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속 라디오] 2화. 익숙한 목소리
글 : 유아사해올
지난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방학이라 늘 늦잠을 자는 게 당연하던 때다. 그날도 전날 늦게 잠을 청했고 일어나니 12시가 다 되었다. 눈은 떴지만 잠이 덜 깬 상태여서 라디오나 듣자고 무심결에 라디오를 켰다. ‘MBC FM4U’에서 하는 ‘정오의 희망곡 김신영입니다’(이하 ‘정희’)가 할 시간인데 웬 낯선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희를 오랜만에 듣기는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에 놀라 잠이 다 달아났다. 급히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된 김신영 DJ를 대신해 ‘로이킴·정준영’이 임시 DJ를 맡고 있는 것이었다.
김신영DJ는 2007년 ‘(故)이언, 김신영의 심심타파’ 때부터 좋아했던 DJ이다. 그녀의 본업인 개그우먼일 때부터 특유의 센스와 재기발랄함을 좋아했고, 그 재치가 라디오 전파를 탈 때는 2시간 동안 쉴 새 없이 깔깔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2007년 당시에는 라디오에 문자를 많이 보내는 편이었는데, 그러면 라디오국에서도 귀엽게 답장이 오곤 했다(물론 미리 설정된 기계적인 답장이겠지만). 그리고 가끔은 내가 보내지도 않았는데 라디오국에서 먼저 문자가 오곤 했는데 한날은 공부를 하던 중에 문자를 한 통 받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특이한 간판 이름을 문자로 보내주세요~ -신동·김신영의 심심타파^^]
안 그래도 공부가 지겨웠던 찰나에 하던 공부를 잠시 중단하고 살아오면서 제일 특이했던 간판들을 머릿속으로 쥐어짰다. 한참을 생각해 편의점 이름으로 본 적이 있는 [다파라치아]를 답장으로 보냈다. 심심타파에는 문자를 엄청 많이 보내봤지만, 한 번도 읽힌 적이 없기 때문에 큰 기대를 걸지 않고 다시 공부에 전념했었다. 그런데 며칠 뒤, 라디오국에서 다시 문자가 왔다. 나의 문자 사연이 소개 돼 상품을 전달할 것이니 주소와 이름을 보내달라는 것. 자습실에서 문자를 받아서 기뻐도 소리도 못 지른 채 방방 뛰면서 얼른 집으로 왔다. 다시듣기로 들어보니 나의 문자를 김신영의 특유의 사투리톤으로 “마 여 있는 물건 다 파라치아~”라고 맛깔지게 살려주었다. 내가 지은 간판의 이름도 아닌데 그녀의 목소리를 타고 많은 이들을 저렇게 웃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신기하고 뿌듯하기까지 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다시 복권에 걸리지 않을까 또 복권을 사는 것처럼, 나는 그날 이후로 내 문자가 읽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내 문자가 언제 읽힐지 모른다는 생각에 라디오를 매일같이 들었다. 라디오를 하루하루 챙겨듣는 것이 수험생의 입장에선 버거웠지만 17살의 소녀의 입장에선 가장 즐거운 일과였다. 그렇게 보냈던 시간만큼 김신영DJ와는 더 가까워졌다. 그런 나에게 그녀가 DJ를 그만뒀다는 생각은 매일같이 보던 친구가 전학 간 것만큼이나 놀라운 소식이었다.
대상이 어떤 것이고, 그 무엇이든지, 익숙한 것이 사라져버리면 마음 한켠이 휑하다. 하루도 빠짐없이 내 왼쪽 손목에 붙어 있던 손목시계를 잃어버린 날 친구가 몇 시냐고 물을 때 썰렁한 손목의 잔털만 보며 마음이 휑. 또 평소에는 그렇게 귀찮던 오빠가 군대 간다고 잘 됐다 싶었는데 막상 떠나는 뒷모습을 보니 무던했던 내 마음이 또 휑. 공부하느라 서울에 와서 낯선 천장을 보면서 또 휑. 그렇게 익숙했던 것이 없어지면 구멍을 만들어 휑한 바람이 숭숭 마음을 들락거린다.
다행히 김신영DJ는 3개월 만에 건강을 회복해 로이킴·정준영에게 잠시 빌려주었던 자신의 헤드폰을 도로 되찾았다. 다시 유쾌한 목소리를 듣게 되니 잊고 있던 시계를 다시 찾은 것처럼, 군대 간 오빠가 오랜만에 휴가를 나온 것처럼 반갑다. 이처럼 익숙하고 친근한 것이 라디오의 매력이 아닐까. 착 가라 앉은 마음을 건드리는 나긋한 목소리도, 기분을 업 시키는 유머나 익살도, 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사연들도. 익숙했던 것이 사라질 때의 서운한 마음, 새로운 것이 시작될 때의 두려움, 다시 익숙해지는 동안의 좌충우돌. 다른 사람의 사연이 꼭 내 것인 양 느껴질 때, 같은 시간에 울리는 익숙한 목소리는 나를 위한 위로이기도 하다.
끝으로 이런 느낌에 어울리는 신청곡 하나를 띄우며 마무리 지을까 한다. 김동률의 ‘오래된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