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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생존마감

[ 이 영화봐 show! ] 오! 닥큐 이야기

  다큐 영화는 기록물로서 오래전부터 만들어져왔지만 사실 극장에서 대중성을 획득하고 상영된 건 그리 오래지 않다. 유머 코드와 기발함으로 승부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일련의 작품군들이나, '동물의 왕국' 스타일의 오! 자연의 경이여 수준 작품 정도가 외국 다큐 중에서도 극장 상영이 있었던 정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큐를 TV에서, 그것이 다큐인지 생각조차 않은 채로 접할 따름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극장에 걸리기 시작한 다큐들은 내 생각에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덕을 좀 본 것 같다만(국제영화제에 소개되어 대중의 입을 타면서 극장까지 갔다 이거다) 실상 그 정체는 당시 발로 만든 어지간한 조폭 코미디 따위들에 비하자면 훨씬 완성도가 높았다. 특히 다큐가 가진 '실화'라는 힘은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극영화를 보며 조금만 우연이 있어도 '개뻥치고 있네!'를 외쳤던 관객들이 다큐 영화 앞에서는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으니까.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보여주는 다큐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다. [사이에서], [우리 학교], [우리는 액션배우다], [좋아서 만든 영화] 등이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었다. 시기상으로는 이들 영화의 중간쯤에 있지만 다큐 영화의 붐에 일익을 담당했던 작품은 사실 [워낭소리]가 아닐까 싶다. 2008년 당시 수많은 대한민국 관객들의 가슴을 울렸다는 이 영화! 극장에서 눈물 바다를 이뤘다는 제보가 속출한 작품이었다. 소와 할아버지의 진한 우정과 삶의 굴레는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공감을, 젊은 사람들에게는 아버지를 돌아보는 계기를 주었다고나.

  나는 이 작품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나 역시 다른 많은 관객들처럼 기대를 안고 보러 갔는데 크게 실망하고 나왔다. 내가 너무 현대인의 계산적인 삶에 익숙해졌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부터 그걸 '강요'하는 표현 방식까지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영화는 할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라고 나온다. 평생 노동하고 살아오신 분이 노후에도 노동에 종사하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동 이외에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삶을 나는 긍정하기 어렵다. 소와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도 온갖 카메라 효과를 동원해 찍어놓은 것도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자신을 소보다 못하게 대하는 할아버지에게 불만이 가득이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사는 할머니의 삶은 중세부터 전근대에까지 지속되었던 여성의 인종을 수긍하게끔 제시되었다. 게다가, 어느 자식들이 영화 속에서처럼 돈에만 신경쓰고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것처럼 나오려 하겠는가. 집에 모여 아웅다웅하는 자식들의 모습은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극영화에서 차용하는 연출과 다를 것이 없다. 노동하는 가장, 이를 한 섞인 애정으로 받아들이는 할머니, 이런 부모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들과 그런 자식들보다 더 가까운 소. 이것들을 다큐스럽지 않은 감성적 클로즈업과 길을 걸어가는 고전적 이미지 상징으로 풀어놓으니 차라리 극영화 같았다. 연출된 캐릭터가 연출된 행위를 하면서 정해진 주제를 받아들이기를 요구하는 것. 작품은 삶을 '보여준다'고 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단지 '보여주고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선을 넘어섰다. 그래서 불편하다.

  실상 다큐도 알고 보면 다 '각본 있는 드라마'라지만 인간극장이나 세상에 이런 일이 등등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다큐보다 극적으로 연출된 다큐에 더 몰입하고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대단한 아이러니이지 않는가. 극영화와는 다른 다큐가 가져야 할 특성이 오히려 외면당하다니.

  그냥 생각하기로는 최근 상영된 '두 개의 문'이 연출과 감정 과잉이 더 심할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감독이 애착을 지닌 실제 대상을 표현하다 보면 할 말이 많아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고 두서없이 제시되기 쉽다. [워낭소리]는 더 심해서, 감성적인 컷들도 그만큼 넣었으면서도 이야기가 산만하기까지 했다. 그러니 불의, 폭력 등의 단어를 떠올리기 쉬운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면 더 그렇지 않을까. 다큐의 이런데 실망하던 즈음이라 '두 개의 문'도 그렇게 보고싶지 않은 상태에서 보았다. 

