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화봐 show! ] 저는 대한민국을 정말로 사랑합니다 - '남영동 1985'와 '26년'
혼자 살던 집에 한 사람이 며칠간 들어와 지내기로 했다. 그를 M이라고 하자. M은 서울에서 긴 세월을 살다가 부산으로 내려와서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진귀한 선택에 대해서는 설명이 기니 그러려니 하고, 아무튼 요즘엔 저녁마다 그와의 살가운 대화(+음주) 시간으로 살 맛이 좀 난다. 하지만 부산에 내려온다는 사람치고는 평소에 부산에 대한 험담이 많은 편인데, 다 쓰기는 어렵고 한 가지만 고르자면 “부산은 몇몇 진솔한 사람과 바다를 빼고는 다 엉망이다” 정도랄까? 그런 그의 부산행 선택에 대해 그는 아주 당당하게 말한다. “부산을 사랑하니까.” 왜 그럼 그렇게 부산 험담을 하세요? 하니 M의 대답이 돌아온다.
“부산을 사랑하니까, 내가 사랑하는 부산이 이렇게 엉망인 구석이 있는 게 싫다.”
이것이 바로, 이번 글의 핵심이다.
내용이 좋아서 영화적 완성도는 조금 아쉬워도 괜찮다고 할 일이 아니다. 좋은 내용을 잘 전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내용도 결국 강풀의 작품에서 나온 건데 그렇다면 영화가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출처 : 네이버 영화
유사한 시기에 앞뒤로 하여 개봉한 두 영화 <남영동 1985>(이하 <남영동>)와 <26년>을 보게 되었다. 이런 영화는 극장에서 봐줘야 된다는 믿음도 살짝 무게를 실었다. 내용을 떼고 생각한다면, 즉 영화적으로 본다면 <남영동>은 10점 만점에 과감하게 9점, <26년>은 미안하지만 3점이다(원작을 안 보고 영화만 바로 본 관객 기준으로는 5점). <남영동>이 촘촘한 얼개, 심도 깊은 배우들의 연기,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접근, 끈질긴 촬영과 연출 등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라면 <26년>은 캐릭터에 대한 몰이해, 인물 당 비중 배정 실패, 이야기의 고저와 완급 조절 실패, 초보적인 연출, 우는 장면만으로 신파성을 획득하려는 단세포적 접근 등으로 그야말로 망작의 수준 1이다.
그러나 이 두 영화는 그 자체의 영화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접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26년>은 강풀의 원작에 가까운 기준으로 외려 더 접근함을 미리 밝힌다.
우리의 근현대사에는 아픔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왜 이렇게 많을까? 이에 대해서 짚자면야 역사학자들이 수도 없이 이야기들을 뽑아내겠지만, 내 생각에 정말로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건 바로 반성이다. 우리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면 잘못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정리, 즉 반성의 과정이 부재하다. 사라지지 않은 씨들이 결국 그 다음 비극을 창출했던 것이다. 일제시대를 온전히 정리하지 못해 독재정권이 들어섰고, 독재정권을 정리하지 못해 그 다음 군부정권이 이어받았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반성을 하고 물러나야 옳은 것이다. 진심어린 반성이 이어질 때 용서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성과 용서가 이루어졌을 때, 다음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반성이 없었고, 그러니 용서가 있을 수 없었고, 그러니 늘 다음 미래에는 어둠이 들어왔다.
<남영동>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깊게 깔고 들어간다. 영화의 대부분의 상영 시간은 1985년남영동 대공분실 안에서의 22일을 다루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12일째]라는 자막이 나왔을 때 나는 ‘말도 안 돼, 이제 12일차라고? 남은 10일차는 어떻게 되는 거?’ 2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미 이 12일차까지의 맥락만으로도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이 온몸에 스며온다. 내가 저기에 저렇게 누워 있었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가 누구이겠는가. 그 지점에서 보는 것조차도 ‘이젠 그만’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감독은 잔인하리만큼 뚝심 있게 남은 10일치의 고문 장면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김종태와 함께 고통스러워하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지쳐간다. 감독은 다 끝났다고 생각한 마지막 21일차까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심지어 최고 클라이막스로 연출하기까지 한다.
