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학습관의 수업에는 어르신들이 많이 온다. 배움에 목이 마른 분들이나, 무료한 낮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찾으시는 이 분들 중에는 일반 주부나 정년이 지난 어르신들이 좀 있다. 가장 어린 분도 70년생이니 강사인 나보다 어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렵고 딱딱한 내용은 힘들어 하실까봐 예시를 많이 들면서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애를 쓴다. 특히 이론 부분이나 인문학적 용어를 써야 할 경우에 조심스럽다. 과연 이 분들이 인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는 계실까 하는 고민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인문학의 개념이 급부상한 요즈음에 젊은 사람들도 인문학이 뭔지를 모르는 지경이니 말이다.
인문학에 대한 정의야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은 학자들이 내리고 있으니 내가 이제 와서 이걸 이야기하면 뒷북이거나 헛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간단히 짚고 가 보자.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다. 영어 단어는 훨씬 직설적이어서 humanity(인간성) 또는 humanitas(인류애)와 같은 말을 들으면 바로 감이 올 수밖에 없다.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이 아닌가.
동양적인 용어로의 '인문학'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글월 '문'자의 어원으로 접근하는 견해도 있던데, 복잡하고 추상적이기만 하다. 그래서 또 "문득 이 단어" 식의 내 맘대로 생각을 해 보기로 한다. 동양에서는 문을 익히는 것을 최대의 가치로 숭앙했다. 밥을 먹고 일만 하면 그것은 농노요, 글을 읽고 학식을 갖추어야 비로소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었다. 물론 이 시대는 문을 한다는 것이 벼슬에 가서 상류계층이 되는 길이었으므로 오히려 잘 먹고 잘 사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지만, 어쨌든 문을 하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격상시키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런 '문' 중에서도 '인'에 대한 '문'이다. 이렇게 보면 인문학이란 인간에 대한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가 된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문'을 할 수 있는 '인'이라고까지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인문학은 사실은 아주 기초적인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의 가치를 판단하고 기준을 세우는 철학이, 과거의 역사를 토대로 오늘을 이해하는 역사가, 글을 통해 감성을 일깨워 아름다움을 누릴 줄 알게 하는 문학이 인문학이다. 그래서 '문사철'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감성을 깨우는 모든 행위에는 인문학적인 입장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다소 추상적인 언어로 전달되는 학문이다 보니 그저 어렵고 딱딱한 소리만 늘어놓는 학문이라는 비난이 적지 않다. 특히나 물신숭배의 사상이 팽배한 요즈음에는 돈벌이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인문학에 대해 가치 없는 학문이라고 깎아내리는 경향도 있다.
오늘날 인문학이 다시 부각되는 것은 이런 물질주의의 폐단을 느끼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사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열심히 공부해온 많은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쓰임이 사라져간다. 취직한 사람은 내내 일과 돈벌이와 부양 의무에 짓눌려 있다. 주부들은 집안일이며 가족들 뒷바라지가 끝나면 공허한 시간을 감당할 길이 없다. 좋아하는 게 있었던 사람은 어느새 그것이 없어져 버린 것이 당혹스럽고, 좋아하는 게 없었던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그런 것도 하나 없이 살아온 것을 깨닫고 상심하게 된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방법, 삶에서 정신적인 풍요를 누리는 방법, 심지어는 석양을 보며 감동하는 방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소설책을 읽어도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자기가 그냥 돈 버는 기계 같고, 하루하루 밥을 먹기 위해 살아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자기 존재의 그 무의미함을 감당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인문학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성과 가치를 이야기하기 위해.
특히 최근에는 인문학이 소통이라는 측면에 많이 집중을 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신적으로 통할 수 있는 관계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단순히 물질적 만족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 기업들은 휴머니티를 일깨우는 감성 광고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생산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지던 기계가 인간의 감성을 중시하며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게다가 SNS를 통한 소통 방식이 부상하고 있는 요즘에는 인문학적인 감성으로 소통에 접근하는 것이 더욱 강조된다. 억눌려온 표현의 욕구와 자기 완성의 욕구가 이제 인문학을 통해 달성될 수 있는 지점에 온 것이다. 그러니, 이젠 인문학이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그 목마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목마름을 억지로 만들어낼 수도 없고, 돈벌이에만 충실한 삶을 인간답지 못한 삶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없다. 가치는 스스로가 느껴야 하는 법인데, 그러다 보니 내 특강을 듣는 한 분이 겪는 딜레마가 생겨 버린다.
이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날따라 다대포의 낙조가 보고 싶어서 집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이 아닌 다른 정류장에 섰는데, 이분이 그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내 나이의 딸을 둘이나 키워내신 대한민국 슈퍼 주부다. 두 딸 중 한 애가 연세대 의대에 갈 정도로 공부를 잘 했는데 건축학을 선택해서 공부하더니, 어느 날 인문학에 재미를 들이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딸과의 소통을 위해 인문학을 알면서 더 나은 가치를 생각하게 되신 분이다.
이렇게 알게 된 인문학이 축복이 되어야 하는데,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딸과 함께 다대포의 낙조를 감상하며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감성을 지닌 이 분, 이제는 주위 사람과의 소통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딸과 이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와는 반대로 아파트의 이웃 주민들과는 말이 안 통하는 것에 답답증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딸이야 같이 인문학을 하므로 통할 수가 있지만, 아파트에 있는 다른 아주머니들은 인문학적 고민이나 소통에 무심한 것이다.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만이 행복한 생이요 정신적 가치에 대해서는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로 어머님은 얼마나 갑갑했을까. 딸 진로를 잘못 잡았다고, 의대에 보내야 했다고 핀잔주는 사람들 앞에서 어머님은 결국엔 입을 다물어 버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시는 한 마디가 가슴에 새겨진다.
"인문학을 하는 일이 고독을 견디는 일인데, 난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이제는 그 고독한 걸 견디기가 힘들어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운 나이에 접어든 어머님은 이제 홀로 인문학에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하는 커다란 딜레마에 놓였다. 사하구 근처에는 참 공교롭게도 인문학적 공간들도 거의 없다. 인문학적 소통을 알게 되면 무엇하는가. 소통에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 묘연한데. '고독'이라는 말이 인문학을 가리키는 말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나는 망연히 고민에 잠겼다.
이날 다대포의 낙조는 몹시도 아름다웠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한가로이 서로의 사진을 찍으며 아름다움을 한껏 만끽하고 있었다. 이미 앞서 여러 차례 말해왔듯, 아름다움을 느끼며 감성을 충족시키는 모든 행위에 인문학적 가치가 있을진대, 그렇다면 그 바닷가의 모두가 그런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말 없이도 미를 공유하고 같은 감정을 누리는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이 고독을 견디는 일이라니.
이제 우리의 삶에는 고민이 필요하고, 인문학도 더 고민이 필요하다. 높은 곳에서 자꾸 지고의 가치만을 강조할 일이 아니다. 인문학이 고독한 학문의 영역으로 은신해서는 안 된다. 문을 하는 인간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후마니타스의 인류애를 계승하는 무언가를 인문학이 해 나가야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문의 위상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돈과 소유에 대한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가 그 가치를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행복의 의미를 바꾸고, 성공의 의미를 바꾸고, 풍족의 의미를 바꾸어야 한다.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감수할 가치가 아니라 마땅한 가치로 나아가야 한다. 인문학을 하는 일은, 바다 위로 떨어지는 노을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니까.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 나는 글을 쓴다. 그리고 다대포의 낙조를 카메라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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