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양아치냐? 건달이 동생을 교육시킬 때 쓰는 말이다. 도대체 건달은 뭐고 양아치는 뭐길래 어두운 세계에서조차 중심과 주변의 논리가 만들어지는 것일까. 둘 다 폭력의 세계에 몸담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차이는 원칙과 철학이 존재하느냐 없느냐에서 갈리는 듯하다. 최소한 지켜야 하는 룰을 지키는 쪽은 건달이고 룰 없이 막 가는 것이 양아치다. 폭력이 숭고하기란 쉽지 않겠지만 만약에 폭력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원칙이나 철학이 필요할 수는 있겠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폭력이 없는 세계에서도 이러한 차이는 분명 중요하게 작용할 듯하다.
영화 ‘비열한 거리’를 보면 건달처럼 보이는 세계의 뒷면에 작동하는 양아치적 논리를 잘 보여준다. 폭력의 세계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건달로서의 원칙을 깨기 시작했을 때 이미 폭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이익이면 배신도 가능하다는 논리와 행동은 원칙이 깨짐과 동시에 발생한다. 그리고 원칙이 깨진 폭력의 세계는 영화라는 예술의 세계와 교섭하면서 도처에 원칙 깨진 폭력의 양아치적 변종으로 이어진다. 웃기는 건 양아치들이 서로를 해치는 사이 변함없이 부른 배 톡톡 쳐가며 서로 싸우기를 유도하는 자들의 비열한 웃음이 있다는 것.
세계적으로도 이슈이지만 최근 몇 년 한국에서 사회적 기업의 바람이 분다. 처음에 사회적기업이란 개념이 소개되었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고 책을 몇 권 사 읽었다. 미국의 사례를 담고 있는 조그만 책을 머리 끄덕여 가며 잘 읽었는데 책을 덥자마자 석연치 않은 의문이 생겼다. 기업이 사회적 공헌을 목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국가가 사회적 기업 활성화를 선언하고 다양한 정책과 지원을 한다는 것이 혹여나 국가가 책임져야 할 복지를 민간에 떠넘기기 위한 수단이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었다.
최근 복지 예산은 삭감되는 데도 불구하고 사회적 기업 관련 재원은 부처마다 별도로 마련하는 이상한 현상이 있었다. 무엇이 복지 예산을 줄이면서 사회적 기업 지원을 늘리게 만드는 것인가. 이 모순된 정책의 괴리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걸까. 복지예산 축소로 중고등학생 공부방 급식비가 사라지고 청소년 공부방이 사라지는 사이, 청소년 공부 지원을 컨셉으로 예비사회적 기업이 지원된다면. 의료보험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장애인 도우미 사업을 사회적 기업으로 지원한다면.
그 중에서도 기업형 슈퍼마켓들에 대한 법적 대책 마련에 뜸 들이는 사이(마치 밥을 하고 뜸을 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기업들이 편법적으로 곳곳에 SSM을 오픈한 것에서는 노파심을 넘어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연 정책을 입안하는 자들은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빈부의 문제, 나아가 복지의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가?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한다는 게 고작 전국의 거대 시장 몇 곳에 1~2억씩 내주며 문화적 시장을 만드는 것이란다. 그러는 사이 시장 인근에 SSM이 들어서서 상인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는데도 말이다.
사회적 기업 활성화를 통해서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해가겠다고 지원하며 의기양양해하고 있는 정부의 모습과 SSM이 곳곳의 전통시장 상권을 압박하도록 내버려두는 정책적 후진성 사이에 겨우 실업률에 대한 방어적 통계만 있을 뿐이다. 사회적 기업을 통해 얼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지만 정작 한편에서는 SSM으로 영세 상인들이 거리로 내쫓기고 있으며, 청년들은 아무리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는 일이라지만 한 달에 84만원이라는 지원금으로 대학학자금 대출 상환은 어떻게 할 것인지 막막해하고 있다.
아주 기본적인 복지비용들을 삭감하면서 사회적 문제들을 기업이라는 형식으로 해결하겠다는 발상 뒤에는 돈이면 원칙도 업신여기는 양아치적 논리가 깔려있다. ‘비열한 거리’에서처럼 자기 손에는 땀도 피도 묻히지 않으면서 눈앞의 작은 성과와 이익들로 낮은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제 살 깎아먹도록 부치기는 꼴이다. 아무리 사회적 기업이 유행처럼 퍼진다고 하더라도 선후가 바뀐 시스템 안에서는 그 성과들이 복지를 대체할 수 없다. 사회적 기업은 복지적 환경 조성을 위한 보조적 수단이지 복지를 대체할 논리일 수가 없다.
파리바게트처럼 대기업의 유통망으로 동네 빵집을 몰락시키며 세를 확장하는 것에 침묵하면서, 대기업의 유통망이 시장 상권을 흡수하도록 내버려두면서 아이디어 번뜩이고 뚝심도 있는 사람들이 지역적이고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유통을 만들어보라고 보조금을 조금 쥐어주는 꼴이다. 이런 양아치적 논리가 사회 곳곳에 복제되기 전에 이 철학의 부재가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 지 주시해야 한다.
정부의 지원이 일자리 창출형에 과도하게 쏠려 있다는 것도 결코 달가워할 것이 아니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일자리라는 것도 수많은 사회 문제 중 하나이다. 이런 고용효과에 대한 집착은 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에 대한 접근법으로 사회적 기업이라는 툴을 들고 나왔음에도 실업률 방어에 급급할 정도로 고용정책이 실패하고 있음을 드러낼 뿐이다. 과도한 집착은 고용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세심한 논리를 작동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적 기업은 관공서적 통계의 장난감이 되고, 기업적 성과를 내야한다는 압박 사이에서 ‘사회적 가치’ 고민이 자리 잡을 틈이 별로 없다. 그 사이 그 혼란을 고스란히 자신의 정치적 치적으로 흡수하는 양아치의 웃음을 떠올려 볼 일이다.
'+컬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학, 거대한 장애물에서 지역의 이웃으로! - 신촌 원룸축제 실패와 부산외대의 이전 (0) | 2013.12.16 |
---|---|
선배시발(先輩始發)론을 넘어 후배무용(後輩無用)론으로 (0) | 2013.05.13 |
[특집-협력을 통한 문화의 흐름 3] 어울림의 감동이 있는 지역사회로 (0) | 2012.10.06 |
[특집- 협력을 통한 문화의 흐름2] 청년문화와 지역공동체의 협력 (0) | 2012.09.06 |
[특집- 협력을 통한 문화의 흐름1] 연대를 통한 청년들의 실험 (0) | 2012.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