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라고 불러주기 싫은데요 - '오빠'와 호칭어
Illust by 스타몬키
나이가 들고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이 드물다. 회사 생활을 시작하며 만나는 관계에서는 엄밀한 호칭어가 존재하는 법이다. 대리면 대리, 부장이면 부장, 윗사람이면 뒤에 '님'을 붙이는 것까지 착착이다. 학교도 비슷하다. 그런데 이런 회사나 학교 생활 말고의 관계에서 만나는 사람 사이에는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이 스물아홉인 사람이 나이 스물다섯쯤으로 보이는 점원을 부를 때 뭐라고 불러야 할까. 아가씨는 스물아홉이 네 살 어린 여성에게 쓸 말은 아닌 것 같다. 이모라 부르면 스물다섯이 하이킥을 날릴 거다. 우리는 이런 때에 종업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말에는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인 지칭어와 그를 부르는 말인 호칭어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관계가 모호해지는 경우에 부를 말이 마땅히 잘 생기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쓸지 몰라도 대개는 '종업원'이라는 말을 호칭어로 쓰는 법이 없기 때문에, 앞서의 경우에서는 상대를 어떻게 부를까가 모호해져 버리니까 아예 부르지 않거나 그냥 자기를 중심으로 불러버린다. "여기요".
이렇게 호칭어가 복잡해지는 건 높임말이 발달한 문화 때문이 아닐까. 나이의 고려 없이 사람 이름이나 직명으로 바로 부를 수가 없는 우리는, 호칭어 안에 높임법이 가장 잘 반영된 친족관계 어휘들을 적극 활용한다. 그 하나가 '이모'나 '삼촌'이며, 경우에 따라서 '어머니'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이모 여기 깍두기 곱빼기 추가요 / 어머니 오늘 간이 좀 짜네~). 그 중에서도 특히 젊은 층들에게 가장 미묘할 단어인 '오빠'를 한 번 생각해보자.
같은 대학이나 학교를 나온 나이 많은 사람은 우리가 '선배'라고 부른다. 직명이 호칭이 되는 모범 사례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생각해 보자. 어떤 학연도 없는 관계의 두 남녀가 만나서 친해지려고 한다. 이때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오빠'라는 단어가 입에 익은 사람은 별 상관없이 오빠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이건 '오빠'라는 단어에 붙이는 의미 범주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오빠'의 용례를 살펴보면 다음 세 가지 정도가 나온다.
오빠 1 : 혈연 관계. 오빠라는 단어의 가장 일차적인 기능이며, 방구석에서 레슬링하며 자라온 남매 사이에서 사용 가능. 하지만 이 경우 여동생들은 격한 반감을 가지며 ‘오빠’라는 호칭 대신 ‘니’, ‘돼지’라는 호칭을 더 많이 사용함. 제한적으로 사촌오빠를 부를 때 종종 '사촌'을 생략하기도.
오빠 2 : 연인 관계. 일반적으로 나이가 많은 남자와 그보다 어린 여자가 사귀는 포맷에서 사용하는 몹쓸 호칭. 남자의 마초성을 적당히 자극하면서 여자의 귀염성을 획득할 ‘수’ 있음. 제3자들의 앞에서는 계급 갈등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함. 특히 여자가 비음을 강하게 섞을 때 악영향이 심화됨.
오빠 3 : 나이 차이 10살 미만의 타인 관계. 대신 면식 관계에 제한. 친근함의 의미를 살리는 호칭표현. 이 이상의 나이 차이에서 부를 경우 당사자들보다 듣는 타인들이 오해함. 남자의 외모에 따라서는 신고를 당할 수도 있음.
Illust by 스타몬키
모든 남자와 여자들이 오빠 2와 오빠 3의 관계를 적당히 구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한 것 같긴 하지만 내 경우는 연상이 2-3-1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의견이 분분해서 더 문제이지만, 아무튼 다음과 같이 상황을 가정해 보자. 민호는 영희에게 친오빠가 장착되어 있는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민호는 영희가 철수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참사를 목격한다.
