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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가라 펀드

친절한 지선씨 밀양으로 2일

#1. 따뜻한 밥. 고요한 산에서의 아침.

우리는 박혜영 아주머니 집에서 묵게 되었다. 차를 타고 높은 고도에 위치한 집을 오르느라 귀가 멍멍해졌다. 아주머니 집에서 밑으로 내려다본 밀양은 정말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밑에서 한전과의 전쟁이 하루하루 벌어진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몸이 피곤했는지 아름다움을 뒤로 한 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 아주머니가 내주신 숙소 덕분에 쿨쿨 잘 수 있었다.

아침밥은 손수 기른 나물들로 이루어진 건강식이었다. 나물들이 모두 입에 착착 감겼다. 아침밥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핵발전소의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두 분 모두 핵발전소에 관해서 척척박사다. 우리보고 학교 친구들 단체로 데리고 오면 잘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해주신다고 했다. 친구들한테 많이 알려달라고도 당부했다. 그렇게 우리는 짧지만 따뜻한 아침을 함께했다.

가족과 비슷한 말을 칭하는 단어로 식구(食口)라는 단어가 있다. 밥 식, 입 구.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피가 섞이지 않아도 같은 밥상머리에서 밥 한 숟갈 함께 뜨는 것만으로도 식구가 될 수 있다. 본지 채 하루도 안됐지만 연고가 없는 사람들에게 밥 한 그릇 퍼주신 아주머니, 아저씨와 우리들은 정을 나눈 식구가 된 게 아닐까.

  평밭마을 산의 경치

#2. 걸쭉한 욕찌거리, 걸쭉한 해학

전날 방문했던 건설공사 4공구 헬기장으로 다시 방문했다. 밤새 주무신 텐트가 자재 쌓인 곳 안쪽에 놓여 있었다. 용해동에서 오신 분들이 지키고 있었다. 새벽에도 직원들과 주민들은 한바탕 몸싸움이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이 날의 공사 진행을 막을 수 있었다.

건설공사에 들어오는 입구에서 주민 분들이 모여 있었다. 농성장도 지킬 겸 밭일도 할 겸 농성장에서 깻잎을 만진다. 한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밤새 텐트를 치고 잤는데 너무 쾌적하고 좋았어. 노숙이 팔자인가봐. 숙자라고 불러줘.”라고 하시며 웃었다. 좀 충격적이었지만 한 주민분이 몸에서 난 배설물을 모아 봉지에 넣어 왔다. 고춧가루 한 봉지도 있었다. 몸싸움 시의 최후의 보루인 무기였다.

한전 지사 건물이 눈앞에 있었고, 직원들이 잠시라도 지나가면 시원하게 욕을 하셨다. “우리 마을 건들이지 말고. 너네 엄마 똥꾸녕에다가 철탑 꼽아.” 몸싸움 중에 엄마뻘 되는 아주머니들에게 xx년이라고 욕했던 젊은 직원한테는 더 시원하게 욕을 하신다. 아주머니들과 우리들은 욕을 해놓고 민망해서 킬킬거리며 웃었다. 우리보고는 어린애들은 들으면 안 된다고 귀 막으라고 하셨다. 이렇게 욕을 해놔야 쟤들도 욕을 안 한다면서 순박한 사람들이 이렇게 욕도 늘어났다고 말씀하셨다. 분노 섞인 욕이었지만, 아주머니들, 우리 모두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주머니가 하는 걸쭉한 욕은 투쟁하고 발악하는데 있어 지친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숨구멍이다. 이마저 못한다면 주민들의 분노 에너지를 어디에 분출할 수 있을까.

주민들이 밭일과 농성을 동시에 하고 있다.

  주민들이 잠을 잔 텐트.

▶시원하게 욕을 하시는 한옥순 여사  ▶그늘을 찾아 옹기 종기 모여있는 우리

몸싸움시 최후의 보루인 고추가루

#3. 사람이 모이면 요구할 수 있다.

낮 즈음 진보신당 단체와 민주통합당 장영달 의원이 공사 자재 헬기장을 방문했다. 전날 있었던 문정선 폭행에 관해서 한전 지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 수십 명의 사람들과 주민들이사무실로 들어갔다. 주민들만 따지러 갔을 때는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많은 사람들과 정치인이 함께 하니 문이 활짝 열렸다. 폭행을 가했던 용역 직원들에게 책임을 따졌다. 여기저기서 그러고도 니가 사람이냐, 너네는 엄마 여동생도 없냐, 등등의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에는 하청업체 직원과 장영달 의원이 1대1 면담을 진행했고, 장영달 의원은 나와서 대화 내용을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하청업체 인부들은 계속 미뤄진 공사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고 토로했으나, 목숨을 건 우리 주민들은 한가롭게 하청업체 투정을 들어줄 단계를 넘겼다. 문정선 의원에게 행했던 폭행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그렇지 않다면 법적 조치를 강구할 것이다.”

