어둠에 잠긴 도시를 뒤로 하고 오륜마을로 스며들 시간.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길.

 

밤의 냄새가 난다.

많은 것들이 잠들고 난 밤에는 공기의 질감이 다르게 느껴진다.

잠든 초록잎들이 뿜어내는 산소로 인해 더욱 신선해지는 거겠지.

야성인 도시의 탁한 먼지와는 격을 달리하는 공기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하얀 입김을 뿜어본다.

가로등의 원색 조명이 길가의 초록 잎사귀들에 반사되어 홍채의 빛으로 반짝이고,

시뻘건 도로에 반짝거리는 시멘트 질감이 매끈하다.

길 위로는 차가 별로 없다.

간간이 승용차나 봉고가 맹렬한 속도로 질주해서 지나가지만,

그런 일시적인 소음이 밤길의 적요를 깨뜨리진 못한다.

차도 인적도 드문 거리.

가로등불만이 아늑하다.


 

 

 

마을 입구.

 

민가가 나오기 시작한다.

저 멀리 산자락 아래의 불빛을 지켜보며 걸어들어오다가 만난 집.

밤 아홉 시가 약간 이르게 느껴지는 건 내가 도시 생활에 너무 물들어 있기 때문인지도.

사람도 잠을 잘 시간이 되었다.

집 창문들이 캄캄하게 눈을 감고 있다.

 


 

부엉산.

 

 

밤이 되자 전망대 입구를 칠흑 같은 어둠이 지키고 있다.

저 너머 보이는 부엉산은 어둠에 완전히 잠겼다.

밤이 되면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하여 붙은 이름.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골방에서 잔뜩 움츠러들었을 아이를 상상한다.

지금은 부엉산이 잔뜩 움츠린 시간.

캄캄한 밤하늘이 산에 물들었다.

희부연 능선만이 숨쉴 때마다 부풀었다 가라앉는 등짝 같이 보인다.


 

 

회동저수지.

 

달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이건만 저 멀리 구름도 부연 빛을 낸다.

회동저수지의 수면이 어두운 은빛으로 잔잔하다.

한켠에는 가로등에 의지한 몇몇 집들이 까만 산자락에 점박이 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의 일터인 논도 어둠이 키높이로 차올랐다.

산사(山寺)의 고요를 닮은 적요가 가득한 이곳.

다가가면 잔잔한 물소리와 풀벌레의 하품소리, 풀잎들이 부대끼는 바스락 소리가 살살 차 있을 것을 상상한다.

저 옛날 회동저수지 바닥에 마을이 있을 무렵에는 내가 발 딛은 이곳이 고지대였으리라.

더 낮은 곳의 이야기를 품은 저수지는 밤만큼이나 말이 없다.

우주의 빛을 희미하게 지닌 하늘이 외려 더 말갛게 느껴진다.


 

 

 회관과 민가.

 

마을 어르신들의 놀이터인 회관도 지금은 조용하다.

벌써부터 유리문을 쩔겅이며 여닫는 소리가 그리워지는 시간.

그늘이 드리운 삼층 건물은 불현듯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슈퍼에서 나온 한 노인이 무심한 걸음으로 회관 옆을 지나친다.

회관 너머 멀리로 보이는 작은 민가는 아직 불을 밝히고 있다.

인기척은 없지만, 세피아 모노톤의 풍경 속에 저 하얀 빛이 저리도 따뜻해 보일 수가 없다.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오는 애비를 반기는 현관문과,

이불 맡에 앉아 엷은 졸음을 손사래로 쫓으며 기다리는 아내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사람보다 먼저 오는 발소리.

일어나는 걸음보다 먼저 문을 열어주는 그리움.


 

 

마을버스, 귀가

 

장전 지하철역에서 이곳까지 들어오는 마을버스의 종점은 바로 회관 앞이다.

하도 오랫동안 마을분들을 태우고 다니다보니

버스 기사가 마을 어르신들과 두루 친해졌을 정도라는 마을버스.

밤 열시 반까지 꾸준히도 다닌다.

어둠 속에서 희게 눈뜨고 길을 잃지 않는 건 사람이다.

이 버스를 타면 밖으로 나간다.

오륜동의 할머니들도 밖으로 나갈 일이 있으면 이용하는 마을버스다.

긴 세월이 갉아먹은 무릎 탓에 보통 사람들은 몇 분 안에 갈 거리를

십오 분이나 걸려서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내려오신단다.

그 할머니의 집이 있을 저 너머는 까맣게 잠들어 있다.

 

이제는 밤마실을 끝낼 시간이다.

늦은 귀가자의 재촉하는 발길에도,

아직 휘청이는 도로 너머 도시의 불빛도,

두 세계를 넘나드는 마을버스와,

슈퍼 문을 닫는 할머니의 손등주름과,

어젯밤 다 못 꾼 꿈과,

기억을 품은 저수지와,

새벽까지 환할 달빛도.

 

모두모두 평안한 밤이기를.

 

 

사진 by 현 수

 

 

* 이 기사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산문화재단이 주관한 문화이모작 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