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현 수
"자, 여기에 지금 게임을 할 플레이어가 여덟 명 있습니다. 그리고 이 테이블 위의 카드에는 우리 플레이어의 머릿수와 같은 개수의 자원 카드들이 있습니다. 한 종류의 자원카드는 총 아홉 장이 있으므로, 이 게임 안에는 72장의 카드가 들어가겠지요? 게임의 목표는, 자기 손에 있는 여러 종류의 자원 카드를 다른 사람들과 교환하면서 백금이면 백금, 은이면 은 등 한 종류의 자원카드로만 모으는 겁니다. 먼저 다 모은 사람이 종을 치면 이깁니다." 1
내가 이렇게 설명하는 게임이 바로 '핏(Pit)'이다. '핏'은 내가 매주 일요일마다 진행하는 보드게임 모임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돌리는 게임이다. 우리 모임 사람들 사이에서는 '당 떨어지는 게임'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이 게임을 꺼내면, 처음 온 사람들은 멈칫멈칫하지만 해본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게임을 시작한다. "이 게임은 앉아서 못 해요." 2
또한 '핏'은 지금껏 내가 해본 보드게임을 통틀어 가장 시끄러운 게임이기도 하다. 온사방에서 한 장, 두 장, 세 장을 외쳐대는 광경이란. 그야말로 남대문 시장 장사꾼들의 억센 목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교환의 난장판이 펼쳐지는 것이다.
왜 '핏'이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같이 돌리는 게임인가? 이 게임은 사실상 조용히 뒤로 빠져서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교환하고자 하는 카드 장수를 외쳐야 한다. 같은 카드장수를 교환하려는 사람끼리만 교환이 성사되니까. 그런데 두 장을 교환하려고 내린 사람이 세 명 이상일 경우 목소리가 크거나 손이 더 빠른 사람들끼리 교환이 이루어진다. 이기고 싶다면 자기 카드를 내밀어야 하고 소리를 높여야 한다.
카드를 주고받는 가운데에 손이 맞닿는 것도 좋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팔이 엇갈리고 피부가 접촉하고 숨결이 가까워지는 게임은 초면이라는 방어막을 내려준다. 할리갈리와 같은 종치기게임이 주는 친근함도 바로 여기에 있다. 종을 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남의 손등이 불타오르라고 후려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또 한 가지. '핏'은 혼자 뒷짐지고 있을 수가 없다. 한 사람은 최소한 대여섯 가지의 자원을 가지고 있다. 게임에 있는 자원 개수가 여덟 가지인데 한 사람이 대여섯 가지 자원을 손에 쥐고서 교환으로 내놓지 않는다면? 당연히 게임이 끝날 수 없다. 그러니 하다 보면 사람들은 지금껏 카드를 교환해본 적이 없는 사람과 교환을 하려고 하고, 자연스레 다른 사람을 게임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사진 출처 : 다이브다이스 www.divedice.com>
보드게임은 한 공간에 모인 여러 사람들이 일정한 도구를 사용해서 즐기는 게임이다. 카드, 마작, 화투, 체스, 장기, 바둑 등도 그 개념 때문에 보드게임에 포함이 되지만, 보드게임은 그런 류의 게임들보다 훨씬 다채롭다. 그리고 이 다채로운 보드게임에서 내가 가장 높이사는 가치는 그 게임을 함께 하는 사람들 사이의 어울림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핏'은 사람들을 가장 자연스럽게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기막히게 훌륭한 매커니즘을 가진 보드게임이다. '핏'을 돌리고 다섯 판째 이내에 목소리를 올리지 않거나 손을 내밀지 않는 사람은 지금껏 거의 없었다. 테이블 너머까지 교환하겠다고 팔을 죽 뻗으며 손과 손이 끊임없이 엇갈리는데 어떻게 가까워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핏'의 단점이 네 명 이하에서는 별로 재미가 없다는 것이긴 한데, 다섯 명부터는 없던 투지를 만들어주는 게임이 된다. '아, 이런 게 보드게임이구나'라는 걸 느끼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빠른 속도감, 상대방의 카드가 온전히 예측되지 않는다는 우연성(사실은 반쯤 예상을 했는데 엉뚱한 것이 나오는 의외성이 더 재미있지만) 등도 게임에 빠져들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2년이 넘게 보드게임 모임을 부산에서 진행해오면서, 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매번 느껴왔다. 두 번 가량 모임의 인원이 대거로 바뀌었는데, 지금 모임에 오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매번 모임에 왔던 사람들의 80프로는 보드게임을 모르거나 아주 약간만 알다가 모임에 와서 신세계를 접한 이들이다. "학창시절에 이걸 알았다면 훨씬 건전하고 즐겁게 보냈을텐데"라거나, "술을 안 먹고 밤을 샐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등의 열렬한 반응들을 모임을 하며 여러 번 접해왔다. 탁자 주위에 둘러 앉아 이루어지는 머리싸움과 선의의 경쟁(이 부분은 차차 고민해보자) 한 판이 "이 모임에 오려고 일주일을 보낸다"는 말이 나오게까지 된 것이다.
'핏'은 약쟁이 멘트를 빌리자면, 말 없던 사람도 말이 트고 몸이 굳었던 사람이 몸이 풀리는 신묘막측한 게임이다. 그런데 이것은 핏뿐만이 아닌 보드게임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리고 보드게임의 세계는 아직 무궁무진하다(그것이 보드게임의 미덕이기도 하다). 핏으로 대동단결하였는가? 그렇다면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보드게임 이야기를 펼쳐가보자.
*추천 입문친화게임
-핏 : 6-8인일 때 강력 추천. 카드에 문구가 없기 때문에 독어판을 사도 무방하다. 다만 규칙만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 잘 찾아서 참고할 것.
-할리갈리 시리즈 : 3-5인에서 두루 효과적. 종치기를 빙자한 손등치거(er)가 있다면 미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면서 더 불타오르게 된다. 전 시리즈가 한글화가 다 되어 있으므로 굳이 영문판을 찾아내는 사람이 신기한 쪽이다.
-우노 카드 : 3인 이상에서 좋다. 원카드와 흡사한 룰이기 때문에 처음 하는 사람들이 쉽게 익힐 수 있고, 친숙한 게임을 함께 즐기는 느낌 때문에 친화게임으로 괜찮다. 핏이나 할리갈리처럼 손이 맞닿거나 왁자지껄한 요소는 없지만 진입장벽이 낮아서 훌륭한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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