  그랬더니 웬걸. 극장에서 마지막까지 보고 일어서는데 예측이 빗나갔다. 내용의 진정성 이전에 기본적으로 다큐적 완성도가 높은 것이다. 내가 예상한 것처럼 온갖 이야기를 다 넣으려고 만든 비빔밥 다큐가 아니었다. '그날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면서, 시간 순서대로 사건 당시의 참사를 재구성해간다. 사안의 심각성에 비해 전달 방식 또한 차분하다. 분노에 휩쓸려서 관객을 붙잡고 흔들려는 태도는 이 속에는 없다. 비슷한 주제를 다룬 [블러디 선데이]1)라는 극영화는 훨씬 감정적으로 격렬한데 말이다. 



  인터뷰와 재판 증언, 인터넷 TV의 촬영 영상의 결합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긴박한 순간을 잡은 영상들이 만드는 클라이막스와, 재판 증언에서 보여지는 문제 상황들, 인터뷰를 통해 드러나는 주제의식이 서로 잘 맞물렸다. 편집된 화면은 있을지언정, 연출된 장면도 캐릭터도 없다.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연출'된 클로즈업도 없다. 다른 누군가들이 찍어낸, 아수라장을 그대로 드러내는 핸드헬드 카메라 영상을 '채집'해서 재편했을 따름이다. 인터뷰이들이 감정적일지언정, 그 순간의 장면들이 격정적일지언정, 작품은 아니다. 누군가 분노를 느꼈다면 본 사람이 감정이입을 그만큼 해서일 것이다. 

  사실 이런 작품이 중립적이기란 매우 어려우며 외려 그러길 요구하는 쪽이 더 불합리한 강요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품은 전체적으로 경찰과 농성자 사이의 대립을 조망하면서도 경찰 또한 피해자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영상을 보는 관객들에게도 자신들의 생각을 믿으라고 하기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좋지 못한 선례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선으로 그친다. [루즈 체인지]2)가 911 테러에 대한 음모론을 제시하면서 '우리를 믿으라'라는 말을 하지 않고 '당신이 아는 것을 의심하라'라는 메시지를 창조해낸 것처럼, [두 개의 문]은 '언제까지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방치하고 묵인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메시지를 창조해낸다.

  나는 다큐가 좋다. 잘 만든 다큐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두 개의 문]은 그런 점에서 대단히 만족스러운 작품이었고, [버스를 타라]3)가 모범으로 삼을 만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상 [워낭소리]와는 비교가 가당치 않을 만큼 서로 다른 작품이지만, 다큐로서의 표현에 대해 고민해볼 만한 좋은 표본들이라 생각한다. 사실에 접근하는 자세에 대해,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만들고 꾸미기 이전에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진정성에 대해 말이다.



1) 블러디 선데이(Bloody sunday, 2002) :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팩션 영화. 아일랜드 지역의 자치권을 쟁취하기 위한 비폭력 평화 시위에서 영국 정부군과 충돌하면서 대규모의 희생자를 낳았던 1972년 1월 31일 '피의 일요일'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우리나라의 광주 민주화 항쟁과 비교되기도 하는 이 사건을 다룬 작품의 결말로 가면 '이제부터 IRA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할지 앞으로 두고보라'라는, 대단히 격정적인 메시지를 제시했다.


2) 루즈 체인지(Loose change, 2006) : 딜런 에이버리 작, 911 테러에 관한 음모론 다큐멘터리. 911 테러 당시 있었던 각종 의혹들을 일련으로 정리하면서 이 사건이 지지기반을 잃어가던 부시의 자작극이라는 파격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그러면서 결론에 가서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러한 생각을 끊임없이 나누어 진실로 다가갈 것을 강조한다.

3) 버스를 타라 : 김정근 감독 작품. 부산 영도에 소재한 한진중공업에서 노동자에 대한 부당 처우에 대항해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올라가 309일 동안 저항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전반적으로 보여주기의 기법을 많이 활용했지만 이래저래 정리되지 않고 들어간 이야기들이 많아서 다소 산만하게 만들어진 점이 아쉬운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