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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생존마감

[ 이 영화봐 show! ] 스펙터클의 안쪽에 무엇이 숨어 있나 - 액션 영화 소고(1)


흔히들 블록버스터라 하면 액션 영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곧잘 생각한다. 하지만 블록버스터는 장르 명칭은 아니다. 한 블록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영국의 4.5톤 폭탄 이름에서 기인해 그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영화라거나, 혹은 사람들이 여러 블록에 걸쳐 줄을 서서 볼 만큼 인기 있는 영화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흥행도에 따르는 일종의 계급장쯤 되겠다.

그런데 이 정도의 흥행력을 갖춘 영화는 액션물이 거의 태반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폭력이 갖는 단순함의 카타르시스가 최대의 요인이 아닐까. 다른 장르의 영화들처럼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 가장 적고 가장 원초적이니까. 

코미디도, 로맨스도 민족이나 사회의 성향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가스 제닝스 감독이 더글라스 애덤스의 베스트셀러 SF 소설을 영화화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만 보아도 그렇다. 이 영화의 영국식 말장난은 영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당최 웃을 수 없다. “Freeze!(꼼짝 마)”라는 외침에 대답으로 “Freeze? I'm not a refrigerator(얼어라 라고? 난 냉장고가 아냐)"라고 말하는 개그를 자막만으로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

드라마 장르는 더더욱 특정 사회 문화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걸작들은 그런 특정 사회 문화나 역사를 다루더라도 그 안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성정을 다루기에 그만한 흥행 성적을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이런 장르는 인간 심리 이해에 대한 노력을 관객에게 요구하게 마련이다. 드라마 장르의 작품이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단순하다면 그 작품은 결코 블록버스터급으로 대박을 치지 못한다.

상대적으로 가장 노력이 적으면서 가장 카타르시스가 강한 장르가 바로 액션이다. 공포처럼 극단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지도 않다. 적과 아군을 너무나도 단조롭고 명쾌하게 잡아놓기 때문에 심리 이해나 감정이입의 과정이 크게 필요하지 않다. 물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이나 이번에 개봉한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만 해도 인물에 대한 몰입이 핵심이긴 하지만, 어쨌든 기본 원리를 따라가자면 그렇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행동의 주체들은 이런 액션 영화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응징당한다. 바로 이 응징의 측면에서 폭력의 정당화가 이루어지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가 권선징악이다. 악당은 극단적으로 나쁠수록 몰입이 잘 되며, 쉽게 죽지 않아야 주인공의 승리가 더욱 돋보인다. 주인공에게 위기 한 번 없으면 시시한 액션물이 되므로 언제나 고난이 있으며, 이 고난을 관객이 예상하지 못한 기지로 헤쳐나가는 데에서 주인공의 비범함이 강조된다.

악당이 가하는 각종 시련과 이를 헤쳐나가는 방법의 양자 모두에서 폭력적 수단을 채택한 것이 액션 영화다. 온갖 법적 절차와 비용의 부담-더 나아가서는 비리에 대한 부담까지-을 져야만 하는 현행법적 응징에 비해 한결 수월한 폭력적 즉결 심판은 좀 더 원초적이고 즉각적이며 뒤끝이 없다. 감옥에서 나오는 악당은 복수를 결심해도 죽은 자는 복수를 못할 테니까당위적 권선징악으로든 현실적 갑갑함에 대한 반동으로든, 액션 영화에서 주인공이 행사하는 폭력은 관객에게 허락된다. 악당의 폭력이야 관객의 허락을 염두에 두지 않는데, 사실 관객들은 이미 악당은 폭력적이다라는 명제를 안고 영화의 세계에 들어서므로 이미 용인된 셈이다.

그렇다고 관객들이 그렇게까지 생각 없이 무조건 다 넙죽넙죽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그저 폭력과 파괴의 카타르시스에만 젖어들어 때려부수기만 한다고 관객들이 좋아하진 않는다는 말이다. 권선징악이라고 무조건 다 정당화가 되는 건 아니니까. 논리가 부재하면 블록버스터급으로 될 수가 없다. , 물론 트랜스포머는 논리가 부재함에도 팬심만으로 흥행했지만, 이건 좀 예외적인 경우고.

