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현 수
넌 내가 광부로 보이니?
광부들이 사다리를 놓고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저 멀리 어디메에 금괴가 숨어 있다. 금괴가 있는 곳까지 길을 놓아가서 마침내 금을 발견하면 승리! 모두가 기쁨의 환호에 젖는 순간이 온다. 그러나, 여기엔 커다란 벽이 있으니. 이 광부들 사이에는 사보타지(훼방꾼)들이 숨어 있었다. 사보타지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광부들이 금을 찾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 광부인 척 도와주는 척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막다른 길을 만들어 버린다거나, 광부들이 길을 못 놓게 만든다거나, 길을 에둘러가게 한다거나 등등 각종 딴지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 딴지를 뚫고 금에 닿으려는 광부들과, 기어이 그들을 좌절하게 만들려는 사보타지들의 한판 대결. 그것이 '사보타지'의 핵심이다.
혼이 담긴 구라의 한 판 승부
블러핑 게임이란 허풍치기 게임을 통칭하는 말이다. 이런 게임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로 남들의 뒷통수를 치는 게임군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모든 플레이어들은 자신들 중 누군가(심지어 자기 자신)는 가짜, 혹은 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시작한다. 술자리에서 마피아 게임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바로 감이 올 것이다. 자신이 선량한 시민이라고 주장하던 유모씨, 어쩜 나에게 이럴 수 있냐고 악을 바락바락 쓰던 김모씨가 마지막에 마피아라며 화사하게 웃는 모습에 어이없어한 경험 한 번쯤 누구나 있지 않은가? 바로 그 마피아 게임이 블러핑 게임이다. 1
이 마피아 게임의 원조 게임이자 늑대인간과 마을 사람들의 사투를 테마로 한 게임인 '타불라의 늑대', 서부극을 테마로 하여 보안관 팀과 무법자 팀의 대결을 다룬 '뱅'은 블러핑 게임계의 양대 산맥이라 할 만큼 인기가 많다. 또 이 게임들처럼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악마성의 마차', '패닉 스테이션' 등 블러핑게임으로 분류되는 게임은 하나둘이 아니다. 전면적으로 블러핑 게임을 내세우진 않더라도 '섀도우 오버 카멜롯', '배틀스타 갤럭티카'와 같은 대형 전략 게임에서도 블러핑 시스템을 도입할 만큼 매력적인 요소이다.
<나는야 사보타지.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맞춰 보세요?!?!>
플레이어들이 게임의 일부가 되다
블러핑 게임은 어떤 면으로 본다면 역사상 오래 이어져온 '내부의 적' 테마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니 누군가는 악당이 되고, 때로는(보다 자주) 그 악당들이 승리하기도 한다. 명칭부터가 무법자, 배신자, 훼방꾼, 늑대인간이고, 죽이거나 해치거나 방해한다는 단어들이 사용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권선징악이 아닌 내용상 좋지 않은 게임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블러핑 게임은 조금 다른 각도로 생각해봐야 할 듯하다. 블러핑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플레이어들의 역량이다. 정체를 숨긴 채로 암약해야 하는 인물이 너무 쉽게 티가 나 버린다면 이 게임의 재미는 급격히 반감된다. 고로 블러핑 게임의 재미는 의외성에 있다. 이들 게임의 재미의 포인트가 착한 사람을 괴롭히는 데에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블러핑 게임을 해보면 알겠지만, 게임을 원래 잘 해서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였을 법한 이가 예상대로 악당인 경우(처음부터 니가 뻥쟁이라고 생각했지. 아니나 다를까~~)보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알고 보니 거짓말쟁이인 경우(우와 아까 그 호소와 눈물은 뭐였냐!?)가 훨씬 재미있다.
게임판과 시스템이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기회와 시련의 모든 것이 되는 게임들에 비하자면, 이런 블러핑 게임들은 플레이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게임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게임 자체가 훨씬 다채롭게 살아난다. 그래서 블러핑 게임들은 사실 규칙 자체는 매우 단순한 편이다. 그 단순한 게임을 새롭고 복잡다단하게 만들어주는 건 함께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들이 얼마나 지능적으로 플레이했는지의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다.