풀려난 김근태. 그를 지독하게 고문했던 이두한을 그는 만나러 간다. 그 앞에서 이두한은 용서를 빈다. 이두한은 그 존재 자체가 우리의 정권의 역사다. 마지막 21일까지 자신에게는 한치의 잘못도 없으며, 역사가 변하지 않는 한(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자신은 처벌받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을 가진 존재다. 그런 그에게 상황이 바뀌었고, 그러면서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를 만나러 간 김근태는 용서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휘파람과, 배우 박원상의 연기로 드러나는 김근태의 표정 연기는 진정한 클라이막스라 할 만큼 압권이다.
최악으로 망가진 또 하나의 캐릭터 권정혁. 임슬옹의 연기는 둘째치고 감독의 표현력의 부재가 문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이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전에 <26년(원작 기준)>으로 돌아가 보자. <26년>은 과거를 바탕으로 두고 현재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과거는 인물들에게 개연성을 부여해준다. 그들이 왜 가슴이 아픈지를 드러내는 이 과거사들로 인해 우리는 <26년>이라는 영화가 가지는 판타지적인 측면 3을 수긍하게 된다. 그러면서 작품은 오늘날 ‘그 사람’을 암살하려는 이들의 그 과정을 스펙터클하게 전개한다. 그러니 <26년>은 기본적으로는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봐야 한다. 두 차례에 걸친 암살 시도씬, 치밀한 계획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엎치락뒤치락 펼쳐지는 공방전, 이것들이 작품에서 관객을 끌어들이는 주요한 부분이다.
<26년>의 ‘그 사람’과 <남영동>의 이두한은 지위가 완벽하게 다르다. ‘그 사람’은 자기 손을 직접 더럽힌 사람이 아니다. 과거에 대한 죄책감이 없고, 지위도 바뀌지 않았으며, 반성 없이 오늘날까지 잘 살고 있다. 그러니 <26년>은 현재가 중요한 작품이 된다. 반성하지 않는 자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과정이 우리의 미래를 바로잡기 위해서 필요하니까. 반면 <남영동>의 경우, 이두한은 자기가 직접 고문을 했으며, 그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고문형사라는 높은 지위에서 죄수가 됨으로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계가 전복되는 과정이 뒤따랐다. 그러므로 <남영동>은 긴 과거 동안 권력을 부리던 자가 한 순간에 쇄락한 모습을 보여주는 선택이 훌륭하다.
‘그 사람’은 예상대로, 반성하지 않는다. 작품에서 그렇게 표현했다고 볼지도 모르겠지만, “내 수중에 전재산 29만 원”이라는 이 대국민 모욕 멘트는 이미 ‘그 사람’의 모티브가 된 인물의 한국 역사상 최악의 반성 없는 권력자에 대한 방증로 남아 있다. 작품 속에 표현된 ‘그 사람’은 2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폭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반성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비극적 역사다. 그러니 ‘폭도’라는 단어가 되물림되는 것이다. 강풀의 원작에서는 마실장도, 최형사도 모두 죄책감을 느끼거나 반성을 한다. 마실장은 자신이 광주에서 죽인 자의 딸을 향해 용서를 빌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 최형사는 옳은 것에 대한 신념을 자신의 상황을 위해 정당화했다는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실은 어떤 식으로든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용의 진정성은 물론이거니와 기술적으로도 아주 치밀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 출처 : 네이버 영화
<남영동>에서 견지하는 중요한 부분은 가해자들에 대한 묘사다. 백계장(서동수 역), 김계장(이천희 역)은 고문하는 이들도 실은 평범한 사람이지만 상황에 의해 그렇게밖에 몰릴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그건 이계장(김중기 역)이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분노에 차서 김종태에게 못할 짓을 하려는 이두한을 몸을 날려 막아내기까지 했으니까. 이 세 사람은(더하자면 강과장(김의성 역)까지 네 사람) 이두한이 하는 행동을 보며 ‘심하다’라는 판단까지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계장이 김종태의 뺨을 때리면서 ‘제발 시키는 대로 해라’라고 외치는 건 그들이 선택한 방식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누군가를 고문하고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그 선택이 옳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이들의 인간적인 면모는 피해자가 이들을 용서할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 영화는 이러한 과정이 전혀 없었던(인간적이지도 않았고, 자기 권력을 철저하게 부렸던) 이두한의 반성과 그에 대한 용서의 이야기를 필연적으로 안고 가야만 한다. 이두한의 어깨에 차마 올리지 못하는 김종태의 손, 돌아나가려는 그의 귀에 들려오는 휘파람. 고작 영화만 본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용서를 논하는 게 무색할 만큼 김종태는 직접적인 피해자다. 대통령이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어떻게 당해본 사람이 나보다 더 온건하게 이야기를 합니까?”라고. 그의 귀에 환청처럼 들려오는 휘파람은 트라우마로 각인된 과거다. 김종태가 이두한을 만나러 찾아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선택이라 할 만큼.
