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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리 생존중/[ 여기는 아메리카 라져 ] 특파원

한뼘짜리 발걸음




 성큼 태평양을 건너

간다, 바다건너로!   이반 아이조프스키, '아홉번째 파도,' 1850,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국립미술관소장


 오늘따라 날씨가 더 춥다. 지지난 주에는 기숙사 다이닝 홀에서 레어템인 포[각주:1]를 미친듯이 흡입하다가 문득 창 밖을 봤더니 눈이 오더라. 잠시 벙 쪄서 포 면가락을 놓치는 바람에 국물이 옷에 좀 튀었다. 하지만 시월 중순에 눈이 온다 해도, 사람들이 구스다운 자켓을 꺼내 입고 눈사람마냥 거리를 다니고 있어도 그닥 놀라진 마시라. 난 지금 미국 중부에서는 최북단[각주:2]에 위치한 미네소타에 있으니까.

 내 나이 스물 둘[각주:3]. 프레시맨[각주:4] 이 되기엔 약간 늦었다. 뭐, 그동안 아무 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생애 처음으로 밤을 새가며 공부를 했고, 그렇게 도서관을 다니다가 마을버스 기사님과 친구 먹기도 하고, 뜨거운 사랑도 해보고, 힘들기도 즐겁기도 했던 알바도 해봤다. 열심히 공부했던 결과가 썩 나쁘지는 않아, 원하는 대학에 장학금까지 낼름 챙겨먹으며 미국행까지 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오기 며칠 전, 이제 곧 떠난다는 생각에 괜스레 방을 한 바퀴 휙 돌아보다 문득 발견한 건, 철들 무렵부터 내 방 한구석에 붙어있던 세계지도. 찢어진 부분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누런색 테이프마저 그 힘을 다한 채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빛 바랜 지도를 손으로 쓱 훑어보았다. 스위치를 누르면 반짝반짝 빛을 내며 빙빙 돌았던 지구본. 피아노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서있는, 밀짚모자를 쓴 지구본을 무심하게 휙 돌려보았다. 지도와 지구본 위에 그려진 세상은 저렇게나 좁은데, 금강공원의 그 짧은 숲길조차 길다고 헉헉대며 걸었던 내 자신을 생각하니 이내 웃음이 나왔다. 내 작은 손으로도 불과 한 뼘밖에 되지 않는 거리인 미국. 한 뼘짜리 태평양을 가로 질러, 이 곳으로 왔다.


 나한테 왜 이래

 하하호호 들판을 뛰어다니며 복숭아 서리나 해먹던 중학생 시절부터 보아왔던 수많은 미드들 때문일까? 사실 미국에 간다는 사실에 딱히 감흥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시작부터 짜증의 연속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체크인을 하고 짐을 부치고, 여유 있게 보안검색대를 통과했지만 검색대 직원은 날 그냥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자신있게 내려놓은 내 기내용 캐리어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 승객님. 여기 안에 들은 게 뭐죠?
 - 아 그거 기초화장품인데요. 폭탄 아니에요.


 실없는 나의 농담에도 그들은 말없는 정색으로 일관하며 내 가방을 뒤져 화장품들을 다 끄집어 내기 시작했다. 이미 짐을 부친 나는 속으로 제발 다시 부치라고 하지만 말아줘, 하고 빌었지만 결국 추가요금[각주:5]을 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투덜투덜대며 비행기에 올라 첫 번째 경유지[각주:6]인 일본 나리타공항에서 내렸다. 나리타에서 맞닥뜨린 두 번째 난관의 화근은 내 백팩에 들어있던 호치케스. 내가 누구를 찝을 것도 아니고 협박할 것도 아닌데, 자꾸 나한테 호치케스를 들이대며 일본어로 뭐라 그런다.

 - 헤이 ^#&$@(*&$*$@&$&^&#^*@($*#*(@*>
    (심각한 표정으로 내 핑크색 호치케스를 흔들어대며)

 - 아 이거 아무것도 아닌데.. 제가 잘 갖고 있을게요. 플리즈..
(영어로)
 - 노!! @%#^*&$*%%#&$^#&#**@(@)(*@#$%
 - (벙)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더니 찝찝한 표정으로 그냥 통과시켜주긴 했지만, 두 번째 경유지인 시카고에 가서도 검색 당할 생각에 한숨만 나왔다. 소심한 난 불안한 기분으로 호치케스를 소중히 품에 안고 불 꺼진 기내에서 이내 잠에 들었다.



 빨리빨리 갑시다(?)

