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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서동특집] 서동, 아니 동상동

알 수 없는 사용자 2013. 4. 25. 21:28

 

이곳의 현재 행정구역의 이름은 서동이지만
서동을 좀 안다 싶은 사람들에겐
'동상동'이 더욱 익숙하고 지금도 훨씬 자연스럽다.

나는 그 동상동, 더 자세하게는 89번 버스종점 근처에서 살았다.
서동 유치원, 서동국민학교를 거쳐
구월산과 윤산을 넘나들며 통학했던 부곡여중, 그리고 금정여고까지,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서른이 되어 결혼하기 전까지 동상동은 나를 키웠던 곳이다.

지금은 도로와 건물로 들어찼지만 그 시절 내게는 너무나 넓던 89번 종점 공터.
89번 버스 한 대의 지분을 가진 차주의 딸인 덕에 세차하고 정비하고 운전했던
아버지의 일터 바로 옆이기도 했던 그곳에서 공차기, 시마 차기, 오잠이, 고무줄놀이……
외기도 힘들 만큼 온갖 놀이들을 했었다.

 


그 시절만 해도 유치원을 다니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였는데,
엄마의 학구열로 나는 운 좋게 동상동에서 유일했고
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했던 유치원을 2년씩이나 다녔다.

집에서 출발해 골목을 지나 지금도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홍인약국을 거쳐
동상동 시장길 끄트머리까지 지나야 했으니
얼마나 길고 다이나믹한 통학길이었는지 모른다.
그 길을 여서일곱살박이가 통학을 했었다.

 

 

그리고 골목길.
그 당시 동상동 골목길은 동상동 사람들에게는 함께 쓰는 앞마당이었다.
동네 아줌마들은 늘 모자랐던 살림살이에 보태고자
골목길에 나와 군데군데 모여 앉아 도라지도 까고, 잣도 까는 부업들을 했는데
그러면서 수다들을 떨며 함께 웃고,
양푼이에 밥을 비벼 머리 맞대고 먹으며 식구처럼 살았다.

그 엄마들 옆에서 아이들은
일을 거들기도 하고 소꿉놀이, 숨바꼭질, 종이인형놀이들도 하며 따뜻하게 보냈다.

 

한 골목길에서만 세 곳에서 살았었다.

첫 번째 집은 참 작고 소박했다.

두 번째 집은 우리 동네에서 아마도 제일 넓은 집이었지 싶다.
주로 여기에서 많은 시절을 보냈다.
작은 마당에 큰 오동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있고 국화꽃화분이 참 많았으며,
늘 우리 가족을 제일 먼저 반겨주던 강아지, 누렁이도 살았다.
널찍한 마루엔 아줌마들이 모여 함께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동네 친구들도 우리 집에 와서 많이 놀았다.

많은 추억들을 주었던 두 번째 집을 팔아넘기고 들어간
절반 크기의 세 번째 집. 그곳에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보내고
우리 사남매도 각자의 인생을 쫓아 동상동을 떠났다.

 

 

그러나 나는 동상동을 떠나지 않았다.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동상동에서 살았던 기억과 추억이
이토록 생생히 살아있으니 말이다.
기쁨은 기쁨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자연 속에서 몸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며
골목에서 이웃들과 울고 웃던
그 시절이 오늘따라 그립다.

 


/ 글: 정명화




* 이 기사는 금정구의 지원을 받은 "서동, 고개를 넘다" 책에 실린 내용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