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공권력의 부재와 개인의 사투 : 폴 그린그래스론
글 >> 현 수
2002년 개봉한 '본 아이덴티티'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첩보물이자,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 '점퍼', '엣지 오브 투머로우' 등 세련된 스타일의 헐리웃식 액션 블록버스터를 꾸준히 만들어내던 덕 라이만 감독의 작품이다. 기억을 잃은 CIA요원 제이슨 본의 분투를 그린 본 시리즈의 후속작을 이어받은 감독은 영국 출신 감독 폴 그린그래스이다. 폴의 몇 안 되는 필모그라피 중에서도 첫 번째 액션 스릴러 영화인 '본 슈프리머시'는 덕 라이만의 전작과 스타일을 완전히 달리하며 그만의 세계를 창조해낸 결과물이었고, '본 얼티메이텀'으로 이어진 흥행 성공은 헐리우드 액션 영화에 폴 그린그래스식의 다큐멘터리 스타일이 붐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폴 그린그래스를 단순히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스타일을 가져온 감독' 정도로만 평가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다. 그의 의의는 좀 다른 곳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서로 다른 느낌의 영화들을 만들면서도 그가 꾸준히 차용해온 양식이 있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앞에서 간단히 언급했듯 다큐멘터리 촬영 방식이다. 내용적으로 보자면, 이것이 바로 이번 글에서 중요하게 언급할 부분인데, 위기 상황의 발생과 공권력의 부재 하에 놓인 개인의 사투가 골자이다.
블러디 선데이와 플라이트 93
<촬영, 스타일, 구성과 내용 등 빠지는 것 없는 초기 작품. 사진 : 네이버 영화>
폴 그린그래스가 처음 국내에 알려지게 된 계기로는 뭐니뭐니해도 '블러디 선데이'(2002)를 빼놓을 수 없다. 1972년 1월 31일 북아일랜드에서 영국정부에 저항하는 비폭력 평화 행진을 유혈시위로 몰아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했던 피의 일요일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광주민주화운동과 흡사하여 알려진 이 작품에는 크게 보아 2개의 대립 세력이 나타난다. 바로 영국정부와 북아일랜드인이다. 영국정부는 중앙통제실과 현장의 군경병력의 두 진영으로 나누어지고, 북아일랜드인은 평화시위자들과 과격단체인 IRA의 두 진영으로 나누어진다. 감독은 이에 대해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일단 보류하고 팩트를 전달하는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자 그의 장기인 다큐멘터리 촬영 방식을 사용했다. 핸드헬드 카메라로 현장감이 생생하게 전달되는 영상, 영국 기후와 어울리며 영화의 불안함을 조성하는 낮은 채도의 화면.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네 곳을 번갈아가며 바라본다. 평화로운 시위는 군경의 위협과 IRA의 분노 속에서 불안 요소를 점점 키워간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총성이 들려온다. 양 진영은 서로 상대가 먼저 쏘았다고 하며 상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한다. 현장에 없는 정부 통제실은 현장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지시를 내린다. 평화적으로 걷기만 하던 이들은 총알을 피해 우왕좌왕 달아나다 결국 죽음을 맞게 된다. 영국 정부는 IRA를 빌미로 군경의 발포를 정당화하며 이들에게 포상을 내린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이 더욱 의미심장하다. '앞으로 IRA가 어떻게 움직일지 두고보라'는 경고성 절규는 공권력의 부정함에 노출된 개인들이 감수해야 하는 부당함과 그에 따른 분노를 처절하게 시사한다.
<911 테러 음모론이 나오면서 사실이다 아니다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이 영화는 그 완성도 자체만으로 꼭 봐야 할 영화다. 사진 : 네이버 영화>
'플라이트 93'(2006)에서 같은 맥락을 비행기 내로 옮겨왔다. 블러디 선데이와 마찬가지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911 테러다. 당시 건물에 충돌하지 않고 바닥에 추락한 비행기 [유나이티드 93] 안의 상황을 영화로 다룬 작품은 두 군데를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테러리스트들이 비행선을 장악했고, 비행기 안의 시민들은 정부에서 구조해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 곳인 상황통제실은 테러의 위협을 느끼고 우왕좌왕하지만, 비행기가 한 대씩 건물을 충격할 때마다 망연자실해질 따름이다.
영화의 후반부까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는 듯이 굴면서도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통제실을 보면서 관객들은 비행기 내의 사람들이 구조받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을 갖게 된다. 그 시점쯤에서 승객들 역시 밖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주지 못할 거라 판단하여 직접 테러리스트들과 맞서기로 결정하고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두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 이상으로 훨씬 중요한 공통점은 바로 이것이다. 통제실은 현장에 있지 않기 때문에 무력하다. 온갖 기술과 정보력으로 뭉쳐 있는 것 같아도,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은 현장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다. 실제 위기 상황의 발생 시에 결국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공권력은 현장에서 위기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시민들에게 결국 외면되고 만다. '플라이트 93'의 정부는 그나마 자신들의 무능력함을 절감하고 비탄에 빠지기라도 했다. '블러디 선데이'에서의 영국 정부는 외면을 선택했다.
