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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리 생존중/[ 문득 이 단어 ] 에세이

봄, 봄, 봄, 좋지 아니한가? - 청춘



  봄이로다, 봄. 이 아니구나.여름이다. 죽도록 덥기만 한 여름. 아니지. 봄이다. 청춘은 바로 봄이 아니던가. 그러나 내 나이는 서른을 넘었고. 조선시대 기준으로 중장년층이다. 청춘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서도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까지를 지칭한다 하니 그만 나이마저 청춘을 넘어가 버렸다. 뜨거운 감자는 노래한다. 다시 오지 않는 나의 청춘 돌아오지 못할 강물처럼 흘러가는구나.1)

  청춘. 이 얼마나 아름다운 두 글자인가. 바야흐로 만물이 생동하는 푸른 봄이다. 푸릇푸릇하니 갓 태어난 새싹들의 싱그러운 생명력으로 가득한. 이 사회에 드디어 움을 트는 십대 후반. '꽃피는 봄이 오면'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한창 활기차고, 바위를 들라 하면 백두산 꼭대기까지 갖다놓을 기세로 충만한 젊음이다. 어찌나 싱그럽고 생명력에 가득차던지 온갖 에로스적인 단어들(봄바람, 춘정 등)과도 결합된 것이 봄이다. 그런 인생이 바야흐로 꽃을 피울 시기인 것이다.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직장동료가 서른이 될 무렵,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대략 사오 년 전쯤 난 그 동료를 볼 때마다 바로 옆에서 '또 하루 멀어져간다'를 열창해 대었다. 그럴 때면 동료는 비참한 표정을 지으면서 파괴력 하나만큼은 봄날의 생명 같은 주먹을 내게 잽으로 날려오곤 했다. '너도 내년이면 내 나이다'라는 미약한 저항도 하더라. 정작 내가 서른이 될 때에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여친의 쇼핑을 따라다니면서 피로를 느끼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줄어들기 전까지 내겐 스물과 서른은 어제와 오늘 차이에 불과했다. 쇼핑 인내 시간도 사실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꺾인 이십대들을 절망케 만드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에서 공감가는 대목은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말이다. 내가 이십대 한창 청춘일 무렵 만들어온 것들이 어느 순간 너무 멀어져 남의 기억처럼 되어버린 지금. 그때 가까웠던 사람들이 마땅한 이유도 없이 멀어져 소식도 알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때의 열정이 객기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류시화의 잠언시집 모음책 제목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곱씹으며 후회가 늘어간다.

아. 그렇구나. 난 내 삶의 조각들과 이별하고 있구나.

  청춘이 아름다운 건, 그걸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알 필요도 별로 없다. 알면 대비는 되겠지. 그렇다고 새싹에게, '여름이 오면 태풍이 와서 자칫하면 니가 뿌리째로 뽑힐지도 몰라'라고 말해주는 건 별로 도움이 못 된다. 괜히 살기 싫어지기만 할 뿐이다. 모든 삶에는 힘든 것이 있다면 즐거운 것도 있게 마련이다. 날백수 생활 3년이 내게서 돈을 앗아갔지만 즐거운 경험을 가져다준 것처럼 말이다.

  요즘 사회는 청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이제 봄이 시작되었는데 굳이 겨울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려주려 한다. 니가 항상 푸르를 것 같아? 가을이 오면 넌 누렇게 되지. 겨울이면 그마저 없다구! 그래놓고는 새싹더러 겨울에 대비해 비닐하우스를 장만하라고 한다. 봄을 즐기는 당신은 베짱이. 베짱이의 말로는 다들 알만하실테니까 패스.

  봄은 봄일 때 봄이어서 아름다운 법이다. 아직 여름 가을도 안 지났는데 자꾸 겨울을 겁주나. 한겨레 신문에서 처음 써서 유명해졌다는 삼포세대라는 말은 푸른 봄날을 조금도 누리지 못하는 오늘의 청춘상을 반영한다. 연애, 결혼, 출산의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 취직이 어려우니까, 노후 기반 마련이 힘드니까. 연애도 사치, 결혼은 남의 이야기, 출산은 가난의 지름길이다. 한국 청춘들의 자화상이 왜 이렇게 블랑카스럽나. 뭡니까, 이게? 나빠요라고 외치고 싶은데 탓할 사장님은 누구인가?2)

  젊음의 본질은 즐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발산할 수 있을 때 생명을 뿜어야 한다. 조금쯤 실수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도 청춘의 시기이다. 늙었을 때의 대비는 커녕 당장 내일 대비도 어려워서야 그건 청춘이 아니다. 날이 좋으면 광안리 바닷가도 걷고, 해운대에서 인파에 휩쓸려도 보고, 남의 대학 운동장 스텐드에서 맥주캔도 까 보고, 음악에 맞추어 신명나게 몸도 흔들어보는 거다(이건 나도 못하지만). 문화를 영위하는 것을 넘어 새롭게 창조해 보고, 그러면서 일상은 또한 일상대로 만들어갈 수 있는 청춘이 그립고, 보고 싶다.

  자연에서의 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에서의 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나의 이십대 시절이 명백히 청춘이었다고 생각한다. 치기어린 사랑, 홀로 떠나는 여행, 아르바이트에도 취해봤고, 무모한 도전도 해 봤다. 아, 마지막은 지금도 하는 거구나. 아무튼.

  어쨌든 봄날은 간다.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소중한 그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가고 있다. 시간은 공평해서 숨쉬기만 하든 백 가지 일을 하든 가 버린다. 다시 돌아봤을 때, 그래도 청춘이니까 할 수 있었던 이야기들로  꽉 찬 오늘을 청춘들이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들이 다음 세대들의 청춘도 봄답게 만들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세상에 항상 푸른 봄이 만개할 테니까.


 


1) 뜨거운 감자, [청춘]에서 가사를 변용하였음
2) 블랑카가 개콘에서 뜬지도 오래 전이고, 나는 지금 청춘들의 개그코드를 모른다. 내가 알던 것들이 구시대의 유물로 되어가는 것 역시, 떠나가는 청춘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