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본동에는 없는 것이 많다. 오륜본동에 편의점이 있나요? 아니오. 오륜본동에 치과가 있나요? 아니오. 오륜본동에 커피 자판기가 있나요? 아니오. 오륜본동에 노래방이 있나요? 아니오. 오륜본동에 라면 자판기가 있나요? 네. 오륜본동에 피씨방…… 뭐라구요?
커피 자판기도 없는 동네에 라면 자판기라니? 라면 자판기를 본 적이 있는가? 컵라면이 나와서 내가 직접 물 받아 먹는 그런 자판기 말고. 자판기 안에서 라면이 다 익어서 나오는 거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몇몇 곳에 이런 라면 자판기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부산 시내 어지간한 곳을 다녀봐도 사실 라면 자판기를 볼 일이 없다.
오륜본동 내 김민정 갤러리 앞에 두 대의 자판기가 우뚝 서 있다. 왼쪽에 라면 자판기, 오른쪽에 칼국수 자판기가 어깨동무하여 사이도 좋아 보인다. 재빨리 자판기 뒤를 확인한다. 자판기 안에 김밥천국 주방 이모가 들어가 있을 만한 공간은 없다. 음. 사람이 끓여주는 건 아니란 말이지? 고것 참 신기하다. 라면은 4분, 칼국수는 5분 걸린단다. 궁금해서 안 먹어볼 수가 있나.
<자태도 아름다우신 우리 라면 자판기느님들. 좌라면 우칼국수에 기골도 장성하심이라.>
일단은 라면 자판기다. 돈을 투입하고 나니 조리시간이 카운트되기 시작한다. 4분. 오오, 정말 뭔가 되는구나. 두근두근한다. 뚜껑에 ‘촵스틱 오얼 폴크(Chopstick or Fork)’라고 적혀 있는 배출구 뚜껑을 열고 나무젓가락을 꺼낸다. 4분이면 연인과의 화합을 기대하며 나무젓가락 예쁘게 떼기를 시도하고, 실패하여 상처받은 마음으로 두 가락를 무지막지하게 비벼댄 뒤, 앞니로 젓가락 끝을 살짝 깨물어 총천연 젓가락 오크향을 누리고 있는 모습을 친구가 폰카로 찍는 광경을 목격하고 손가락으로 브이표를 지으며 귀척을 하기에 꼭 적당한 시간이다.
자, 라면이 나왔다. 라면 배출구에서 사각 은박 그릇에 담긴 라면이 쏭 튀어나온다. 아아, 놀랍구나. 면발의 사각 형태가 그대로 유지된 이 앙증맞은 형상! 라면 광고에나 나올 법하게 가지런히 정렬되어 그 특유의 SSS라인 몸매를 유지한 면발을 보면 이걸 들어서 떼는 일에 심각한 죄책감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붕어빵을 머리부터 떼먹을 때의 고통스러운 미안함과 비슷하다.
용기를 내어 맛을 본다. 오오, 이 맛. 라면에서 중요한 것은 면발의 꼬들기(꼬들꼬들한 정도)가 아니겠는가? 젓가락으로 살짝 털어 용수철처럼 웨이브타는 면발을 확인한 뒤 입안에 넣어보니, 오 과연. 평균적으로 가장 많은 이들이 적당히 꼬들한 라면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수준을 칼날 같이 유지하고 있다. 아, 훌륭하지 않은가.
<이렇게 나오는 라면. 저 각잡힌 면발을 보라. 형태가 살아있다. 솰아있네~~>
자, 이번엔 칼국수다. 칼국수 라면이야말로 정점이다. 칼국수 라면을 집에서 끓여본 이라면 알리라. 칼국수 라면이 얼마나 끓이기 어려운지를. 라면 끓이기에 있어서 난이도가 있다면 스낵면과 기스면, 사리곰탕면 등 면발이 얇은 종류가 쉬움, 삼양라면이나 진라면 등의 일반 라면이 보통, 너구리나 짜파게티 등 면발 굵은 라면이 어려움, 그리고 칼국수 라면이 극악쯤 된다. 오래 끓이면 흐물흐물해지고, 그렇다고 짧은 시간 끓이면 칼국수 면발의 접힌 부분이 덜 익어서 딱딱하다. 보통 라면보다 오래 끓이는 걸 생각해서 물을 많이 넣으면 국물이 싱겁고, 보통 라면처럼 넣으면 단박에 쫄칼국수가 되어 버리니 이건 뭐 답도 없다.
5분이 걸려 나온 칼국수 라면을 받아보니, 일반 라면과 마찬가지로 칼국수면의 형태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라면이 나온다. 오오, 감동! 잘 저어서 들고 먹어본다. 아, 좋다. 덜 익어 딱딱한 수준을 갓 넘어서 딱 적당하게 익으니 칼국수 면발이 정말 쫄깃했구나 하는 것이 느껴진다.
<면발 제대로 트위스트해 주신다. 보고 있나, 스크류바, 보고 있나?>
갤러리 관장님은, 인근의 식당들이 전반적으로 가격대가 높은 회식형 음식들이라 이 자판기를 설치하게 되었노라고 하신다. 안에서는 라면에 스팀을 쏘아서 만드는 방식이다 보니 자판기에서 나오는 것임에도 끓인 라면 못지 않게 맛있는 라면이 나오는 것이라고.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작가들과 회식을 하면 속풀이로 그만이라고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시는 것이다.
술깨기에도 좋지만 손가락이 싸늘한 계절이나 밤이면 더욱 좋지 않은가.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몹시도 그리웁구나’ 하는 것은 비단 삼립 호빵만이 아니라 따끈한 라면국물도 있는 법. 비록 삼천 원의 가격대가 좀 세게 느껴지긴 해도, 회동저수지의 아름다움을 완상하면서 이곳에 앉아 즐기는 노천 라면의 맛은 그야말로 소박한 진미가 아닐는지.
* 이 기사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부산문화재단이 주관한 문화이모작 사업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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