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10. 23. 12:29

여행시기 : 2013.8.7

 


여행과 사기, 바가지는 떼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현지 사정과 물가를 잘 모르는 여행객, 그런 여행객의 코 묻은 돈을 노리는 현지인들은 자석의 N극과 S극 같은 관계이니까. 어차피 사기나 바가지를 전혀 안 당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에 나중에 당했다는 것을 알더라도 빨리 잊고 털어내는게 즐겁고 희망찬 여행으로의 지름길이라 할 수 있겠다. 내 여행도 5달차로 접어들고 여행객을 노리는 검은 손길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어느 정도 터득해서 자신감도 생길 무렵, 나는 내 마음에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사기를 겪었다. 이미 배낭여행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이집트에서다.(1)


이집션들의 사기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피라미드 낙타 사기’다. 관광객들에게 접근해서 “낙타(혹은 말)를 타고 피라미드를 구경하라”고 꼬시는데 그 가격이 터무니없는 바가지라는 것이 문제. 여러 피해사례를 사전에 접했기에 난 “내가 당할 일은 없겠지” 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천하의 멍텅구리가 아닌 이상에야 이미 알고있는 사기나 바가지를 당하진 않을테니까ㅡ그런데 그걸 제가 당했습니다. 헐ㅋ


피라미드 근처의 지하철역에 내려서 직원에게 피라미드로 가는 방향을 물었을 때 한 이집트 남자가 접근했다. “너 피라미드 가는 길이야? 나도 피라미드 구경할건데. 같이 갈래?” 이런 수법은 정말 닳고 닳은 고리타분한 수법인데, 따라가면 십중십구 사기나 삐끼로 이어진다. 코웃음을 치고 돌아서려고 했지만 그 남자는 나를 무장해제 시키는 비밀병기를 갖고있었다.


남자 옆에 서 있는 아내. 그리고 남자의 품에서 새근새근 졸고있는 아기.


‘우와아, 나도 참 운이 좋지. 현지인 가족여행자들을 만나서 함께 가다니!’라고 기뻐했던 당시의 내 모습은 머리끄댕이를 붙잡고 한바탕 탭댄스를 추고 싶을만큼 멍청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족과 함께 카이로 여행을 왔다는 남자를 나는 정말, 정말, 정말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내와 함께 아기까지 안은채 피라미드로 향하는 이 남자가 관광객이 아닐거라곤 생각치 못했으니까. 피라미드로 향하는 그는 내게 친절을 베풀며 비교적 영양가 있는 대화를 나눴고, 피라미드를 구경한 뒤 함께 식사를 하자고 말하는 그의 말에 인사까지 했다. 남자가 아내에게 저 멀리 보이는 피라미드를 가리키자 아내가 살짝 감탄성을 터뜨리는 훈훈한 모습을 봤을 때 내 믿음은 절정을 찍었다.


결론부터 말하자. 그들은 가족(을 위장한) 사기단이었다. 자신들과 함께 피라미드를 구경하자는 남자의 꼬임에 넘어간 나는 돈을 지불하고 말에 올라탔다. 당연히 지불한 금액은 시세보다 높은 바가지 금액이었다. 잠시 뒤에 다시 만나자며 잠깐 헤어졌던 가족의 모습을 그 뒤로 다시는 볼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사실 바가지를 당한 금액은 크지 않았다. 말을 타라고 끈질기게 권유하는 남자의 모습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신용카드와 대부분의 돈을 꺼내 숨긴 덕분이다. 바가지라고 해봤자 끽해야 1,2만원쯤 더 줬으려나? 하지만, 그럼에도 내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 즈음의 나는 여행 내내 호객꾼와 거지, 사기꾼들로부터 하도 시달린 나머지 현지인들이 다가오면 경계와 불신의 시선으로 먼저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때로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들을 냉랭하게 대한 적도 있었고, 소문이 좋지않은 곳을 다닐 때는 긴장의 날이 무뎌지지 않게 계속 신경을 썼다. 그런 내 모습에 나 스스로도 지쳐있을 때, 아기를 안고 내게 다가온 부부는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존재였다. 정말 믿을 수 있는 현지인을 만났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았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그런 내 한 순간의 방심을 놓치지 않고 멋지게 나를 속여넘겼다.


차라리 그냥 평범하게 바가지를 썼다면 덜 아팠을텐데. 그냥 시원하게 욕 한 번 뱉고 말았을텐데. 이 사람만은 다를것이라 믿음을 줬던 사람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가장 먼저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나를 적신다. 상대에 대한 내 믿음이 그 사람에겐 그저 돈벌이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니, 내가 누굴 욕할 수 있을까. 이런 수작에 어설프게 속아넘어간 내 어리숙함이 그저 부끄러울 뿐.

8월의 이집트. 내리쬐는 햇볕을 피해 나무 밑의 그늘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앉아 감정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여행을 하면서 낙담하는 순간은 자주 찾아온다. 여행지의 풍경이 인터넷에서 봤던 사진에 못 미칠 때, 예상보다 경비가 많이 들 때, 숙소 침대의 매트리스가 꺼졌을 때, 식당에서 치킨을 안 팔 때....하지만 그 중 가장 여행에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순간은 사람과 엮일 때다. 상대방의 행동과 말로 인해 기분이 상하고 상처입는 그 순간만큼 여행이 싫어질때가 있을까. 이집트에서 당한 사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까짓 돈 몇 푼보다 나를 더 힘들고 아프게 만든건 상대방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며 여행을 다니는데 항상 하하호호 웃을 수 있기만을 기대하진 않는다. 남은 일정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그들로부터 얼마나 더 상처받을지도 알 수 없다.(2) 하지만 부디 여행의 신이시여, 바라건대 제가 감내할 수 있을만큼의 아픔만 주소서.




(1)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배낭여행자들이 이집션들의 지나친 호객행위와 갖가지 창의적인 사기행각, 그리고 숱한 기행(奇行)들로 피해를 겪어야했던가. 이집트를 여행한 사람들은 기념품 대신 번뇌를 껴안고 귀국길에 오른다. 오죽하면 이집트의 별칭이 ‘중동의 인도’일까.

(2) 그리고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