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찬리 생존중/[글로발로 걷다] 세계여행

남미 에콰도르, 소년이여 탐정이 되라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1. 27. 19:50

by 김황

 

 



2013년 11월 11일 에콰도르의 야간버스 안에서,
가방을 도둑맞았다.

가방을 잠시 올려놓은 선반에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음에도 나는 가방이 사라지는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야말로 15년동안 군만두만 먹으며 소매치기를 수련한 솜씨였달까. 프로의 비범함은 소매치기의 세계라고 별반 다르지 않구나. 가방 안에는 이런저런 여행물품과 함께 내 보물 1호인 노트북이 들어있었다. 남미에서 벌어진 숱한 사건사고 사례들을 풍문으로 들었지만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줄이야. 21세기 스마트 여행자의 똑똑한 물건관리법을 보여주겠다는 나의 비장한 포부는 이렇게 물거품처럼 흩어지는구나.

도난 사실을 깨닫고 완전 눈뜨고 코베였다는 생각이 들자 패닉이 밀려왔다. 버스 터미널에서 미친듯이 "MY BAG!! MY BAG!!"을 소리쳤지만 사태가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의 현지인들만 날 측은하게 바라 볼 뿐.[각주:1] 그간 여행을 하면서 산전수전 많이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뭔가 신선하다. 도난이란게 분실이나 고장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정신적으로 타격이 온다.

분하다. 또 억울하다. 하나같이 싸그리 X같아서 지금 당장 귀국티켓을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솟는걸 간신히 억눌렀다. 어쨌든 여행은 계속할거다. 아직 여권은 살아있고 스탬프 찍을 페이지도 많이 남아있으니까. 뭣같고 짜증나고 빡쳐도 하고싶은거, 해야하는거는 다 하고 끝낼거다. 남자멘탈이 쿠크다스면 매력 없으니까여.

야간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에콰도르 만타. 대형 참치를 건져올리는 항구.
방파제에 올라가 수평선을 보며 목이 쉬어라 외쳤다. "개새끼야!!!! 잘 먹고 잘 살아라~~!!"


                          < 버스 도둑 따윈 남의 얘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

사흘 후, 다시 키토로 돌아왔을 때 노트북을 다시 구해보려고 해도 방법이 막막했다. 현지에서 노트북을 사기엔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을 뿐더러 가격도 너무 비싸다. 노트북을 한국에서 항공배송하는건 배터리 때문에 불가능. 한국에서 남미로 곧 입국하는 여행자에게 노트북을 사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불안요소가 많다. 그 순간 한 줄기 섬광이 내 뇌리를 관통함. '삥'하는 만화적인 효과음과 함께.

내 가방을 훔친 그 씨방새는 다른 잡동사니들이야 몰라도 노트북만큼은 반드시 팔았겠지. 그럼 그 노트북을 어디에 팔았을까? 한국이라면 네X버 중고나라를 뒤져보겠지만 이 동네에 그런게 있을리는 없고 당연히 오프라인에서 거래하겠지. 옆도시로 원정나가서 팔지도 않을테니 키토의 암시장만 찾아보면 내 노트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곧바로 스페인어 사전을 뒤져가며 짧은 문장을 만들었다ㅡ "버스 도둑. 훔침. 내 노트북. 암시장 위치?"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무작정 그 메모를 들이밀었다. 택시 기사에게도 물어보고 삐끼에게도 물어보고 식당 주인에게도 물어봤다. 내 눈빛에 깃든 광기를 엿보았는지 사람들은 의외로 순순히(?) 위치를 알려주었다. 하나같이 '몬투바'를 지목했고, 그 곳을 찾아가자 전자기기를 판매하는 4층짜리 건물이 있었다. 쭉 둘러보자 척봐도 장물인 물건들이 '중고'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똥구멍에 마데카솔을 발라도 시원찮을 놈들. 저 물건 주인들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헤아려봤을까. 명탐정이 된 기분으로 1층부터 4층까지 샅샅이 둘러봤지만 내 노트북은 찾을 수 없었고, "그래, 이런 드라마같은 일이 일어날리가 없지" 라며 포기했을 때,

발.견.했.다.

똑같은 모델, 남미에 있을리 없는 한글 키보드, 그리고 뒷면의 흠집까지. 틀림없는 내 노트북이 매장 진열대에 새초롬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내 이성의 끈은 첫날밤 새색시 옷고름 마냥 거칠게 풀어헤쳐졌고, 점장의 얼굴에 정의의 철권을 꽂고싶은 충동이 치솟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을 끌어올리며 나 스스로를 달랬다. 침착하자. 여기는 남미. 언어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경찰의 무능과 부패는 극을 달리는 곳이다. 여기서 괜히 성급하게 행동해봤자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뿐. 나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180달러를 지불한 뒤 내 노트북을 들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노트북은 깔끔하게 포맷이 된 상태였으며[각주:2] 스페인어 윈도우즈가 나를 반겨줬지만 일단 내 노트북이 다시 돌아왔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가방을 도둑맞았을 당시만 해도 야밤의 버스터미널에서 꽥꽥 소리를 지르며 지구 반대편에서 한심한 꼴을 당하는 나를 원망했다. 하지만 다시 주위를 추스른 뒤 여행을 이어가는건 그간의 경험을 통해 사건사고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기 때문일까. 어려움이 있어도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계속 길을 이어나가기. 힘든 일이 생겼다고 배낭을 집어던져버리는 순간 여행은 그대로 끝이니까. 이번 일도 그냥 웃어 넘기기엔 내가 잃은 것들이 작지 않지만[각주:3]....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그래. 좋게좋게 생각하자. 소개팅 상대로 하여금 "대박" 소리 나오게 만들 에피소드도 생겼잖아. 아싸.



<키토의 치안은 정말 불안하다. 가령 사진 속에 동상이 있는 언덕위로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올라갔다간 영영 내려오지 못할 수도 있다. 택시타고 언덕가든가 걸어서 천국가든가. 선택은 당신의 몫.>

  1. 내가 불쌍했는지 행상인 아줌마 두 분이 각각 물이랑 떡 같은걸 주셨다. 난 고맙다고 받아서 그 자리에서 분노의 먹방. 감사합니다. [본문으로]
  2. 사진을 수시로 클라우드에 백업시킨건 신의 한 수였다. [본문으로]
  3. 내가 잃은 것 : 가방, 보조 배터리들을 비롯한 여러 소지품, 현금 180달러, 노트북 안의 자료들, 그리고 정신건강.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