사람이 모이니까 목소리가 모인다. 목소리가 모이니 힘이 더욱 실린다. 안 열리던 한전 지사 문도 열린다. 사람 머릿수가 중요한지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실감했다. 힘이 없으면 사람 수라도 많아야 하지 않는가. 서종범 어르신이 한 어린 학생의 손을 잡고 와줘서 고맙다시며 흘리시는 눈물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잠깐의 방문이었지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어르신이 당원들의 방문에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 문정선의원 폭행과 관련해서 설명을 해주시는 아주머니.

주민들에게 있었던 일을 듣는 방문자들.

한전 지사의 문이 열리고 모두 문정선의원 폭행과 관련해 책임을 따지고 있다.

 장영달 의원과 폭행 당사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야기 결과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모습.

#4. 밟아도 다시 일어서는, 베어도 다시 자라나는 강인함.

밀양댐 근처에 철탑 자재들이 쌓여 있는 부지가 있다. 이곳에도 농성장을 마련해놓고 밀양 주민들이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밀양댐 농성장을 지키는 용해동 주민 분들의 낯빛이 문정선 의원 폭행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자 어두워졌다. 몸으로 함께 막아줄 사람이 20명만 되도 수월할 텐데 사람이 없으니까 이렇게 다친다면서 안타까워하셨다. 그래도 더운 햇빛 아래서 아주머니들 눈에서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이길 수 있어. 힘이 들어 자빠지다가도 또 다시 일어나게 돼있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정말, 절망스럽다가도 다시 탁 일어서지고. 죽을 각오로 하면 안되는 게 없어.” 이 말을 듣고 나는 김수영의 시 ‘풀’이 생각났다. 한 행, 한 행분석하며 배울 때는 진짜 재미없었는데 밀양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시를 다시 읊으니 시가 다르게 보인다. 진정으로 ‘강인한 것’이란 무엇일까. 강풍에도 누웠다 슬며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끈질김이 아닐까. 풀은 밟아도 다시 일어나고 낫으로 베어도 또 자랄 수 있다. 주민 분들을 보면서 강인함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김수영 

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뿌리가 눕는다.


#5. 나를 돌아보며

용해동 주민 한분이 “언론도 각성해야해, 기자들도 반성해야해. 어떤 기자들이 찍은 동영상들을 한전에 보내뿌고 하더라. 길에 서있다고 사진 찍어서 가처분 때리고 그런 인간이 어딨노?” 7년 동안 싸웠는데 기자들이 한 번도 눈길 안줬다며 요즘에 들어와서야 관심을 가져주고 있다고 하셨다. 기자들 역시 반성해야 할 문제라고 했다.

세상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 사람들이 알지 못할 법한 사건들에 대해 눈이 되어주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면 지금의 언론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제일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약한 자들의 손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글의 힘이다. 많은 글 쓰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으로 펜을 잡고 있는 것일까? 기사 쓴답시고 설치고 다녔던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스스로 한 점 부끄럼 없는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앞으로는 어떤 글을 써야 할까? 무엇을 위해서 글을 써야 하는 걸까?

밀양댐 농성장에서 만난 용해동 주민분들.

 한전 용역들을 어떻게 꼬집었는 지 나에게 재현하고 있는 사진.

 좋은 말씀들을 듣고 있는 중. 

#6. 한 여름 밤의 꿈같은 밀양에서의 2일

인사를 했다. 한 아주머니께서 “우리 딸”이라 하시며 안아주셨다.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어느새 딸이 되어 있었다. 2일 동안 큰 도움을 못 드리고 오히려 내가 더 힘을 얻었던게 아닐까.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밀양 버스 터미널로 왔다. 버스터미널에 돌아오니 피곤함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차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나를 옮겨 갈 것이다.

짧은 2일이 꿈같이 느껴진다. 전장과 같은 세계에서 돌아와 레포트, 수업, 친구들과의 수다 등등 정신없고 반복적인 생활을 보내고 있다. 정신없는 생활과, 그 속에 묻혀 가기만 하면 되는 편안함에 스스로가 길들여져 버린 것 같다. 학점에 연연해하고 밀린 숙제를 걱정하며 내 앞가림에 정신 쓰느라 바쁘다.

하지만 조금은 내가 변하지 않았나? 시시때때로 보도되는 밀양에 관한 기사에 눈길이 더 간다. 밀양 사정을 잘 모르는 친구들, 주민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일상의 편안함 속에서 살짝은 예민해진듯하다. 2일 동안 맺었던 인연들을 마음 한 편에 잘 접어두고 다시 열어보기를 계속할 것이다. 한 여름밤 꿈같은 시간이 한순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그 꿈의 잔상이 어디로 나를 이끌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