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지선씨, 밀양으로. 후속편
나는 아침에 부랴부랴 일어나 학교로 서둘러서 갔다. 학교 과방에서 신입생부터 고참 선배들까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12학번 친구들은 귀를 쫑긋 세워 허주영 선배의 밀양상황 브리핑을 듣고 있었다. 허주영 선배는 나와 같은 과 선배인데, 농성장에 꾸준히 방문하여 주민들을 도와오신 분이다. 선배는 밀양 송전탑 문제를 후배들과 함께 고민하기 위해서 하루 동안 밀양에 다녀오는 프로그램을 짰다. 학생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를 기울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지난 9월에 느꼈기에 나는 이번에도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하기로 하였다. 지난 번 밀양을 다녀오고 기사를 쓴 뒤로 학교생활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방문하지 못하였던 것에 대한 죄송함도 한 몫 하였다.
▶ 밀양으로 출발하기 전 현재의 밀양상황 브리핑 중.
도착했을 때의 밀양은 지난 여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피서객들의 흔적을 간간이 볼 수 있었는데 이날 겨울의 밀양은 다소 고요했다. 한전은 대선 기간이어서 송전탑 문제가 논란이 되는 것을 피하고자 공사 진행을 강행하지 않고 있단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처럼 밀양의 뜨거운 투쟁도 잠시 추운 겨울 날씨 속에 묻혀있는 느낌이었다. 높은 고지를 따라 차를 타고 부북면 평밭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낯익고 반가운 얼굴들이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우리를 보고 “착하고 이쁜 애기들이네.”하며 반겨주셨다. 감을 깎아 주시기도 하고, 따뜻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도 주셨다. 감과 고구마는 정말 꿀맛이었다.
아주머니는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지만 지금도 계속 농성장을 지키고 계신다고 하였다. 곧 있을 대선의 결과가 밀양 송전탑 공사 강행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주머니는 “너네들이 꼭 투표를 다 해가지고 대선판을 바꿔라.”고 하시며 투표를 독려했다. “새누리당 후보는 여기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어. 정권 안 바뀌면, 우리는 평생 이래 전쟁해야 한다.” 밀양시는 총선 때도 새누리당에 대부분 투표할 정도로 보수적인 지역이었지만, 송전탑 문제로 인해 표심이 많이 돌아섰다.
이런 현상에 대해 몇몇 사람들이 순진한 주민들을 선동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민들과 직접 대화하지 않은 사람이면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투쟁하는 주민들이 원전의 폐해, 송전탑의 폐해, 송전탑 백지화 가능성 등에 대해 엄청난 전문가라는 것을 말이다. 주민들은 단순히 선동질을 당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자신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에 대해 자발적으로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다. 아주머니들이 젊은 우리들에게 투표 독려하시는 것을 보며 정치와 우리의 삶이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는 우리들.
▶ 밀양의 감은 정말, 정말로 맛있다.
▶ 우리들에게 밀양의 할머니들이 공사를 막았을 당시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우리는 평밭마을을 떠나 단양면에 위치한 헬기장으로 왔다. 이번 여름 문정선 의원이 폭행을 당한 날 방문했던 그 장소다. 그 곳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딱히 농성할 곳이 없어 돗자리를 펴고 앉아 투쟁을 했던 곳에 집이 세워져 있었다. 여름 태풍이 지난 뒤에 주민들이 움막을 손수 만들었다고 하셨다. 집안에는 난로도 있었고 잘 때 덮을 수 있는 이불도 있었다. 농성장은 헬기장을 지나다니는 한전 차량을 밤새도록 지켜보는 데 제격이었다. 그곳에 할머니 두 분께서 농성장을 지키고 계셨다. 할머니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놀라움을 느꼈다. 밀양의 할머니들은 송전탑 문제 이후에 해운대, 서울, 울산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고 계셨다.
할머니들께서 밀양과 같이 투쟁하고 있는 곳들에 지원을 하러 다니셨다. 울산 현대차 최병승 노동자와 현대차 비정규직지회의 천의봉 사무장이 송전탑에 고공 농성하러 오른 것을 보면서는 안타까워 눈물이 났다고 했다. “어느 누구 자식인지 모르지만 자식 키우는 심정에서 보면, 장가도 안 간 것들이 높이 올라가 있으니까 억수로 마음이 아프데. 저 추운데 얼마나 힘들꼬. 높이 올라가서 얼굴도 보이지도 않데.” 그뿐만이 아니다. 할머니들은 신고리 5,6호기 주민 공청회, 삼척원자력 발전소 공청회 등에도 참여하셨다. 할머니가 나보다 더 많은 정치의 장에 뛰어들고 계셨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여태껏 주변의 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지 못한 것에 부끄러워졌다. 여태 내가 하는 정치 활동은 고작 투표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나의 주변 생활 속에서 투쟁하는 이들에게 손 건네고 마음 쓰는 것이 바로 정치적 행동인데 말이다. 송전탑 문제와 연관된 많은 이들과 연대활동을 하고 계시는 할머니를 보고 많이 반성할 수 있었다. 1
그 외에도 한전의 만행, 농성을 이어가는 현재 상황 등에 대해 할머니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할머니께 인사를 하고 나왔다. 부산으로 가는 길에 한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우리는 오늘 처음 왔는데 하루종일 얻어먹기만 하고, 주민들에게 아무 도움이 못 된 것 같아요. 마음이 불편해요.” 그 말에 공감이 많이 갔다. 이번 여름에 방문을 했을 때, 나 역시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에게 딱히 큰 힘이 못 되어 드렸다. 오히려 좋은 글 쓰는 기자가 되라고 응원을 받고 왔었다. 이날 역시 마찬가지였고, 다른 친구들 모두가 이런 고민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보고 느낀 것이 오늘 하루로 그치는 게 아니라 꾸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면, 1일 동안 다녀온 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리라. 주민들을 만나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정말 소중한 공감의 일이 아닐까 싶다.
▶ 여름 태풍 이후로 더 견고하고 단단한 농성장이 지어졌다.
▶ 단장면 헬기장 농성장에 계신 할머니들이 이야기를 해주시고 계신다.
이번 1일 견학 역시 선배 덕분에 후배들에게는 좋은 배움의 장이 되었다. 학교 주변에서 뒷풀이 시간을 가지며 한 명, 한 명 소감을 들을 수 있었다. 동아리 친구들은 뉴스로만 접했던 일, 머리로만 이해하고 마음으로 공감하지 못했던 밀양 송전탑 문제를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마음으로 공감하는 것으로부터 연대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이번 대통령 선거에 처음 투표권을 얻게 된 나는 12월 19일에 꼭 투표를 할 것이다. 하지만 고작 투표 한 번으로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바뀐다고 해서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평소에 우리 생활 속을 파고드는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것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소외된 이들, 투쟁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주고 힘을 보태는 것이야말로 5년에 한 번 있는 투표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실천일 것이다.
나의 발걸음이 이번 밀양으로부터 시작하여 또다시 누구를 향해, 어디로 향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 울산 현대차 공장 앞 송전탑에서 농성중인 현대차 사내하청 해고노동자 최병승(38)씨와 현대차 비정규직지회의 사무장인 천의봉(31)씨는 2005년 3월 부당해고를 주장하며 처음 법원 문을 두드렸다. 2010년 7월, 그리고 올해 2월 대법원은 “최씨는 불법파견 노동자인 만큼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로 봐야 한다”며 두 차례나 해고 무효 판결을 내렸지만, 회사는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세상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 10월 17일부터 울산현대차 공장 내 철탑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이는 중이다. (한겨레기사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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