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떠나 아메리카로!
by 김황
여행에 회의감이 들었다. 이거 이제 끝낼 때도 되지 않았나?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생각은 아니다. 전부터 아주 조금씩, 두꺼운 천에 물이 천천히 번지듯…그렇게 맘 속에서 들기 시작한 생각이다. 1.다음 행선지를 정한 뒤 2.교통편과 숙소를 찾고 3.볼거리를 찾아 나서는....이 사이클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사이, 여행에 대해 품었던 환상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 됐다. 여행을 지속한다는 것에 슬슬 피로감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 여행을 끝내고 싶어서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귀국’이란 단어가 계속 뇌리 한구석을 맴도는 것을 느꼈다.
여행을 시작한지 7개월, 아시아에서 시작한 여정은 아프리카와 중동을 거쳐 유럽에 이르렀고 그 사이에 어느정도 매너리즘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눈부신 설산, 에메랄드빛 해변, 석양에 물든 사막…세상에 이름난 비경들을 찾았고 세계인이 함께하는 축제들을 찾아 그 흥겨움을 피부로 느끼기도 했다. 때론 바라나시 뒷골목에서 길을 잃었고, 또 때로는 두바이의 마천루에 파묻힌 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두가 아름다운 시간들이었지만….짧은 동안에 너무 많은 것을 쫓아다녔기 때문일까? 풍경도, 거리도, 액티비티도 이제는 어쩐지 다 거기서 거기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근처에 유명한 볼거리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도 침대와 물아일체가 된채 방구석에서만 하루를 보내는 내 모습을 본다ㅡ”아, 그거? 난 됐어. 전에 비슷한거 벌써 봤거든.” 그래, 다닐만큼 다녔고 볼만큼 봤다.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도 어디 가서 여행 적게 했다는 소리는 안 들을테지.
어쩌면 외로움이 이런 생각을 더 키우는건지도 모른다. 유럽을 함께 여행했던 사람들 곁을 떠나 나 홀로 베를린에 도착했을 때 느낀 기묘한 위화감이란. 내 옆에 있던 사람들 다 어디갔어? 다시 또 혼자가 된거야? 숙소는 새로 오픈했기에 더 없이 깔끔했지만 사람의 온기를 방금 막 다 잃어버린 내게는 세련된 인테리어마저 차갑게만 느껴졌다. 아아…이제 이런 부평초같은 생활도 지겨운걸. 나를 반겨줄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는걸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사실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전에 나는 벌써 답을 내린 상태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여행을 끝내는걸 상상해보지만 나는 이대로 여행을 계속 이어갈게 틀림없다. 왜냐고? 글쎄, 여행을 시작할 때와 비슷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여행을 하기로 마음 먹었고 여행을 하지 않으면 후회할거라 느꼈기에 여행을 시작한것처럼, 여행을 끝내기로 마음먹었고 이대로 돌아가버리면 후회할거라 느끼기에 계속 여행을 이어간다고. 뭐, “지구 한 바퀴 돌고 돌아올게” 라고 큰소리 뻥뻥 치면서 나왔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좀 쪽팔리기도 하고.
그런 기분이 든다. 중남미를 앞둔 지금부터는 ‘여행을 하기 위해 여행을 하는’거라고. 뭔가 대단한 것을 화끈하게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계속 길 위에 서있기 위해 여행을 하는거라고. 특별한 것을 찾지 못해도 괜찮아. 이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올 때까지 그냥 앞으로 앞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외로움을 느낀다고? 서러움이 복받칠만큼 좀 더 지독하게 느껴볼래.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고 낯선 음식을 먹으며 시간과 장소를 스쳐지나가다보면 그 하나하나가 추억의 편린이 되어 남겠지.
더 이상 전처럼 “여행을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여행이 끝났을 때 ‘무언가’가 내 안에 남을거라는 확신이 생겼으니까. 그건 여행중에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는 성취감일 수도 있다. 혹은 술자리에서 끝임없이 이빨을 깔 수 있게 만들어주는 여행담일 수도 있겠지. 아니면 내가 끝까지 깨닫지 못할 그 어떤 추상적인 것이던가. 다만 그 무엇이 됐든지간에 그건 내 삶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것이라 믿고 있다. 처음에 마음먹었던 여정을 모두 끝내려면 아직 멀었고, 남은 여정을 통해서도 무언가를 얻으리란 사실을 알고있다.
그러니까 어디 한 번 끝까지 가 보자.
유럽을 떠나 아메리카로.
나는 오늘도 배낭을 주섬주섬 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