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김황
한국으로부터 약 18000km.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최남단,
남미의 남쪽 끝. 남극대륙과는 불과 한줌의 공간만을 남겨놓은 곳.
밤 11시가 되어도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는 백야현상의 땅.
극지방에 가장 가까운 이 땅을 부르는 지명이 따로 있다.
ㅡ "파타고니아"
인간의 발길이 닿는 마지막 대지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한여름 1에 흩날리는 눈발이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연출했기 때문인지 어쩐지 감상적인 기분이 든다. 세상의 끝을 찾아온 여행자들을 반기는 것은 눈이 시리도록 깨끗한 모레노 빙하와 파이네의 뿔들. 서늘하지만 맑은 남극의 입김을 담은 바람은 두 뺨을 스치듯 어루만지곤 등 뒤로 멀어진다. 바다 건너 저 편, 순백의 설원에 내리는 눈 한 송이가 쌓이는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은 곳. 누가 그랬던가, "자연은 한 번도 예술을 동경한 적이 없다"고. 이 곳은 또 다른 세상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2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저 뒤 늙은 바위봉우리들은 1200만년의 세월을 담았다.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의 모레노 빙하. 높이 70m 거대한 얼음의 성채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세계지도를 펴고 파타고니아 지역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새삼스레, "멀리도 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구글맵을 띄웠을 때 지도 크기를 최대로 키우지 않으면 한국은 보이지도 않는걸. 한국을 떠나 이 곳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0개월. 코끝이 간질거린다, 싶었는데 거울을 보니 어느새 앞머리가 이만큼이나 자라있다. 아시아에서 남미까지 올 동안, 스포츠 머리에서 베토벤이 될 동안 나는 뭔가 바뀐게 있었을까. 피부가 약간 탄 것 외에는 신체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다. 정신적으로는....글쎄, 전에 비해 부끄러움이 없어졌달까, 뻔뻔해진 것 같기도 하다. 그래그래, 지금처럼 두꺼운 낯짝이라면 귀국하자마자 대필살소개팅삼십이연타(大必殺紹介ting三十二連打) 같은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시간과 내 발자국은 쉬지않고 흘렀고 어느 사이에 나는 예까지 도착했다.
아르헨티나 엘 찰텐의 피츠로이. 정상 부근에 항상 구름이 끼어 원주민들은 "연기를 뿜는 산"이라 불렀다.
처음 여행을 시작한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일주일이나 여행을 했는데 전체 일정에서 불과 2%만 지났을 뿐이야!”라며 놀라워했다. 아직도 나머지 98%의 일정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니 마치 내 여행이야기에 마지막 페이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고, 아프리카 한복판에서 백일을 기념할 때도 숱한 여행지들이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었다. 하지만 이제 파타고니아 여행까지 마치고나면 남은 행선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이과수 폭포, 브라질의 리우 정도가 전부. 날짜를 따져도 남은 여행은 한달이 채 되지 못한다. 귀국날짜를 말할 때 지금까진 항상 “내년 2월이요” 라고 답해왔는데 이젠 '다음 달' 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 때마다 어쩐지 어색하고 멋쩍은 느낌. 세상의 끝자락에 서 있는 지금, 동시에 내 여행의 끝자락에 서 있다.
귀국날이 다가옴에 따라 귀국 이후의 생활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도 점점 잦아지고 있다. 귀국하면 무엇부터 할지, 새로 살 핸드폰은 어떤 모델로 할지, 2년만의 학교생활엔 잘 적응할 수 있을지....특별할 것 없는 고민이지만 그런 평범함을 마음 한 구석에서 계속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아싸리 그냥 오늘 자고 내일 눈을 뜨면 내 방이면 좋겠다는 기분마저 든다. 돌아가면 가족과 친구들에게 여행담을 풀며 잔뜩 허세나 부려야지. 내게 주어진 시간과 경비는 온 세상을 구석구석 둘러보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내가 여행에 품었던 판타지를 충분히 충족시켜주었다. 돌아다닐만큼 돌아다녔다. 차라리 속이 시원하다. 이제 그리운 사람들도 볼 수 있고 그간 못 먹었던 음식들도 배터지게 먹을 수 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비집고 쪽잠을 자거나 오늘 밤 몸뚱아리 뉘일 잠자리를 찾아 거리를 헤맬 일도 더 이상 없을테지.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의 프란세스 계곡. 만년설이 산에서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분명 그럴텐데, 이 허전한 마음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걸까. 더 이상 지금처럼 지낼 순 없을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애틋하게 비쳐진다. 사람과 사람이 스쳐가는 이 일상적인 거리 모습마저도 조금이라도 더 두 눈에 담으려 애쓰는 내 모습을 본다. 더 이상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과 유적을 마주하고 솜털 하나하나가 저릿해지는 전율을 느끼는 일은 없겠지. 덥수룩한 머리에 빛바랜 츄리닝, 쓰레빠 질질 끌면서 시장 어귀를 기웃거리는 생활에도 안녕을 고해야한다. 지도를 펴보면 내가 가지 못한 곳들이 아직 이렇게나 많이 남았는데, 그 곳엔 또 다른 기쁨과 설렘, 인연이 날 기다리고 있을텐데....이 찬란한 시간들을 뒤로 하고 돌아가다니. 집을 떠난 그 순간부터 내가 두고 온 것들로부터 점점 멀어져간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그 모든 과정은 애초부터 돌아가는 길을 더듬고 있었던건 아니었을까.
처음부터 예정돼 있던 결말이지만, 막상 귀국한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집이나 가족, 학교나 시험같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보냈던 단어들이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는 이 느낌에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 못지않게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도 기쁘고 설레는 일이지만, 낯선 곳보다 익숙한 곳이 오히려 더 아득하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걸.
조금씩 조금씩, 한국에서의 내 모습을 그리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있는 요즘이다.
..돌아가고 싶어.
....계속 떠나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계속 떠나고 싶어.
산을 좋아하는 트레커들에게 있어 성지로 손 꼽히는 파타고니아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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