어째서, 죄를 저지른 최고의 원흉들은 여전히 반성이 없고, 그 고통을 상흔으로 지닌 이들의 손이 저렇게 떨어야만 하는가.
<26년>이 그렇게 일종의 ‘테러 활동’ 4을 강행해서라도 ‘그 사람’에게서 반성을 이끌어내려는 것은 이러한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과정은 <남영동>에서처럼 반성이 먼저고, 그 다음 피해자들이 용서를 해줄 것인가의 문제여야 한다. 허나 가해자의 반성이 없는데 피해자들이 용서를 원하는 이런 기형적 사태를 우리는 오늘날 수많은 문제들에서 겪고 있다. 위안부 사태도, 삼성 백혈병 피해가족 시위도,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 <26년>과 <남영동>은 과거를 가져옴으로서 오늘을 보여준다. 이 두 작품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진정한 핵심은 무엇일까.
M의 말을 이 작품들에 적용시키자면, “한국을 너무 사랑하는데, 우리가 사랑하는 한국에서 이렇게 수치스러운 역사가 바로잡히지도 못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니까”나온 작품이라고 봐야 한다.
<남영동>에서 김종태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대한민국을 정말로 사랑합니다.”
이 작품들을 보면서 반드시 생각을 해 보아야 할 부분인 듯. 우리가 이 나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명대사투성이인 이 영화에 나오는 엄청난 대사 중 하나. 저 대사의 앞에는 "그럴 리는 없겠지만"이라는 말이 더 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덧붙임 1. <26년>의 최형사가 문익환 목사를 고문한 이야기는 마치 <남영동>의 모티브가 된 것 같은 느낌까지도 든다. 물론 문익환 목사의 대응 방식은 완전히 달랐지만.
덧붙임 2. <남영동>에서 고문기술자 이두한을 연기했던 이경영은 <26년>에서 ‘그 사람’에 대한 복수를 실행하는 주인공들의 우두머리인 김갑세 회장을 연기했다. 한 배우가 한 영화에서는 ‘전두환 정권은 정당하다!’를 외치고, 같은 시기에 개봉한 다른 한 영화에서는 ‘당신은 사죄를 해야 해!’를 외치는 장면을 보는 건 색다른 재미다.
덧붙임 3. 영화를 한 번 보고 나와서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 본문에 적진 못했지만, <남영동>의 후반으로 가면 김종태를 고문했던 형사들이 처벌받는 과정을 신문 기사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배후인물에 해당하는 윤사장이 벌을 받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재미있는 요소다. 윤사장은 지시만 내리고 자기 손을 더럽히진 않았다는 점에서 ‘그 사람’과 같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니까.
덧붙임 4. <남영동>에서 고문 장면은 정말 지독했다. 그 수많은 촬영 기술을 내가 다 알진 못하지만, 적어도 물고문 장면은 실제로 배우의 얼굴에 그만큼 물을 붓는 고문을 가하지 않고서야 찍을 수 없을 법한 장면이었다(롱테이크라니, 롱테이크라니!). 감독도 감독이고, 박원상도 대단했다. 자신을 고문하던 배우들이 미워지기도 했다는 박원상의 이후 인터뷰가 뭉클했다.