게임의 룰은 '당신은 가용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다른 이들이 당신을 친구라 믿게 만들고는 뒷통수를 쳐주세요'라는 한 문장만을 제시해 주었다. 이 목적을 성공시키기 위해 사보타지(혹은 무법자, 혹은 늑대인간 등등)들은 매 순간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행한다. 그러다 보니 게임이 끝난 이후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상대의 행위의 동기가 차근차근 드러난다. 그래서 블러핑 게임은 특히나 다른 게임들에 비해 끝나고 나서 플레이어들끼리 굉장히 많이 소통이 이루어진다. "난 처음부터 니가 이렇게 하는 걸 보고 사보타지인 걸 알았지",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날 늑대인간이라고 의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등의 이야기들이 너나 없이 튀어나온다. 각 플레이어들의 순발력과 기지가 번뜩이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도 신통방통하다. 게임하는 내내 서로의 행동에 반응하는 것이며 게임 이후 대화하는 것이며, 블러핑 게임은 실상 가장 활발하게 상호 소통이 이루어지는 게임들이다.
어느 쪽이든, 어떤 경쟁에서든 목표 달성을 통한 승리를 위해 매진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 위에 덧입혀진 악역 테마는 착한아이 컴플렉스에 지친 이들에게 악역이 주는 일탈적인 매력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자신이 뒷통수 치기의 달인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앞으로 이 분야에 매진하기로 결심하는 이상한 인물이 나왔다는 통계자료는 듣지 못했으니 안심하자. 2
사보타지와 블러핑 게임
이 분야의 게임으로 워낙 '타불라의 늑대'나 '뱅'이 명불허전으로 알려져 있다 보니, '사보타지'는 그 게임의 재미 자체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그러나 일면 '타불라의 늑대'나 '뱅'이 가진 단점 중 하나인, 일찍 게임에서 낙오된 플레이어가 지루해진다는 부분을 보완한 게임이기도 하다. '사보타지'에서는 마지막까지 누구도 먼저 죽어서 낙오되는 경우가 생기지 않는다. 게임의 마지막까지 플레이어들은 서로 경쟁해야 하며, 끝으로 갈수록 더욱 치열하게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한다. 게다가 초반에는 블러핑 게임으로 시작했다가 후반으로 가서 정체가 거의 다 드러나면 그때부터는 정면 대결의 전략게임으로 장르가 바뀌는 게임이기도 하다. 착한 광부인 줄 알고 도와줬더니 사보타지의 정체를 드러내며 방해를 시작해 광부들로 하여금 "브루투스, 너마저!"를 외치게 만드는 훌륭한(?) 게임이다. 3
지금껏 착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숨겨왔던 당신의 구라 실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 바로 이 블러핑 게임에서 말이다.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전략을 짜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라. 자신이 의심받는 상황까지도 역이용해 보라. 만약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면? 가면을 쓰고 웃고 있는 적의 정체를 파헤치고 그들의 음모를 막아내라. 저 악당들이 주는 상상 초월의 시련을 극복하고 정의는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라. 어느 쪽이든, 기대 이상의 재미가 넘칠 것이다.
덧붙임. 블러핑 게임들은 특성상 다인 게임이 대부분이다. '타불라의 늑대'는 8인 이상 24인 이하의 어마어마한 플레이 인원수를 자랑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뱅'은 5인 이하는 비추천이지만 6인이나 7인이 되면 탑5 안에 들어가는 게임성을 지녔다. '사보타지'는 5인 이상 10인 이하에서 훌륭하며, 본문에서 거론하지 않았지만 '사보타지'보다 훨씬 더 불행한(게임성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게임인 '악마성의 마차'는 6인, 8인, 10인플에서 최고이다. 룰은 단순해도 자신의 정체를 속인다는 것은 매우 고차원적인 심리전인 만큼 성인들이 즐기기에 좋은 게임이다. 인원수와 추천 연령대로 보건대, 이들 게임들은 엠티나 여행 등에 최적화된 게임이라고 할 만하다. 오호라. 그러고보니 여름 시즌이로구나~~(후훗)
- 1) 큰 비중을 차지 : 자신의 정체가 아니라 자신의 패를 속이는 류의 게임도 블러핑에 해당한다. 실은 이 부분도 적지 않다(어쩌면 더 많은 게임에서 활용되고 있는지도) [본문으로]
- 2) 이 분야에 매진하기로 결심한 이상한 인물이 나왔다 : 날 믿으라. 대개의 경우 이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악의가 충만한...... 쿨럭. [본문으로]
- 3) 브루투스 너마저 : 셰익스피어의 작품 [줄리어스 시저]에 나온 이후로 유명하게 회자되는 말로,로마의 황제 카이사르(시저)의 암살에 가담한 인물 중에 그가 가장 신뢰했던 브루투스가 있는 것을 보고 낙담한 카이사르가 남긴 대사.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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