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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찬리 생존중/[보드게임 가나다] 보드게임

단순함 속의 심오함, '쿼리도'와 심플한 게임

글.사진 >> 현 수

 


 

 

 

게임에 심플한 것이 있을까. 물론이다. 단순한 게임은 매우, 매우 단순하다. 그 이름도 유명한 '원통 젠가'에 무슨 복잡할 것이 있나. 돌아가면서 나무도막을 한 개씩 빼세요. 무너뜨리는 사람이 /원샷/입수/집니다. 그런 단순한 게임도 다들 깔깔거리며 즐기는 데에는 역시 마주보고 함께 하는 사람과 즐긴다는 보드게임의 중요한 장점 덕분인 듯하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단순한 게임 이상을 즐기기를 어려워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복잡한 룰을 글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높은 텍스트 독해력을 지닌 이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도 있다(그 정도 능력 있는 이들 치고 보드게임 매니아가 아닌 사람도 잘 없다). 보드카페에서는 일분 일초가 다 돈이기 때문에 긴 걸 잘 접하지 못하고, 주변에 설명해줄 사람이 없으면 더더욱 못한다.


일반적인 사람들(보드게임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는)의 경우 설명 시간이 5분을 넘어가면 집중력이 격하게 흐트러진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룰이 심플한 것들이 추천할 만한 게임이 된다. 그런데 그냥 심플하기만 하면 너무 단조로워서 얼마 즐기지 못하게 된다. 뭔가 룰이 단순한데 심오한 맛이 나는 그런 게임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게임을 누군가가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나는 몇 개의 게임을 권해줄 수 있다. 대표적으로 꼽자면 '세트', '블로커스', 그리고 '쿼리도'가 있다.

 


 


'세트'와 '블로커스'의 심오함

'세트'는 12장의 카드를 바닥에 깔아놓고 그 중에서 조건에 부합하는 3장의 카드를 먼저 찾는 사람이 세트라고 외치고 3장을 증명하는 게임이다. 게임에 대한 설명은 다 했다. 상세한 방법? 3장을 가져가고 또 12장을 채우고 계속 한다. 중요한 건 어떤 조건이 있느냐는 거다. 세트가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은 이 조건을 이해시키는 일이기는 하다.


[모양, 크기, 개수, 음영의 네 가지 조건이 각 조건 당 3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각 조건들이 모두 다 같거나 모두 다 다른 3장을 찾으세요]


라고 설명하면 단숨에 사람들의 눈빛에 "그래, 이제 내가 뭘 하면 되는지 말해봐봐"라는 문장이 뜬다. 조금 부연한다.


[모양이 다 같거나 다 다르고, 크기가 다 같거나 다 다르고, 개수가 다 같거나 다 다르고, 음영이 다 같거나 다 다른 3장을 찾으세요]


라고 설명하면 조금쯤 알아듣는 표정이나, 대부분 "개수가 다 같거나 다 다르고"를 말해줄 무렵이면 "모양이 다 같거나 다 다르고"를 들은 걸 까먹은 표정이 된다. 그래서 아예 카드 3장을 들고 말해준다.


[이 세 장은 모양은 다 같고, 크기는 다 다르고, 개수도 다 다르고, 음영도 다 다르죠? 이 세 장은 세트입니다.]


라고 설명하면 마침내 알아듣는 표정이 된다. 그리고 외친다. "아, 하나는 다 같고 나머지는 다 다른 걸 찾는 거란 말이죠?" 오 마이 갓. 그런데 이것까지 다 설명하고 마침내 다 알아듣는 경지에 이르면 그 다음 반응은 둘 중 하나다. "너무 어렵겠다" 혹은 "그런 단순한 걸 왜 해?"

 

 

<위 사진에서 좌측 위아래 두 개는 세트다.

위의 세 장은 '모양은 모두 다르고, 개수는 모두 다르고, 색깔은 모두 다르고, 음영은 모두 다른' 세트다.