덧붙임 5. <26년>에 감점 1점을 더하겠다. 이유인즉슨, 개인적으로 원작에서 가장 좋아했던 장면이 영화에서 빠져서 그렇다. 심미진을 구하기 위해 곽진배가 그녀를 데리고 지하철을 타려는 순간, 자신을 잡으려고 온 경호원 두 명을 향해 사시미를 뻗으면서 “한 놈은 확실히 죽인다”고 말하는 그 포스. 난 그 장면을 영화가 어떻게 보여줄지(=진구가 어떻게 연기할지)가 너무 궁금했다. 그 장면을 자르다니 최악이다. 진배의 두목의 포스를 1/100으로 줄여놓은 것도 분노가 치미는 판국에(“담배 사러 보냈어”를 그 따위로 연출하다니 눈물이 눈앞을 가린다)!
- 망작의 수준 : 여기서 이야기한 항목으로 5점이다. 여기에 강풀 원작에 대한 비판을 더하면 2점 추가 감점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강풀 만화 원작 영화들은 하나 같이 졸작이었는데(‘이웃사람’과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아직 못 봤으므로 일단은 제외해 두겠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강풀 만화가 갖는 힘을 감독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강풀의 만화에도 우는 장면은 많이 나온다. 하지만 거기에는 항상 ‘왜 우는가’를 아주 공들여서 설명하는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그 캐릭터들의 삶의 동선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강풀은 각각의 캐릭터들의 디테일한 상황을 모두 동등한 비중으로 묘사해낸다. 우리는 이들이 왜 우는지를 알고 있다. 그 상황이 가져다주는 처절함과, 그렇게 디테일이 묘사된 인물들 중에는 나쁜 행동을 하게 된 이는 있어도 나쁜 이는 없다는 것이 크게 작용한다(‘26년’의 그 사람은 디테일이 묘사되지 않았다. 강풀의 만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순수악에 가까운 존재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제한된 시간 안에 현재적 내러티브를 끌어가기 위해 이런 디테일을 소거시키는 선택들을 해왔다. 그러니까 원작 만화에서는 눈뜨고 스크롤을 내릴 수 없을 만큼 눈물 나는 장면이 영화에서는 눈뜨고 봐주기 어려운 신파가 된다. 이런 부분에서 개중에 가장 나았던 건 ‘바보’였고 최악이었던 건 ‘아파트’였다. 원작이 있는 영화들이 원작을 생각 없이 따라가선 안 되겠지만, 원작의 장점은 최대한 살리면서 감독의 개성을 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화 ‘26년’은 그러면서 캐릭터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캐릭터들이 서로의 내면을 이해하는 과정은 완전히 건너뛰고, 마실장은 그냥 광기어린 인물로 묘사, 최형사는 평범한 캐릭터로 전락시켜 버렸다. 이건 범죄 수준이다. 마실장과 최형사에 대한 적확한 묘사는 원작이 추구했던 핵심 요소, “그들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결국 이들도 피해자일 뿐이다”라는 주제 의식을 부각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영화의 감독은 그 지점을 무시해 버리고 단순한 복수극으로 작품의 질을 떨어뜨려 버렸다. 제발, 다음에 강풀 작품을 또 영화화하는 사람이 나온다면, 차라리 3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어서라도 캐릭터를 좀 살려달라. [본문으로]
- 남은 10일차는 어떻게 되는 거? : 이 영화는 포스터의 홍보 문구 자체에 고문 기간인 22일이 명시되어 있다. 이 정보가 포스터 상에 사전에 제시되는 방식은 적절한 전략이 되었다. 관객들은 이 괴로운 영화가 22일치의 흐름을 거의 전부 다 보여줄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관객들은 영화를 장악한 고문씬에 철저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영화의 포인트는 이 부분에 있었다. ‘고문 전문가가 얼마나 다양한 고문 기술을 선보일 것인가’라는 처음의 예상과는 다르다. 영화에는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이 전부이다. 중요한 건 기간이고, 그 기간 동안의 고통을 체감하게 해 주는 연출이다. 정지영 감독은 과연 장인이었다. 고문 장면에서 롱테이크 촬영을 선택하다니. [본문으로]
- 판타지적인 측면 : 총기가 허용되지 않는 나라인 만큼 범죄에도 제한이 많은 우리나라다. 그런데 저격이니 권총이니 이런 것들이 튀어나오고, 특이한 인물들이 다들 한 가닥씩 하는 이런 내용들을 우리가 수긍하게 되는 큰 맥락도, ‘저런 아픈 과거가 있으니’라는 생각을 바탕에 두게 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테러 활동 : 권력자 내지는 현재의 법 체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