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7. 27. 12:00




# 여행을 다녀왔다.

다섯 대륙, 열일곱 번의 비행, 서른세 곳의 나라, 여든여개의 여행지들을 찾았다. 수백일동안 수천명의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수만km를 이동하면서 그칠 줄 모르는 감동과 흥분, 환희와 웃음을 맛봤다. 한 번의 여행을 통해서.


# 첫 여행지는 필리핀 마닐라였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첫 여행지에 떨어졌기 때문일까? 모든게 어설펐던 기억이 난다. 방문한 장소의 여행계획을 짜는 법도, 이국땅에서 맘을 여유있게 가지는 법도, 끈덕지게 달라붙는 삐끼를 상대하는 법조차.....나는 그렇게 모든 것에 서툴렀더랬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내 옆 사람의 눈 색깔이 나와 달라도 더 이상 신기하지 않게 느껴진 것은. 또 언제 부터였을까, 내 귓가를 스치는 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해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된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점점 낯섦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여행을 이어가는 사이에, 여행은 생각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들을 알아갔다. 국경을 넘고, 낯선 곳에서 길도 잃어보고, 협잡꾼들과 매일같이 다투고, 만남과 이별, 재회를 반복하다가, 외로우면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찾는....이 일련의 과정은 그저 또 다른 형태의 ‘일상’일 뿐이었다. 비록 내 여행에 굉장한 판타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매순간들이 마음 편했고 사랑스러웠다. 마지막 여행지 브라질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나는 나의 새로운 일상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즐겼다.


#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사람들이 내게 여행을 왜 가냐고 물었다면, 이번엔 내게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었냐고 묻는다. 여행 전후로 내 가치관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었는지, 혹은 얼마나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는지 알고 싶어하는 눈치다. 하지만 어차피 여행이 꼭 철학적인 깨달음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고,[각주:1] 나 역시 어떤 말을 해야할지 난감하기에 보통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데, 상대방은 조금 실망하는 기색이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곧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뜻인 것은 아니다. 그저 구체적으로 표현하기가 힘들 뿐, 여행의 경험들은 자신감이나 자립심 같은, 어떤 정신적 성숙을 알게모르게 이끌어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삶에 외로운 순간이 찾아왔을 때, 혼자서 배낭의 흙먼지를 털던 기억이 힘이 되어주겠지. 아니, 설령 아무런 깨달음과 교훈을 얻지 못했으면 어때. 이렇게 그림같은 풍경과 환상적인 음식, 역사가 숨쉬는 거리와 길 위에서 만나는 인연들이 이어졌는걸. 이것만으로도 벌써 충분히 훌륭한 여행이지 않나?


# 세상은 항상 여행을 떠나라고 부추기며 여행이 얼마나 멋지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를 역설하지만, 여행을 통해 내가 잃은 것들도 결코 적지 않다. 돈과 시간은 기본이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각주:2]를 들 수가 있겠지. 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떨쳐내고 내가 선택한 이 <여행>에 확신이 드는 순간은, “만약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다. 다른 사람의 여행담을 듣고 미지의 세계를 향한 환상만 무럭무럭 키우며 나도 그 때 떠났어야 했다고 후회하는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삶의 한 페이지조차 원하는 방식으로 채우지 못했던 스스로를 평생 자책할지도 모른다.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내 맨발로 느끼고 싶다”는 어느 프랑스 작가의 말 앞에 조금은 당당해진 기분이다.

여행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어느 건물의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지 모를 아름다운 해변의 모습을 담은 그 한 장의 사진에 눈길을 주다가 빙그레 웃어버렸다. 저 사진 속의 장소만큼이나 멋진 곳들을 밟아봤다는 생각에 자부심이 들었고, 오랫동안 꿈꾸던 목표를 내 손과 내 발로 이뤘다는 후련함이 마음 가득 차올랐다.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저 사진을 봤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 눈을 감고 지금까지 스쳐온 여행지들의 이름만 떠올려도 그 장소에 맺힌 기억이 함께 지나간다. 작고 소중한 앨범의 책장이 넘어가듯이, 손때 묻은 영사기의 화상이 흘러가듯이. 그리고 지금, 나는 그 모든 기억들을 뒤로 하고 한국에 있다. 귀국 이후의 생활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교를 다니고 시험기간이라고 비명을 지르는, 그런 평범한 대학생의 생활이다. 한 때는 당연했을 이 익숙함이 처음엔 오히려 낯설게 다가왔지만, 지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하루를 채워나가고 있다. 벌써 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을 보면 한 편으론 씁쓸한 기분이 들지만 그렇다고 이 작은 별을 돌아다니기로 결심한걸 후회하진 않는다. 지난 1년 가까운 시간 사이에 내가 복권에 당첨된 것도 아니고 취직을 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키가 3cm쯤 더 자란 것도 아니지만....그래도 나는 그 시간이 그렇게나 자랑스럽다.

내 20대의 한 자락을 이렇게나 황홀했던 기억들로,

이렇게나 아름다운 이야기로 채워넣을 수 있었음에,

더 없이 감사하다.

ㅡ 나는 여행을 다녀왔다.




  1. 여행이 철학적인 깨달음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고 : 만약 정말 그렇다면, 여행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벌써 신선이 되어 공중부양을 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본문으로]
  2. 그 외에도 여러가지 : 경제학적으로는 선택에 따른 기회비용을, 식품영양학적으로는 불규칙한 식사로 인한 건강문제를, 혹은 관계사회학적으로 부자(父子)간의 가족갈등에 대해, 그것도 아니면 신경정신의학적으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