'플라이트 93'에서 비교적 온건한 선택을 했던 감독은 이후 좀 더 노골적으로 개인과 공권력의 대결을 잡기 시작했다. 그 선택이 바로 제이슨 본 시리즈의 후속작을 맡는 것이었다.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 그리고 '그린존'
<폴 그린그래스 감독 필모를 통틀어 최고 흥행작. 이 영화 이후로 헐리우드의 액션은 스타일을 달리했고,
이후 '테이큰'으로 이어지는 현실적인 액션 스타일이 새로이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 : 네이버 영화>
'본 슈프리머시'와 '본 얼티메이텀'은 도입에서 이야기한 '본 아이덴티티'의 후속작이다. '블러디 선데이'나 '플라이트 93'을 만든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특징과 기호를 생각한다면 그에게 너무 잘 맞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기억을 잃은 요원이(라는 설정은 조직의 목적에 공동으로 묶이지 않으면서 이탈한 개인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CIA에 맞서는 내용은 조직과 개인의 대별적인 구도를 돌직구로 그려낸다.
'본 아이덴티티'에선 없다가 폴 그린그래스의 영화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것은 바로 CIA 상황통제실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있다. 인원수, 첨단 장비, 그들의 부정을 막아줄 수 있는 권력과 지위. (통제실을 운영하는 수장이 부패한 인물로 의로운 개인을 쫓는다는 설정 또한 두 편 모두 동일하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활용해 제이슨 본을 추적하고 그를 제거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실패하게 된다. 왜? 제이슨 본이라는 개인의 역량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통제실은 개인을 간과했다. 그들이 완벽하게 갖추어 놓았다는 CCTV에는 사각이 존재한다. 본은 이를 모조리 다 간파하고 피해간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CCTV앞에 나타나기까지 하면서.
'본 슈프리머시'에서 본을 움직이는 것은 복수라는 개인적인 목적이다. 이미 잠적해서 조용히 살고 있는 본을 구태여 찾아내어 죽이려는 CIA의 손에 그를 대신해 죽은 연인의 복수를 하는 과정. 이에서 '본 얼티메이텀'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자신을 쫓는 러시아 경찰에게 그가 날리는 첫장면의 대사나, 그가 완전히 제압한 뒤 죽이지 않은 CIA 암살요원에게 죽이지 않은 이유로 대답한 대사인 "넌 내 적이 아니야"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본이 상대하는 적은 CIA라는 조직 그 자체이지, 그 조직의 지시를 수행하는 한 개인인 경찰이나 암살요원이 아니라는 것. '본 얼티메이텀'에서 본이 쫓는 상대는 바로 그 진짜 적의 정체이다. 정의로운 개인은 복종하는 개인과 대결하지만, 이러한 대결에는 진짜 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점을 폴 그린그래스는 영리하게 꼬집는다.
'본' 시리즈의 경우는 제이슨 본이 워낙에 능력자라는 설정이다 보니 이런 조직과의 대결(그리고 조직을 가지고 노는 능력 발휘)이 가능했다. 폴 그린그래스가 보여주기엔 정치적인 상징성은 있을지언정 그의 촬영 스타일만큼 리얼한 맥락은 아니었으리라. 그래서인지 그는 이후 '그린 존'을 만들면서 좀 더 현실적인 캐릭터로 내려오게 되었다.
<본 시리즈 직후 나온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작품이라 기대가 높았으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건 감독의 작품을 단순 오락영화로 홍보한 오점이 크다. 사진 : 네이버 영화>
'그린 존'의 로이 밀러는 제이슨 본처럼 CIA 최고의 암살요원이 아니다. 그냥 이라크전에 파병된 일개 군인에 불과하다. 그런 로이 밀러가 이라크 전에 숨은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군과 대결하는 과정은 제이슨 본의 그것보다 훨씬 힘겹다.
미국이 이라크전에 투입될 수 있었던 명분인 대량살상무기는 실제로는 없었다는 것은 이제 기정사실화된 부분이니 딱히 신선한 부분은 아니다. '미국이 이라크에 가기 위해 대량살상병기는 없어도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음모론 역시 그렇게 새롭지 않다. 최근 개봉작인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만 보아도 이런 음모론은 미국에서 자성의 차원으로 곧잘 나오는 맥락이다. 다만 대부분의 음모론 기반 액션영화들은 주인공이 비범한 능력(싸움능력이든 뭐든)을 지녀서 여기에 맞선다면(캡틴 아메리카의 경우), 로이 밀러는 그저 한 명의 군인(조직에 부속된 개인)이기에 그의 저항이 처절하고, 또한 폴 그린그래스다운 것이다.
