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집에 쌀 떨어질 때쯤 되면 서울에 있는 디자인 회사로부터 외주작업 요청이 온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처음 거래를 하던 때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소통에 큰 어려움을 가져왔다. 전화나 인터넷이 있는데 뭐가 그리 어려울까 싶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이나 느낌들을 설명할 때 회사와 나는 머리 속에 각각 다른 이미지를 떠올렸다. 이러한 상황은 같은 돈을 받으면서 그림을 두 번, 세 번 다시 그려야 하는 번거로움을 낳는데, 외주 일이 익숙하지 않은 초보작가였던 나는 회사의 요구가 잘 이해되지 않을 때에도 다시 질문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질문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여느 날처럼 충분히 이해가 안 된 상태에서 회사로부터 “무슨 말인지 알겠죠?” 라는 질문을 받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라고만 했어도 솔직하게 말했을 텐데, “알겠지요?”는 느낌이 다르다. 이건 “당신이 알 거라고 믿어요, 그렇죠?”같은 뉘앙스인데, 차마 담당자를 실망시킬 수 없어서 “그..그럼요. 대충은 이해했어요!”라고 대답하고 끊었다. 그리고 연신 ‘이게 맞나?’를 중얼대며 그림을 그려서 이튿날 메일로 보냈는데, “맞아요 맞아. 바로 이거예요!^^.”라며 함박웃음 이모티콘을 날려주는 것이 아닌가. 내가 궁예의 관심법(觀心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아마 이때부터였지 않나 싶다.
막 초보 티를 벗고 나니 회사에서 요구하는 일러스트레이션이 뭔지, 요즘의 트렌드나 재료별 특징이나 느낌이 뭔지를 알게 되었다. 이러한 지식은 회사와의 대화에서 ‘척하면 척’하고 말을 더 빨리 알아듣는데 도움이 되었는데, 어떤 날은 컨셉의 10%, 그러니까 통화 상에서 말하는 분량으로는 처음 2문장 정도의 이야기만 들었는데도 전체가 그려지는 신기한 체험을 할 때가 있다. 바로 이때 관심법이 들어가게 된다.
‘내가 너의 마음을 다 알고 있으니 내 뜻에 맞게 하라’
이 어디서 배운 교만한 태도인가 하겠지만, 이 기술을 적절한 때에 올바로 사용하면 클라이언트의 무한신뢰를 받는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진다. 회사입장에서는 단지 두 마디 했을 뿐인데, 자료주고 며칠 기다리니 머리 속에 있던 그림이 메일로 배달되어있는 것이다. 그간 초보작가의 수많은 번뇌와 선택의 기로에서 결정하는 순간들을 지켜보지 않은 담당자 입장에서는 며칠 사이 마술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회사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일일수록 난이도가 올라가서 마술은 곧 요술이 되고 기적이 된다. 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해서 언제나 그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유행이나 트렌드, 문화와 같은 것들을 서로 공유하고 있다면 말이다.
한 번은 지방 영화제 포스터에 사용할 일러스트 작업을 요청 받았는데, 컨셉은 20세기 폭스사 오프닝의 한 장면처럼 그리는 것이었다. 딱 이 정도의 설명을 듣고 알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컨셉이 명확했기 때문에 빠르게 시안을 만들어 보냈는데, 다행이 회사에서 생각하던 이미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나보다. 담당자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맞아요 맞아. 설명도 제대로 못해줬는데, 잘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이따 전화 한 번 줘요^^”
곧바로 냉장고로 달려가 콜라에 얼음을 둥둥 띄워 시원하게 한 잔을 원샷하고, 아주 의기양양해져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몇 가지 추가사항을 듣고 ‘무슨 말인지 잘 안다’며 씩 미소를 짓고 전화를 끊는다. 그제서야 궁둥이에 끈적하게 붙은 팬티가 찝찝하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바람이 통하라고 두 번 톡톡 털어준 후, 아까부터 근지러웠던 등 안쪽을 무심하게 긁으며 티비를 켠다. 편한 자세로 시청하기 위해 자리에 옆으로 돌아 누웠지만, 긴장을 했던 탓인지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며칠 뒤 추가사항을 반영한 원본파일을 메일로 보내주는 것으로 그 작업은 잘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정답을 맞추려는 이 태도를 업계에서만 나타냈으면 참 좋았을텐데, 너무 습관이 되었던 탓일까.
“저기, 아이쉐도우 채도가 높아서 좀 촌스러워 보여요. 두 톤 정도 채도를 다운시키면 피부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생기있어 보일 것 같은데요?!”
만난지 몇 분 안된 여자분에게 요 주둥이가 방정맞게 시동을 건다.
… 다음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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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술(1) (0) | 2014.0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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