아래의 세 장은 '모양은 모두 다르고, 음영은 모두 같고, 개수는 모두 같고, 색깔은 모두 같은' 세트다.

반면 오른쪽 두 개는 세트가 아니다.

오른쪽 위의 세 장은 '개수, 모양, 색깔이 모두 다르지만 음영이 1번 카드와 3번 카드는 같고 2번 카드만 다르므로' 세트가 아니다.

아래의 세 장은 '개수, 음영은 다 같지만 색깔이 1번 카드와 3번 카드는 같고 2번 카드만 다르며, 모양도 1번 카드와 2번 카드는 같고 3번 카드만 다르므로' 세트가 아니다.

유남생?>

 


나는 애초에 후자였다. 룰북 읽는 데에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리고 실제 플레이타임은 2시간 반에서 4시간에 육박하는 '아컴호러'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수준의 보드게임 플레이어인 나는 세트를 처음 이해했을 때 그 세 장을 찾는 게 뭐 대수라고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나 했다. '세트' 게임 개발자가 그 게임 하나로 '세트 엔터프라이즈'라는 회사를 세웠다는 사실을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해보니까 그게 아니다. 처음에는 조건을 셈하며 열두 장을 뒤적인다. 그런 세 장이 지구에는 없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세 장이 보이는 순간 바야흐로 환호가 터진다. 더 익숙해져서 세 장이 자동으로 보이는 순간 내가 울트라 초천재 내지는 슈퍼컴퓨터가 된 기분이다. 누가 나보다 세트를 먼저 찾으면 확 때려주고 싶을 만큼 집중하게 된다.


룰의 조건 자체가 심오해서 아주 단순한 게임임에도 미친 듯이 빠져들게 되기에 일명 "자폐 게임"이라는 별칭까지 붙은 게 '세트'라면, '블로커스'는 훨씬 단순하다.


[타일을 판 위에 번갈아가며 올리면서 더 이상 올릴 자리가 없을 때 남은 타일의 칸수 합이 제일 적은 사람이 이깁니다. 판 위에 타일을 올릴 때에는 자기 타일은 서로 꼭지점끼리만 이어지게 올려야 합니다.]


설명 끝. 더할 것도 없다. 기껏해봐야 각 모퉁이에서 시작한다 정도? 아마 내 생각으로는 가장 설명할 게 없는 보드게임이라고 하겠다. 물론 '원통젠가'도 만만치 않지만. 그런데 이걸 실제로 해보면 치열하다. 내 타일을 최대한 많이 올리려면 내 공간은 확보하고 다른 이의 공간으로 침입해야 한다. 상대는 꼭지점끼리 이어가지 못하게 차단하고, 내 꼭지점은 가급적 연결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실력이 비등비등하면 한 수 차이로 승패가 결정된다. 또 자기에게 어떤 타일이 있는지 다 외우고 있으면 그만큼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다. 굉장한 게임이다. 설명은 1분만에 끝나고, 게임은 계속 돌려하고 싶을 만큼 재미있다.

 


 


쿼리도를 만나다

'세트'나 '블로커스'는 기존에 인지도가 높은 게임이라고 한다면, '쿼리도'는 아직 그만큼은 아니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이 게임은 하기 싫어지게 생긴 박스 디자인 때문일까. 그러나 지가믹에서 나오는 동류의 게임들(퀵소, 필로스, 콰르토, 오보 등등) 가운데 그 깊이에 있어서 단연 최고라 할만하며, 위의 두 게임과 견주어 볼 때 오히려 더 나은 게임이라는 생각까지도 든다.