본 시리즈에서는 위기 상황의 발생이라는 요소가 사실상 없다. 그저 CIA에 있어서 제이슨 본의 존재 자체가 위기 상황을 야기시킬 수 있기에 그를 미연에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본에게 주어지는 위기 상황은 정부가 만들어낸 것이며, 고로 개인과 정부의 정면 대결이 성립한다. 한편 '그린 존'의 경우는 이와 유사하면서도 약간은 다르다. 본 시리즈는 제이슨 본이라는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위기가 발생하는 경우라면, 사실상 '그린 존'의 로이 밀러는 정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위기를 조장(이라크전 발발)한 것은 동일하나 그 위기가 로이에게 온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로이가 그 상황에서 진실을 밝히기로 선택하는 순간 이것이 정부의 이익과 대치되는 과정이 되면서 대결이 펼쳐지는 것이다. 제이슨 본과 맞서는 정부는 그의 역량에 비해 무능력하다. 하지만 로이를 잡으려는 정부는 보다 강력하고, 이에 대해 로이는 의로움과 용기로 맞서게 된다. 올곧은 개인을 제거하려는 정부의 노력 하나는 기가 막히게 치밀하다.
'캡틴 필립스'와 앞으로의 행보
<폴 그린그래스는 항상 수준 높은 완성도의 작품을 가져왔다. 그의 최근작 '캡틴 필립스'. 사진 : 네이버 영화>
최근작 '캡틴 필립스'로 넘어오면서 이들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시선이 진일보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공권력은 이전과 달리 무능하거나 부정한 위치가 아니고, 개인은 이해관계가 복잡다단해졌다.
영화는 해적에 의한 납치라는 위기 상황으로 시작한다. 그 상황 속에서 탈출을 위해 노력하는 캡틴 필립스의 노력은 공권력이 미처 닿지 못하는 곳에서 개인의 사투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기본 세팅은 기존의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는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진다. 무역선을 습격한 해적들과 배 안의 선원들이 맞서는 이야기가 전반부이고, 구명정에서 해적에게 유괴된 필립스 선장을 구하려는 군과 탈출하려는 해적간의 갈등이 후반부이다.
위기를 초래한 해적들은 실은 제 생존기반을 잃은 채로 해적질로 떨어져 버린 나약한 인간(개인)들이었다. 이들은 살고자 하는 선장과 마찬가지로 개인이라는 존재이며, 서로 다른 목적으로 충돌했다. 단순하게만 놓고 본다면 '플라이트 93'도 [승객들(개인)]-[아랍 테러리스트(개인)]-[미국(공권력)]이라는 구도이지만 '플라이트 93'이 비중있게 서술한 것은 승객과 미국이라면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해적과 선장에 더 집중하고 있다. 이들은 서로가 개인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많은 장면에서 갈등과 연민의 지점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쉽게 말하자면 해적이기 이전에 미성년자인 해적의 다친 발을 선장은 치료해주고, 목말라하는 선장에게 해적이 물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한편 이 영화에서 나오는 공권력은 이전작들과는 달리 강력하고 냉정하다. 구조를 위해 네이비씰이 투입되는 이유는, 목소리만 들리는 장관의 지시에 따라서이고, 언론에서 크게 다루어지기 때문에 선장을 구해내지 못하면 미국의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이다. 네이비씰 요원들도, 통제실 인물들도, 장관도 모두 한결같이 아무런 감정이 없이 기계적으로 일을 치르는 목소리이다. 그들은 현장에서 개인들과 소통하지 않았기에 피상적인 관찰로 모든 결론을 내린다. [해적이 왔고 타협은 없으니 전부 체포하거나 죽인다]가 그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선장이 구출되는 순간은 권선징악의 후련함보다 비극의 카타르시스가 강하다. 구조되는 순간 선장은 살아났음을 기뻐하지 않고 해적들의 죽음에 절규한다. 구조된 이후 선장이 치료를 받는 장면에서 선장에게는 애도할 틈을 주지 않는 의무병은 계속 선장의 뺨을 때리며 정신을 차리라고 한다. 이 장면은 매우 길고 공들여서 촬영되어 선장이 느끼는 깊은 슬픔의 감정선을 따라가도록 만든다.
<'본 얼티메이텀'을 촬영 중인 폴 그린그래스 감독(좌)과 멧 데이먼(우). 이 영화 시리즈로
두 사람은 본 시리즈의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사진 : 네이버 영화>
'캡틴 필립스'까지를 관통해서 그의 영화의 성향을 이야기하자면 가장 좋은 표현은 '공권력의 부재'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에게 닥치는 위기에 대해 공권력은 무능하거나, 부정하거나, 일방적이다. 이러한 공권력의 위치는 결국 위기 속에 개인이 그대로 노출되게끔 방치한다. 국가의 의무가 국민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의 영화 속의 국가는 무기력하거나 일방적으로 개인을 제압했다. 즉, 국가의 존재가 개인들을 지켜주기는 커녕 위기를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밖에 답이 없는 '개인의 사투'는 때로는 실패로 귀결되거나(플라이트 93의 경우) 때로는 커다란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캡틴 필립스의 경우).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이러한 일련의 행보들은 그의 차기작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단순히 생생한 현장감과 중립적 시각을 넘어서서 그가 표방하는 의미들은 오늘날과 같이 하루가 멀다하고 예상을 초월하는 위기 상황이 닥치는 시점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