 기나긴 비행 끝에 드디어 시카고 공항에 도착했다. 드디어 미국땅을 밟은 것이다. 머릿속이 온통 호치케스 생각으로 가득 차서 사실 감회랄 것도 없었지만, 이런 생각을 싹 없애버린 것은 입국심사장을 가득가득X∞ 메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숫자의 사람들. 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아리를 틀어 입국심사장을 가득 채우고도 길게 복도로 이어지고 또 에스컬레이터[각주:7]까지 이어지는, 실로 광대한, 꼭 언젠가 티비에서 보았던 여수엑스포에서의 긴 행렬 같았다.[각주:8]

 더 황당했던 건,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일하고 있던 입국심사관들의 수는 극히 적었고, 창구도 절반은 닫혀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인들이 일을 지지리도 못한다더니 입국하자마자 나한테 엿 먹일 줄이야. 한국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렇게 일이 박 터지게 많을 땐 분명히 열 수 있는 창구는 다 열고, 가능한 근무자는 모조리 끌어모아서 어떻게든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했을 거다. 빠르고 정확한 일처리를 원하시면 한국인을 불러주세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멀쩡하게 일을 하다가도 밥 먹을 시간이 되었는지 시계를 한 번 슥 보더니 가차없이 창구 문을 닫고 야속하게 가버린다. 아주 그냥 여유가 넘친다.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불과 이십 초만에 허무하게 입국심사를 끝냈지만, 아아, 님은 가신지 오래. 비행기를 놓쳐버렸다. 여차저차해서 결국엔 목적지인 미니아폴리스행 비행기에 올라탈 수 있었지만 미국 너, 첫인상 별로 안 좋았어.



 하늘 한번 보고, 땅 한번 보고

 하지만 난 곧 미국 특유의 이런 느긋하고 여유 넘치는 일 처리에 익숙해져 갔다. 미국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버스를 탈 때도 밀치거나 먼저 타려 하는 법이 없다. 한 줄로 서서 한 명씩 차례로 올라탄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 승객이 있을 땐 레일을 내려주고, 기사가 직접 휠체어를 전용좌석에 고정시켜준다. 다른 승객들은 당연한 듯 기다린다.

Are you in line?    retrieved from www.wingwire.com


 언젠가 한 번은, 친구네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가게 되어 마트에 가서 음료수와 약간의 스낵을 산 후 셀프 계산대에서 계산하고 있었다. 계산해야 할 총 금액은 삼십 불 정도 되었는데,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나에겐 잔돈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엥간히 거스름돈이 나오겠거니 하고 백 불짜리 지폐를 그냥 밀어넣었다. 하지만 20불짜리 지폐가 세 장 정도 나오더니 기계에 더 이상 돈이 없다는 메시지가 뜨는 거다.

 당황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내 뒤에는 대략 다섯 명 정도가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직원은 너무나도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직원을 부르고, 오고, 기계를 확인하고, 다시 어디론가 가고, 열쇠를 가져와서 열고, 돈을 뽑고 하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도 오래 걸렸다. 사람 좋게 허허 웃으면서 달팽이 같은 속도로 일 처리하는 직원 얼굴에 펀치를 날려버리고 싶었다. 우리나라였다면 넉넉잡아도 오 분이면 될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참을성 있게 계속 기다리고 있는 내 뒷사람에게 너무 미안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를 했더니 그 사람은 나에게 웃으며 자신은 전혀 문제 없고 천천히 일을 처리하라고 말해주었다. 성질 급한 한국인들이라면 이미 째려보고 큰 소리가 났을 텐데, 느린 일처리는 짜증났지만 먼 이국땅에서 받은 낯선 이의 친절이 나에겐 눈물 나게 고마웠다. 애증의 아메리카다.

 이런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은 생활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민족성이나 국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종류의 '문화'다. 미어터지는 입국심사장에서 창구가 적게 열려있어도, 은행에서 내 앞사람이 쓸데없는 일로 너무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도, 지하철을 탈 때도 사람들은 기다린다. 왜? 간단하다. 지금 셀프계산대에서 거스름돈이 없어 다른 사람을 기다리게 만드는 저 사람이 나중엔 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입국심사장에서 사람이 많다고 다른 곳에서 불려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 쉬어야 하는데 쉬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메리칸 스타일 배려의 힘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일 처리도 더딘 것은 맞다. 급한 성질머리를 가진 나는 사실 한국의 일 처리가 그립다. 하지만 마음 편히 먹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이런 문화는, 너무나도 빨라진 오늘날 사회에서 한 박자 천천히 걷게 하고 숨 한 번 더 들이쉴 수 있게 해준다. 미국에 가거들랑, 버스에 너무 빨리 오르려 하지 마라. 조금 더 기다려도 그러려니 하자. 나중에 당신이 누군가를 기다리게 한다 해도 그 사람은 기쁘게 기다려줄 테니까.


 PS: 아참, 시카고 공항에서는 호치케스 안 걸렸다. 에잇 망할 나리타. 독도는 우리땅이다 훗.


  1. 베트남식 쌀국수. 포를 열망하는 수많은 아이들 때문에 엄청 오랫동안 기다려서 획득했다. [본문으로]
  2. 알래스카 제외. [본문으로]
  3. 여기에서는 두살 적게 먹으니까 아직은 스무살이라고 해주면 안될까? 술도 못 사 마신다고… [본문으로]
  4. Freshman; 지구방위대 후레시맨아님. [본문으로]
  5. 팔만 원인가…. 크흑. 여러분 100ml 이상의 액체류는 꼭(미리) 부치는 짐 안에 넣으세요. [본문으로]
  6. 최종목적지인 미니아폴리스 공항은 국제공항이 아니라서 경유를 여러 번 해야 한다. [본문으로]
  7. 사람 너무 많아서 에스컬레이터 정지시켰다. [본문으로]
  8. 이거보고 질겁해서 여수엑스포 안 갔다. 시카고에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갈걸 그랬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