'쿼리도'는 2인 게임과 4인 게임이 가능하다. 가로세로 아홉 칸씩 81칸이 격자 형태로 배열되어 있는 나무판의 각 모서리 정 가운데 칸(5번째 칸)에 자기 말을 올려놓고 시작한다. 2인이면 서로 마주보게 놓고 4인이면 한 사람이 한 모서리를 차지한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각 플레이어들은 자신의 상대 진영의 제일 첫줄로 자기 말을 먼저 보내야 한다. 게임 중에 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 자기 말을 한 칸 이동시키거나 나무블록을 들고 두 칸치 길을 막는 것. 만약 두 말이 서로 붙어있다면 한 말이 다른 말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리고 나무블록으로 길을 막을 때에는 말이 길을 갈 수 없도록 완전히 차단해서 막으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다른 말을 뛰어넘을 때 그 다음 칸이 갈 수 없는 칸이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1인당 10개씩(4인플일 경우 5개씩) 주어지는 나무블록은 한 번 놓으면 옮길 수가 없으며, 주어진 수량을 다 쓰고 나면 무조건 이동만 해야 한다. 이것이 쿼리도 룰의 전부이다.

 

 

<나무도막은 길을 두 칸씩 막는다.

두 말이 서로 붙으면 한 말이 다른 말을 뛰어넘는다.

그런데 뛰어넘으려고 보니 뒤에 나무도막이 가로막고 있다.

이때에는 왼쪽이나 오른쪽 빈칸으로 이동할 수 있다.

말을 목표지점에 닿지 못하도록 길을 완전히 가로막으면 안 된다.

사진을 보면 유남생, 투?>


복잡하지 않다. 그런데 게임을 시작해보면 얼마나 오묘하게 디자인된 게임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나무도막은 한 번에 두 칸씩 길을 막을 수 있는데, 칸이 총 9개라서 미묘하게 한쪽은 길이 비게 되어 있다. 이것도 막으려면 막을 순 있지만,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자기 말 앞에 나무도막 하나가 놓였을 때 왼쪽으로 갈 것인가 오른쪽으로 갈 것인가의 선택 하나부터가 큰 의미를 지닌다. 고작 길 두 칸치를 막는 나무도막을 어떻게 놓아서 상대가 여러 턴을 허비하게 만들 것인가도 고민해야 한다. 때로는 내가 나아갈 길 하나를 먼저 막아서 원하는 길로 나아가는 과단성도 필요하다. 자신의 나무도막을 먼저 다 소진해서 결국에는 지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도막은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 룰은 단순하지만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전략들이 창출된다. 그런데도 한 게임을 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5분에서 10분 가량밖에 되지 않는다. 놀랍다. 단순한 규칙에서 느껴지는 심오함은 조금 과장하자면 바둑이나 체스에 맞먹는다.

 


 


보드게임 어렵지 않아요

실제로 나는 바둑이나 체스는 잘 하지 못한다. 얘들은 심오해도 너무 심오한 것 같다. 열 수 스무 수씩 멀리 바라보는 사람을 도저히 이길 길이 없다. 수준에 따라 개인의 급수가 정해지는 지경인데 두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보드게임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잘 하는 사람은 확실히 잘 한다. 집중력이 매우 좋고 익숙해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무섭도록 '세트'를 빨리 찾곤 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드게임은 잘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의 갭이 그렇게 크지 않다. 너무 어려운 게임들은 별로 없으니까. 다음 기사에서 더 다루겠지만, 잘 만든 보드게임일수록 그 차이를 줄여주기 위해 노력한 시스템이 있다.


심플하면서도 심오한 게임들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드게임의 매력을 더욱 손쉽게 전해주는 힘이 있다. 배울 땐 쉬운데 할 땐 깊은 맛이 느껴지는 게임들이란 진정코 기본에 충실한 게임이 아닐까. '쿼리도'를 해보시라. 박스에 겁먹지 말고. 안에 다국어 매뉴얼도 들어 있다. 세 번 해보면, 그래서 게임의 흐름을 눈으로 보게 되면 더 깊은 세계로 빠져들 것이다. 보드게임에서 좋은 규칙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외치게 될 거다.


"한 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