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찬리 생존중/[글로발로 걷다] 세계여행

내게 바치는 오마주, 제주도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7. 2. 00:19

 

by 김황

 

 

# 귀국날 아침은 생각보다 담담하게 찾아왔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너무 기쁜 나머지 방방 뛰어다니지도 않았고, 여행 중에 차곡차곡 갈무리했던 감정들을 터뜨리며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나는 아침에 눈을 떠서 익숙하게 배낭을 싸고는 호스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촉박한 비행기 시간 때문에 근사한 식사로 귀국을 자축하려던 내 계획이 틀어진게 못내 아쉬울 뿐. 상파울루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 창밖을 보며 내 여행을 처음부터 천천히 되새겨보았다. 여행지에서 보냈던 매순간들의 기억이 차창밖의 풍경과 함께 뒤로 뒤로 흘러가고 있었다.

 


# 인천공항에 도착했음을 알린 뒤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를 받았지만 사실 내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여행지, 제주도가 여전히 남아있으니까.


 6년전 겨울.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연말에 제주도로 떠나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를 돌았었다. 정말 헛말로라도 쾌적한 여행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여행이었다. 숙박비 몇 푼을 아끼려고 모닥불 앞에서 노숙을 하기도 했고 눈발을 맞아가며 역풍 속에서 페달을 밟았다. 날씨는 좋지 않았고 주머니에 돈도 없었으며 또 나는 어렸다. 하지만 나는 그 며칠이 미칠 정도로 행복했다. 푸른 밤하늘에 총총하게 맺혀있던 별빛과 가로등에 하얗게 반사되며 내리는 눈송이는 왜 그렇게 아름다운지. 이 얼마나 자유로운가! 여행에 대한 판타지를 가득 안은 채 집으로 돌아와서 다짐을 했다. "다음엔 세계여행을 해야지."
그렇게 5년이 지나 당시의 다짐을 실천에 옮길 때가 왔을 때, 지구를 한 바퀴 돌고난 뒤 마지막 여행지는 역시 제주도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여행의 꿈을 품게 된 시작의 장소. 그 곳에서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낭만이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한창 하던 중에도 당장 내일 어디 갈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이 길이 어디서 끝날지는 알고 있었다.

 

 


# 6년 만에 다시 제주도를 찾았다. 이제 막 세계여행을 꿈꾸기 시작했던 그 때의 나에게 바치는 오마주와 같은, 그런 여행이다. 누군가에겐 ‘겨우’ 제주도일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바로 그’ 제주도. 내로라하는 해외의 명승지들과 비교하면 감흥이 떨어질 법도 하련만 제주도를 다시 밟는 그 순간은 더 없이 설레고 감흥에 겨웠다. 꿈을 이루고 이 곳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회가 남다르다. 이번 세계여행의 화룡점정,


자전거에 올라타고 페달을 밟은 두 발에 힘을 주자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제주도는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어서,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며 제주가 갖고있는 아름다움을 하나씩 찾아나가는게 제주여행의 묘미다. 파도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다 곰보투성이의 바위에 온 몸을 부딪히고 새하얀 물보라로 흩어지는 모습은 파도의 10초짜리 인생 드라마다. 옥빛의 바다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저 늙은 해녀는 물질의 열매들을 손수레로 개조한 유모차에 실으며 주름 잡힌 얼굴로 환하게 웃는다. 바람 잘 날 없는 제주에서 한 평의 텃밭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그 돌담들, 이 집의 돌담과 저 집의 돌담이 연결되어 끝없이 이어지고 굽이치는 그 모습은 섬을 노래하는 음률을 닮았다. 제주는 사람의 말문이 막힐만큼 광활하고 사람을 압도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 곳을 찾는 사람을 자신의 품 속에서 녹이며 자기 모습을 꾸밈없이 전할 줄 아는 섬이다.

 

 

 


# 이번 여행은 6년 전과는 많이 달랐다. 혼자 자전거를 타며 자기만의 감상에 빠지는게 아니라 친형과 함께 해안도로를 달리며 놀멍쉬멍 웃고 즐겼다. 날씨 또한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창했다. 특히나 지갑사정은 놀랄 정도로 나아져서 선홍빛 선명하고 탱탱한 생선회를 깻잎에 쌈싸먹은 뒤 깔끔한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며 하루의 피로를 씻어냈다. 귤서리를 하면서[각주:1] 주린 배를 채우거나 지X맞은 날씨 탓에 비명을 지르는 등, 뭔가 헝그리한 고생으로 가득했던 과거의 경험과 비교하면 실소만 나올 뿐이다. 같은 사람이 같은 장소를 이렇게나 다른 모습으로 여행할 수도 있구나.


예전과 많이 달라진 제주도 자전거 여행이지만, 한 편으론 분명히 기억이 겹치는 순간들이 있었다. 길을 달리다가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풍경과 거리가 지나가면 문득 그 때의 내 모습들이 떠오르는거다. 아, 쫄쫄 굶다가 저기 저 편의점에서 사 먹은 컵라면이 그렇게 맛있었는데. 아, 저 해안가에선 바람 때문에 자전거가 넘어져서 혼을 담아 “씨바아아알!”을 외쳤었지. 풍경 속에 묻어있는 기억들 하나하나를 떠올리는건 이번 여행의 소소한 재미들이다. 6년 전, 지금보다 많이 어렸던 내가 욕을 한 바가지 쏟아내거나 해방감에 환호성을 지르며 지나쳤던 그 길, 그 풍경들은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오늘까지 남아있었다.

 

 

 

 

 


# 해안도로를 따라 섬을 한 바퀴 도는데는 5일이 걸렸다.[각주:2]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은 성시경의 노랫말처럼 푸른 밤이 빛나는 낭만적인 밤이 아니라 구름끼고 우중충한 잿빛 하늘이었지만 그래도 치느님과 함께하는 맛있는 밤. 가슴 속에 여행의 불씨를 지핀 장소에 되돌아와 기억을 더듬어가며 다시 한 번 그 길을 밟았다. 여행을 정리하는 여행으로서 이만하면 썩 훌륭한 마무리이지 않을까.
다음 날 아침,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한라산 봉우리에 작별 인사를 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시내의 모습을 찬찬히 보노라면 낯익은 간판들이 눈에 잡힌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집 현관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른다. 문이 열린다.

 

집을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 329일.

길었고, 또 짧았다.
여행이 끝났다.


 


 

 

  1. 귤서리를 하면서 : 주인아저씨 죄송합니다.... [본문으로]
  2. 5일이 걸렸다 : 하루 평균 라이딩 시간이 짧은 편이었고, 우도까지 방문한 탓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