예를 들어 지금에 와서 공산주의 국가의 잔당들이 자본주의 국가를 침탈하려 한다는 설정의 액션영화가 나온다면 그리 호응을 받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영화들이 가끔 나오는 것 같아도 가만히 살펴보면 그런 이념은 껍데기에 불과한 경우가 잦다(대신 이를 이면에 숨기고 나오는 영화들은 아주 많은데 이는 앞으로 차차 다루도록 하겠다).

액션영화는 블록버스터급으로 대중들의 인기를 누린다. 뒤집어 말하자면 제작자들은 이만큼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액션 영화가 대중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대상이 반영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도 아주 직관적으로 말이다.

나는 헐리우드의 액션영화들이 지금까지 미국 사회와 미국인들의 대중적 감성 및 기호에 철저하게 부합되어 만들어져 왔다고 본다. 그리고 그 가치가 이 영화들을 타고 전세계적으로 번져가고 있다고도 본다.

오락으로서의 액션물이 정치성을 지니면 그 정치성은 굉장히 수월하게, 빠른 속도로 관객들에게 전파될 수 있다. 누가 그런 걸 생각하고 액션영화를 보느냐고 하겠지만, 권선징악의 기본 개념 안에는 이렇게 하는 자가 선인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악인이다라는 관념이 명백하게 들어있다. 이를 수긍하지 못하면 그 영화에 빠져들 수가 없다. 그래서 액션영화는 자연스럽게 관객의 몰입을 유도한다. 특히 요즘처럼 철저하게 비현실적인 주제에 영화 속에서 현실보다 더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액션씬들은 관객을 완전히 무방비하게 만들어놓기 딱 좋다. 영화가 주는 어떤 정치성이라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무방비하게 말이다. 

앞으로 이어지는 기사들을 통해 액션 영화들의 이러한 영향력들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나는 영화를 즐기는 것엔 찬성이지만 영화를 통한 인셉션'[각주:1]은 원치 않는다. 올해 말 개봉을 예정한 두 작품 26[각주:2]퍼스트 레이디-그녀에게[각주:3]도 생각(혹은 주의)할 거리가 참 많을 것 같으니 말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자기 의식을 먼저 갖출 필요가 있다는 말이 참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영화가 작가의 표현 도구의 하나인 이상 주의해야 할 요소임은 분명하다. 무방비로 영화를 받아들이는 동안 영화는 당신의 귀에다 대고 속삭일 테니까. ‘쟤가 나쁜 애에요, 쟤는 알고 보니 착한 애구요판단의 잣대를 갖는 일이 항상 필요한 시대에서, 어떻게 영화를 볼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1. 인셉션 : 영화 「인셉션」에서는 이 말의 의미를 ‘한 사람의 무의식 속에 그 사람이 원래 갖지 않았던 생각을 주입시켜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것처럼 믿게 만드는 행위’로 설명하고 있다. [본문으로]
  2. 26년 : 강풀의 연재 만화 「26년」을 원작으로 조근현 감독이 연출하는 작품. 전두환 전대통령의 광주 탄압에 대해 26년만에 복수하려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진구, 한혜진, 이경영, 임슬옹 등이 캐스팅되었다. 원래는 「천하장사 마돈나」의 이해영 감독이 연출하기로 되었으나 제작비 지원이 끊기는 등 묘한 이유로 제작이 미루어졌다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제작비 모금을 통해 제작이 들어가게 되었다. [본문으로]
  3. 퍼스트 레이디-그녀에게 :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육영수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 한은정이 육영수 역할을, 감우성이 박정희 역할을 맡게 되었다. 감우성은 이에 대해 ‘인간 박정희에게 끌렸다’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26년」과 비슷한 시기의 개봉이기 때문에 현재 논란이 많으나, 「26년」은 진작 제작 개봉되어야 할 영화가 사정상 이제야 제작되는 거라고 한다면, 이 영화의 경우 대선 후보자의 부모에 대한 일대기 영화가 대선 시기에 맞추어 개봉한다는 점에서 볼 때 정치적 의도가 너무나도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