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똑똑똑.
노크 소리를 듣자마자 룸메와 나는 서로 눈을 맞추고 동시에 한숨을 쉰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다. 이번엔 오바마일까 롬니일까 속으로 생각을 하며 방문을 여니 아니나 다를까, 이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금발의 대학생이 열정으로 가득 찬 눈을 빛내고 생글생글 웃으며 나에게 묻는다.
- 오 안녕! 난 오바마 캠프에서 왔어! 너 이번 대선 때 투표할 거지?
- 아니, 난 한국인인데?(이번엔 오바마군. 훗.)
- 아, 그렇구나. 그럼 여기 룸메이트는 있어?
- 응, 근데 걔는 콜로라도에서 와서 이미 예전에 우편으로 투표했어. 1
이쯤 되면 그냥 가도 될 법한데, 예상대로 내 룸메를 보고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묻는다. 오늘로 벌써 세번째 받는 질문에 룸메가 떨떠름한 얼굴로 오바마에게 투표했다고 하자 "오바마에게 승리를!"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밝은 미소와 사라진다. 대선날까지는 일주일 남짓 남았을 무렵의 일이다. 2
미국대학생들은 정치에 대한 열정은 미네소타의 차가운 눈을 녹여버릴 만큼 뜨겁다. 자칫 민감할 수 있는 정치적 사안들도 자유롭게 얘기한다. 담벼락과 길 곳곳에는 칼라풀한 분필로 정치적 구호들을 적어놓고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스티커를 가방에 붙이고 다닌다. 난 이러이러한 정당을 지지한다, 라고 대놓고 말하고 다니는 셈이다. 고등학교시절, 모 진보적 매체에서 학생기자를 하다 나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봉변을 당한 적이 있던 나로서는 이러한 문화가 약간 쇼크였다. 3
VOTE NO / SOME KIDS R GAY. THAT'S OK.
때는 바야흐로 2008년의 어느 찌는 여름날, 서울 본사에서 편집모임을 가지고 난 후 서울역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목에 학생기자증을 깜박하고 계속 걸어놓고 있었다. 밤새서 토론한 탓에 몹시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어떤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께서 당시 한창 논란이었던 미디어법을 가지고 갑자기 나한테 시비를 거셨다. 미디어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열을 내시며 갑자기 나에게 화를 내시기에, 자다 깬 나는 비몽사몽 간에 당황한 나머지 다음 역에서 그냥 내려버렸다. 다음 열차를 기다리며 이 어르신이 선량한 시민에게 왜 그러셨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암만 생각해도 내 기자증에 써 있는 한X레신문사 이름 때문인 것 같았다. 기자증을 목에서 빼 가방에 집어넣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고 싶은 말은 두려워 않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말하겠다, 늘상 다짐하던 나. 하지만 막상 이런 일을 겪자, 앞으로 얼마나 많은 반대와 비난들을 마주하게 될 건가, 그 앞에서 떳떳이 나의 생각을 말할 수 있을까, 슬그머니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4
이곳 미국은 한국처럼 시끄러운 유세차량이 매일같이 돌아다니고 빨간색 노란색 당 잠바를 입은 알바들이 춤을 추거나 구호를 외치진 않지만, 사람들은 서로 자유롭게 토론하곤 한다. 이 기간 동안, 대선은 대학생들의 단골 다이닝홀 토론주제중 하나가 된다. 내가 어떤 당을 지지한다고 해서 남을 비난하진 않고 넌 그렇구나, 난 이래, 하고 의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열띤 토론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극도로 정치적인 색을 띠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다. 대학생들에게 대선은 하나의 게임과도 같다. 두 개의 강력한 팀들이 격돌하는 와중에 자신이 지지하는 팀이 이길 수 있도록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고 아낌없는 성원을(페이스북에 들어가기 싫을 정도로) 퍼붓는다. 약간 변태적인 접근인 것 같지만, 풋볼게임에 미쳐 있는 모습과 사뭇 닮았다. 그래도 각 정당의 공약에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고, 알려 하는 모습만은 참 보기 좋았다. 5
지난대선, 민주당 후보로 나왔던 오바마와 바이든을 지지하는 누군가가 학교가는 길목에 요렇게 써 놨다.
투표율로만 따지면 한국이 더 높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주요 투표층이 어르신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만큼, 사회 각 계층의 다양한 정치적 요구들을 잘 나타낸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대학생의 높은 정치적 관심도는 다분히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의 안철수 현상의 역할은 눈여겨 볼 만하다. 안철수는 '새정치’를 외치며 기존 정치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놓았고, 젊은 층의 막대한 지지를 얻으며 변화를 이끌어 내었다. 이제 사람들이 정치를 새것과 낡은 것으로 구별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경환 서울대교수는 “대학생 때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며 “기존의 반정치란 정치에 대한 냉소 때문인데, 그렇다면 주권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라고 했다.
여기서 고백을 하나 할까 한다. 나는 내 생애 첫 대선인 이번 대선에서 투표를 하지 못한다. 가장 가까운 투표소는 시카고에 있는데, 시카고는 내가 살고 있는 미니아폴리스에서 차로 7시간 걸린다. 그리고 나는 차가 없다. 돈도 없다. 하지만 시험이 있다. 왜 부재자투표기간을 하필이면 시험기간에 잡아놨는지, 이 넓디 넓은 미국에 왜 투표소가 단 12개 밖에 없는지 이런 사실들이 날 약간 빡치게 했다. 시카고 영사관은 미네소타를 포함해 자그마치 13개의 주를 담당하고 있고 6 이 13개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오직 시카고에서만 투표할 수 있다. 완전 비효율과 불편함의 극치다. 7
한국에 있는 대학생들은 투표를 맘만 먹으면 할수있다는, 여기 바다건너엔 눈물을 머금고 투표를 하지 못하는 불쌍한 어린양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투표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는다. 반값등록금을 원한다면, 투표하면 된다. 투표 날 너무 바빠서 도무지 시간이 없다면, 투표시간을 늘리라고 요구하자. 우리는 지난 2008년 미국의 검은돌풍을 이끌어 낸 주역이 대학생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제 D-2. 대선이 코 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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