깜짝 놀란 민호, 묻는다. “철수가 혹시 니 남....친....?(오빠 2)”
영희는 시크하다. “그냥 아는 오빠야.”
민호는 영희의 대답에도 불구, 오빠 3이 오빠 2로 변할 가능성을 생각하고(오빠가 아빠되지) 좌절감을 느낀다(왜 내겐 오빠 2로 불러주는 아가씨가 없나요 눈물).
반면 이때 영희가 다른 대답을 했다 치자. “아, 우리 친오빠.(오빠 1)”
민호는 급격히 관심이 시들해지면서 화제를 전환할 것이다. “영희야 그런데 너 나랑 사귈래?”
오빠 2가 문제다. "당신에게 귀여워 보이고 싶지도 않고 당신의 마초성을 만족시켜주고 싶지도 않으며 당신은 내 남자친구가 아닐 뿐더러 앞으로 영영 그럴 일은 없어"라고 생각하는 여자가 "너 좀 귀여운데 오빠라고 불러주면 더 '기'여울 거 같아 오빠라고 불러주면 달려오는 트럭 앞에서도 너를 지켜줄께 언젠가 우리가 사귈 수도 있겠지 그럼 언덕 위에 하얀 집을 짓고 애는 둘만 낳아 궁시렁 궁시렁 궁시렁"인 남자를 만난다면 답이 없다. 그 나이 차가 열 살 이상이면 그 가능성은 사람이 밝은 대낮에 벼락을 맞으면서 동시에 버스에 치일 확률보다 낮아진다. 여자는 상대 남자가 저 멘트(궁시렁궁시렁) 중의 하나만이라도 생각할 거라 가정하면 절대 오빠라는 말로 부르지 않을 것이다.
존대법이 강하지 않아 나이가 몇 살 차이든 서로의 이름을 바로 부를 수 있는 외국어와는 다르다. 나이에 관계없이 이름 자체에 애칭이 있는('사뮤엘'과 친해지면 '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관계에선 이런 고민이 적을 수밖에. 한편, 우리는 심지어 별명에까지도 존칭 표현을 써야만 하는 나라다. 내 동기는 나를 '신깡'이라고 불렀지만 내 후배들은 '신깡선배'나 '신깡오빠'라고 불렀던 식이다. 불편하기 짝이 없다. ‘무연고에 이성이면서 나이 차가 5살 이상 날 경우에 부르기에 적절한 호칭’으로 ‘아저씨’, ‘선생님’ 등 사람을 중년 취급하는 것 말고 다른 무언가가 있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러니 여자들은 전혀 연고도 없는 사람을 선배라고 부르거나, "형"이라고 하며 무성적 관계임을 강조하거나, 누구씨라고 부르면서 적당한 거리를 두는 등으로 고생을 해야 한다. 이쪽은 생각도 않는데 혼자 무슨 상상이냐고 남자들이 따질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개개인의 성향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당신이 그런 상상을 할지도 모르니까’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인상을 누구에게라도 주기는 싫으니까’라는 문제인 셈이다.
여자들이라고 무조건 오빠라고 부르기를 꺼려한다는 건 아니다. 외려 그 단어의 친근함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다만, 알아서 오빠라고 부르는 것과 오빠라고 불러달라는 건 느낌 자체가 다르다는 거다. 그러니 잘 생각하도록. 여자가 오빠라고 부른다고 해서 당신이 그 여자의 남자친구가 될 것도 아니니 대리만족을 하지 말 것. 여자들이 당신에게 기이여워 보이려고 오빠라고 부르는 게 아님을 명심할 것. 이건 말을 쓰기 불편해하는 쪽을 이해해줄 문제이기 때문에 남자들에게 당부하는 거다. 그리고 별첨하자면 서울 남자들은, 부산 여자들에게 부산 사투리로 '오빠야~'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하지 마라. 우리도 쉽게 못 듣는다고~~(지역감정 맞다. 다 뎀벼)